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小菊)의 향기를 기다리며
조순희 (예원)
계단에 놓인 소국(小菊)이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자글자글하게 꽃망울
들을 내어 보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야물게 보여 금방이라도 봉오리를 터
트려 진한 향을 뿜어낼 것만 같습니다.
어느 샌가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소국이 가을 한때 아름
답게 만개할 준비를 하듯이 한가위 명절을 지내기 위해 저 또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라는 위치에서 자연히 따르는 의무와
책임 등 이모저모 걱정이 주어져 심란한 상태에서 차례준비 과정에 들어
갔습니다.
누구나 다 이 명절을 보내기 위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왜 나는 애절
한 마음으로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 한 가닥 슬픔에 잠기면서도 한편으로
는 행복한 삶에 대한 기쁨으로 살짝 혼자 웃음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이 세상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십 년 만에 ‘행복'이라는 복을 다시 찾
는 기분이었습니다 사는 것은 화려할 것 없고 부티 나는 외모는 아니지
만 가정생활은 평범함 속에서도 행복을 누립니다 명절이 다가오니 여기
저기서 쉴 새 없이 터지는 전화벨소리와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자식들
의 목소리 “엄마 건강하신지요, 명절이라 바쁘시겠어요, 대충하세요, 요번
명절에는 무엇을 드릴까요, 선물을 드릴까요? 현금을 드릴까요?”하는 황
홀한 말에 비록 한 가정을 홀로 꾸려가는 가장으로서 그 어떤 부귀영화를
가진 사람보다도 내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꼭 십 년 전 어려운 살림을 유지하며 살던 중, 슬하의 자녀 중 1남 2녀
를 3월에 대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5월 중순경에 남편은 떠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출근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처구니없어 할 말을 잃
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땅을 치고 통곡을 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
까?
맑은 하늘은 먹구름으로 드리우고 모든 게 깜깜한 밤으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지가 개벽한 격으로 모든 생활이 어둔 밤 속에 묻힌지
라 동에서 뜨는 해를 보기조차 힘든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홀로 모든 걸 걸머지고 어느 길을 택하느냐의 아주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할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상사에 손을 놓고 떠난 남편
의 억울한 뒤를 밝히느냐, 아니면 대학 입학생 3남매의 교육을 우선으로
하느냐가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세상을 못다 살은 남편이지만, 떠난 사람보다는 아이들 교육이 더 큰 무
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그 누구의 힘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고 세상은 냉정
하기만 했습니다 모든 생활에 있어 행복하기만 했던 가정의 즐거움도 모
두 다 세월 속에 묻어버리고 크게 떴던 눈도 옆, 뒤 보이지 않게 지긋이
뜨고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 뒷바라지라는 한길만 파고 열심히 생활에 전
념했습니다 빈손으로 내 육체에 힘을 실어 내 몸이 교육비, 즉 돈이다 하
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1인 3역으로 뛰며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 아이들
의 대학졸업을 무사히 시켰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십 년 전의 흔적을 아직도 고스
란히 간직한 채 한 결 같이 사용하던 이부자리를 펴 놓고 ‘나는 해냈어요.
이 세상 모두 다 이겼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펴 놓은 이부자리에 온 몸
을 누이고 마음껏 뒹굴어 보았습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그리움이 넘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아쉬운 옛정과 기억 속에 파묻혀 자신도 모르
게 베개를 끌어 않고 남편의 품안인양 원망과 고생했던 일을 읊어주며 통
곡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아온 지 모르실거야. 그 동안 살
아온 뒤를 돌아다보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보이지 않게 흘린 눈물은
바다를 메우기에도 모자랄 것이에요 이제는 다 해냈습니다 당신의 몫까
지.'
남편은 억울한 죽음이라는 슬픔을 남기고 떠났지만 조상의 대를 잇고
돌봐 줄 수 있는 핏줄의 뿌리는 잘 자라나서 의사라는 사회적 위치에 선
자식 등 아이들이 제각기 자랑스럽게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슬픔이 역전이 되어 행복의 햇살로 다시 찾아온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외로워하지 않고 자식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값지게 남은
인생 살렵니다 가족의 행복을 깨뜨린 당신은 모든 것 다 잊고 지금은 편
안한 잠을 이루고 있겠지요 이제 곧 당신 곁으로 가야할 추석명절이 돌
아왔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어 아들 딸 사위들과
함께 같이 갈 거예요 그때 가서 잔 올리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받
아야 할 그 몫까지 제가 다 함께 받을 겁니다.
그 동안 사느라 힘들고 슬펐지만 지금은 그것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아쉬움 없이 자식들의 사랑에 푹 빠져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십 년 만에 행복으로 찾아온 추석명절 비가 오면 개는 날도 있구나 하
는 지극한 평온함에 즐거움이 덧대어져 명절준비 과정에 올해는 흥이 절
로 돕니다. 오늘따라 소국(小菊)의 꽃대가 더욱 튼실하게 보입니다.
2005/22집
첫댓글 나는 이제 외로워하지 않고 자식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값지게 남은
인생 살렵니다 가족의 행복을 깨뜨린 당신은 모든 것 다 잊고 지금은 편
안한 잠을 이루고 있겠지요 이제 곧 당신 곁으로 가야할 추석명절이 돌
아왔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어 아들 딸 사위들과
함께 같이 갈 거예요 그때 가서 잔 올리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받
아야 할 그 몫까지 제가 다 함께 받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