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를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v
사람을 묻은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 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v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 2015 -
사진 〈Bing Image〉
사 고
박 소 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어쩌다 가방을 보게 된 건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가방일 뿐이니, 말하는 가방을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점차 무거워진 가방을
무엇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돌아누운 이의 뒷모습처럼묵묵한,
자세히 보면 신음도 없이 들썩이는 어깨가 먹먹한
정말 필요한 건 가방 속에 없다오
눈을 감는 가방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언젠가 가방을 끌어안고 달린 적이 있었다고
숨이, 아니 끈이 끊어질 듯 위태롭던 어느 밤의 가방을
가방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오
가방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 하나의 가방을
어디로 떠날 참인가요?
물어도 대답이 없는 가방을
어느 틈엔가 나타나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다
황급히 문을 여는 사람은
어떤 무게로 인해 잠시 휘청거리고,
나는 보았다가서는 다시 오지 않을 가방을
-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 2015 -
사진 〈Bing Image〉
김밥천국
박 소 란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 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