맺어지지 못한 영혼들이 별이 되어 그 자리에 못 박히다... “이연”
異緣 #.54
“돌아가겠다고?”
사절단을 배웅하던 때의 흥분과 고조된 분위기는 행렬을 배웅하는 행사가 끝난 뒤 자연스레 일상의 분위기 속에 묻혔고, 그것은 리원이 화궁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제 방으로 진을 불러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돌아가야지. 며칠 뒤에 윤오가 무사히 돌아오고 나면, 그 때 출발할 생각이야.”
한결 차분하게 말하는 진이었음에도 되려 리원은 덤덤해지지 못하는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맘이 들어서 인 것이다. 마치 주천의 황궁에 있을 때, 효원궁에 함께 살며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주는 거리에 진이 있었던- 그 때로 돌아와 있다고 착각이나 한 것처럼.
“가지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네.”
“지금으로써도 충분히 난처하잖아. 내가 여기 있는 것 때문에.”
“돌아간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어.”
“좋다, 그냥. 지금으로도 좋아.”
“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걸로도 만족해. 또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다 알게 됐으니까.”
“피- 그 며칠 사이에?”
벽화에 대한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진 지난 주천국에서는 -비록 그것이 황제의 반강제적인 명령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도성에서는 정말 멀리 떨어진 외진 마을에서 조차도 벽화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굳이 알고 싶어하는 자도, 알아내려하는 자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전리품으로 끌려와 주천을 통째로 흔들어놓고 제 나라로 돌아가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녀.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들 주천국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덧내는 일이라고 다들 암묵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진은 그 세월동안 리원을 죽도록 미워했다.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 버젓이 떠나버린 제 ‘친구’라는 이름의 못된 그녀를. 처음 리원이 떠나버리고 증오만 남았던 마음은 점점 미움으로 퇴색하더니 애증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어 조금씩 그리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라는 마음이 움직인 발걸음이 결국 그 장본인을 찾아오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 것 같기도 해.”
“어째서?”
“난 니가 우리 폐하 초상을 붙여놓고 활이라도 쏘고 있을 줄 알았거든.”
“풉..! 저주라도 하고 있길 기대한거야?”
“오래도록, 소식하나 전해오지 않았으니까.”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였어.”
‘륜후’라는 이름을 가진, 주천이라는 나라의 황제라는. ‘그’에 대한 지금의 감정은 그리 뚜렷하지 못하다. 애틋함도 아닌, 그렇다고 미움이나 증오도 아닌. 마치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그 무엇인 마냥. 그저 꺼내보지도 않는 기억 한 켠에 지워지지도 않은 채 늘 그대로인 얼굴.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건, 윤오 때문인지도 몰라.”
“윤오 때문에?”
“그래. 어찌됐든 윤오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맞는 말이야.”
“그는.. 잘 지내니..?”
찻잔으로 눈길을 떨어뜨리며 리원이 속삭이듯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진은 잠시 멈칫했다가는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잘’ 지냈다는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리 좋지 못하셨어. 처음엔.”
“.........”
“전부 다섯군데였지.”
“..뭐가?”
“널 대신해서 맞으셨던 화살.”
마치 눈앞에 그 날의 일이 그려지듯 아스라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리원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울부짖음. 흐느낌.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나 가야만 해서 아쉬움 묻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지금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걸 치료하시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 이전까진 어떤 전쟁에서 상처를 입으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짧은 시간 안에 회복하시곤 해서 의관들이 타고난 무사라고 일컫곤 했으니까.”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물론 지금은 아무렇지 않으시지. 상흔은 남아있겠지만.”
“.........”
“난 그 상처들을 직접 봤어. 니가 떠나고 며칠은 폐하의 방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보냈었거든. 그 다섯 개의 상처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내가 만든 것이니까. 부디 내 목을 베서 크나큰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사 매일 빌었어.”
“목을 베라니, 너도 참.”
“그 정도 벌은 당연할거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난 니가 그렇게 떠나버리는 걸 어느 정도 방관한 셈이니 죄책감도 있었고.”
리원은 진의 말을 들으며 마치 기억을 되짚어 그것들을 곱씹어보듯 아련한 표정이었다. 멀리 과거를 바라보는 것 같은 깊은 눈을 하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는 눈동자의 어렴풋함을 보며 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가장 큰 죄라면 역시, 너를 폐하 곁에 묶어두지 못한 거겠지.”
“........”
“내가 효원궁을 감시하게 됐을 즈음에 폐하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신적이 있어. 그건 명령이 아니라 거의 ‘부탁’ 수준이었지.”
“무슨, 부탁이었는데..?”
...
“할 수만 있다면 효원궁을 물 셀틈도 없이 봉해버리고 싶다. 그걸 너에게 맡길테니 제발 지켜다오. 그녀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
“폐하는 마치, 니가 그렇게 떠나오리란 걸 예상이라도 하신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셨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몹시도 흔들리고 있는 리원에 비해 너무도 분명하게 응시하고 있는 진의 눈빛이 마치 뭔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마지못해 리원이 먼저 시선을 피했을 때 진은 다시 입을 연다.
“다시.. 돌아갈 순 없는거니..?”
그 날의 ‘나’로. 그 때의 그를 미워했던 ‘나’로. 미워했지만 그만큼 사랑해서, 그러나 애증은 되지 못한 채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시절로.
“폐하께선 그 후 수년간 대관들의 끈질긴 요구에도 여전히 영궁(英宮)을 비워두고 계셔. 주영옥의 주인이 아직도 없다는 뜻이야. 그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돌아간다는 건, 뭘 의미하는거야..?”
“........”
“여길 버리고, 그토록 오고 싶어 발악을 했던 이 땅을 떠나서 그 사람 곁에 가 있으라구..?”
...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겠지. 내가 눈을 감아도.
“아예 없을 일도 아니야. 니가 부정하고 있는 거잖아.”
“너 뭔가 착각하고 있어, 진아. 부정이 아니라 사실이야. 모르겠어? 여길 떠나서 그곳으로 가게 되면 당장에 그 사람과 내가 행복해지리라고 믿는거야?”
“그건 부정이야. 절대-”
“그만하자.”
“넌 그 분을 사랑해. 물론 지금도.”
“........”
“이게 증거야.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너를 인정해.”
리원과 진의 눈빛이 강하게 부딪친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리원이 자신을 재촉하듯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또 다시 먼저 시선을 피한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는 마음속의 채근과 함께 동그란 눈에서 기어코 똑- 하고 투명한 감정의 결정(結晶)이 떨어져 내린다. 눈물을 허용해버린 리원의 감정이 결코 울음만은 막아보겠다는 듯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며 참아보지만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결국 밭은 숨을 내뱉으며 흐느껴버렸다.
“차라리 더 지독하게, 내 나라도 오라버니들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빠져버렸다면 좋았을거라고.. 늘 생각했어..”
“........”
“그래서 정말 눈 꼭 감고 그곳에 머물러 머지않아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상상도 안 해 본건 아니야. 정말 그랬다면 윤오가 아버지 없이 외롭게 자랄 일도 없었을테니까.”
“........”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어. 이제 그런건 바랄 수도 없게 되버릴만큼. 난 머지않아 정말, 어쩌면 혹시 이 나라의 황제가 되어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어떤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야겠지. 나와 벽화와, 우리 윤오를 위해서. 난 지금으로 더 이상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차라리..”
...
“그의 기억을 모조리 다 지워버리는 편이 나을만큼.”
괴로워한다는 말로는 조금 과장된 것 같은 리원의 얼굴을 보고 진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짧은 한숨으로 맺어지는 리원의 말에서 진은 제가 바라는 것이 제 친구의 그것과 너무 먼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리원 앞에서 더 이상의 말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애초에 괜한 소릴 했나봐. 못 들은걸로 해줘.”
“괜찮아. 니 진심을 안 것 같아서 나도 후련해.”
그리고 친구라는 이름의 두 사람은 잠시 적막 속에 놓였다. 서로의 생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각자의 머릿속을 가득채운 물음표와 반점들 사이를 헤맬 뿐이었다.
첫댓글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고 싶네요
dkzkdkzpal 님★ 54화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단 리원의 아들인 윤오가 17세라는 점은 밝혀졌으니 그녀가 륜후와 헤어진 지도 17년 가량이 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벽화국에서는 자겸과 리원을 차기 황제 내정자라고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리원도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겠죠. 비록 그녀가 륜후와 헤어질 때 애틋한 감정이 더 컸고,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본다해도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그를 찾아가기엔 그녀가 갖고 있는 지위나 주변의 상황들이 많은 장애가 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는 단점과 함께,
윤오에게 여지껏 모든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간의 연재분에서 그런 점들이 비춰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제가 조금 안일했던 모양이네요,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합니다^^
.....음.....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리원의 상황이상황인만큼...
까불지마ㅋ 님★ 아무래도 리원의 마음이 예전같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앞으로 이런저런 심리묘사에 더 힘을 쏟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푼수쟁이 님★ 많고 많은 인연중에 이러한 인연으로 만나야 했던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이는 당사자인 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급니다, 새삼 안쓰럽네요;;; 머지않은 완결까지 꼭 함께 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벽화는 오라버니께 맡기고 리원이는 두나라의 친목차원에서 주천과 벽화의 정식절차를 통해 륜후와 맺어지면 안되나요ㅠ_ㅠ 저 둘이 너무 안타까워요~
소영★§ 님★ 부디 두 사람의 재회에서 다시 둘의 가슴에 불이 붙을 수 있을만한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네요~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오늘도 아버지와 아들은 만나지 못했군요ㅠㅎㅎ작가님 댓글로 요약을ㅋㅋ
미친르샤♬ 님★ 가을을 타려는지 요즘 자꾸만 기분이 센치해져서 덩달아 연재분의 내용도 가라앉고 있는게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다음편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리원에게 있어 륜후를 향한 마음은 버리지도 못하겠고 품기에는 어려워서 품은 것도 아니고 또 버린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의 온기를 남겨둔 채, 식어가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보다는 그리움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생하고 다 내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살짝 보인 그 마음은 리원에겐 옅은 향내 같은 그런ㅡ 사라져도 약간의 허무함만 남을 그런 감정인 것 같기도 해요. 쉽게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겁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오로지 순수한 그 감정만 있어야 한다죠. 하지만 그것은 리원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오로지 륜후만을 사랑한다는 것, 아마 자신조차도 불허할 일이니까요.
별이빛나는만큼만 님★ '조금의 온기를 남겨둔 채 식어가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보다는 그리움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한참 읽고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사랑한다는 감정에 온 마음을 기울이기엔 너무도 여유롭지 못했던 리원이 이제와 새삼 안쓰러워집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화살맞은 륜후가 어떻게 됐는지 그 뒷얘기가 항상 궁금했는데... 드디어 제 궁금증을 풀어주시네요^^ 륜후가 직접 등장하진 않았지만, 지난번 말타고 등장했던 때보다 저는 이번편이 더 좋아요^^;; 둘은 정말 '이연'으로 끝나는건가요?? ㅠㅠ 해피엔딩을 바라는 독자는 저밖에 없는건가요....?! ㅜ_ㅜ
dmddmd 님★ 늘 이렇게 뒷북치기(?)를 좋아하는 저라서;;;; 읽으시는 분들께는 약간 지루하고 번거로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버릇을 고치지 못하네요^^ 완결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해피엔딩을 생각지 않은건 아니예요, 늘 그렇듯 지금도 해피앤딩과 새드앤딩 두가지 갈림길에서 저울질하는 중이니 앞으로도 관심있게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그동안며칠잠수타서전편답글을까먹엇어요♡이해해주실꺼죠//이번편은정말'이연(異緣)'이라는느낌이확확들정도로아련한느낌인걸요....저는주천이랑벽화랑화합해서리원이랑륜후랑공동황제(?)가되었음좋겟다는생각이.... ㅋㅋ 이번편이 뭔가 심오하고 슬프고 아련한내용이여서 그런걸까요? 위의 분들도 다 심오(?)하게 적어주신거 같아요! ㅋㅋ 성실연재감사하구요,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저 이 닉넴으로바꿧어요♡
햇살따뜻한마루 님★ 꼬릿말 달아주시는건 의무가 아니예요, 잘 읽어주셨다는 한마디로도 충분합니다^^// 바꾸신 닉넴도 여전히 늘 뵙던 이름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산뜻하고 좋은데요^^ 전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리원과 륜후가 함께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독자님들이 많으신것 같아요, 완결까지 앞으로 남은 시일동안 저도 어느것이 더 좋은 방향일지 무던히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시험때문에 정신이 없네요ㅠㅠ 이번편은 정말 마음 한구석이 짠 해지는 이야기네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려서 서로가 전처럼 뜨겁게 사랑하지는 못하는거 같아 너무 안타깝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때 그때 좋은쪽으로 마음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헤르티아 님★ 에궁, 시험준비하시느라 한참 바쁘실텐데 늘 이렇게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하면서도 제가 되려 죄송스럽네요^^;;; 억지스럽지만, 헤르티아님 시험 잘 보시게 응원하는 마음으로라도 더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내용 보여드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