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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창의성 콤플렉스’와 동양인 창의성 편견을 넘어]
## 한국인은 정말 창의성이 떨어지나?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을 이야기할 때나 국가의 미래를 말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새 교육정책이 나와도 창의성을 말하고, 기업이 인재상을 내세울 때도 창의성을 앞세운다. 어느새 이 말은 거의 상식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정말 부족한 것은 창의성 그 자체일까, 아니면 창의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일까.
이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논쟁이 있다. 1994년에 나온 *The Bell Curve*이다. 이 책은 인간의 능력이 상당 부분 타고난 것이며 집단 간에도 차이가 있다는 식의 주장으로 큰 논란을 불렀다. 미국에서는 주로 흑인과 백인의 능력 차이를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동양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평가되었다. 성실하고 공부는 잘하지만 창의성은 약하다는 식의 판단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비교적 점잖은 평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집요한 편견이다. 지적 성취는 인정하되 진정한 새로움의 능력은 제한된다고 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이런 시각은 더욱 널리 퍼졌다.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 들어가고, 미국이 이른바 ‘신경제’의 자신감 속에서 혁신의 중심임을 과시하던 시기와도 겹친다. 그 무렵부터 ‘동양은 모방과 축적에는 강하지만 창조에는 약하다’는 통념이 거의 상식처럼 유통되었다. 문제는 이런 시선이 바깥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은 그것을 점차 진지한 자기진단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외환위기 이후 사회적 콤플렉스가 된 창의성 열위론
외환위기 이후 특히 그랬다. 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겪은 뒤 한국은 스스로의 약점을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되짚기 시작했다. 교육은 왜 이렇게 획일적인가, 조직은 왜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가, 왜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이 자라기 어려운가 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런 성찰 자체는 필요했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과 조직문화가 정답 찾기, 빠른 적응, 위계적 순응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측면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구조에 대한 비판은 사람에 대한 본질 규정으로 미끄러졌다. 제도의 문제를 민족적 성격의 문제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창의성 부족’은 분석 개념이라기보다 일종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외환위기 이후의 교육정책은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준다. 거의 예외 없이 창의성을 핵심 목표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5·31 교육개혁은 획일적인 교육을 넘어 다양화와 자율화를 강조했고, 7차 교육과정은 선택 중심 교육과 수준별 학습을 통해 자기주도성과 창의성을 키우겠다고 했다. 이후에도 방과후학교, 교육복지 투자 우선지역 지원, 창의적 체험활동 같은 정책이 뒤를 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창의성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왔다는 증거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창의성 부족이라는 진단이 정책 언어 속에서 과잉 반복되어 온 측면 역시 보여 준다. 창의성을 반복해 말해야 했다는 사실이 곧 비창의성의 증거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교육이 결코 전체적으로 무너진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간층과 상위층의 학업 성취는 매우 두텁고, 기초 학력의 보편적 수준도 높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최상위 소수 인재의 두께가 생각보다 얇다는 데 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나 성인 문해·수리력 조사에서도 이런 분포상의 문제가 반복해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한국 교육의 과제는 평균을 끌어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소수의 최상위 인재를 더 안정적으로 길러내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이 문제는 평준화의 기조를 흔들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평준화의 기본 성과 위에서, 특성화 교육과 심화 교육을 조심스럽게 보완하자는 뜻이다. 모두를 위한 기본 교육은 유지하되, 소수의 국가대표급 인재를 길러내는 장치는 별도로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교육의 형평성과 경쟁력을 함께 살리는 길이다. 교육 체제의 과제는 ‘평균을 낮추지 않으면서 꼭대기를 두껍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 골목의 창의성
1990년대 후반, 서울에서 열린 KDI-UNESCO 공동 주관 HRD 국제회의에서 이 문제를 비교적 정면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한국 교육의 강점과 약점을 설명하면서, 한국 학생들은 표준적인 학업능력은 뛰어나지만 창의성과 자발적 학습동기 같은 비표준적 능력에서는 약점을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익숙한 진단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도 대체로 수긍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반응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몇몇 외국 참가자들은 그 판단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캐나다에서 온 한 친구의 반응이었다. 그는 오히려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자신이 머물던 숙소 근처 전통시장에서 자전거 뒷칸에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짐을 산처럼 쌓아 올린 채 좁은 골목을 누비며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런 장면은 캐나다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단순히 힘이나 요령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한된 공간과 도구, 복잡한 동선과 시간 압박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해법을 만들어 내는 생활의 지혜, 곧 매우 현실적인 형태의 창의성이었다.
이 일화는 창의성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창의성은 흔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돌출적 천재성’으로 이해된다. 물론 그런 창의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더 자주 작동하는 창의성은 기존의 것을 새롭게 엮고, 제약 속에서 문제를 풀고, 남이 만든 틀을 자기 현실에 맞게 바꾸어 쓰는 능력에 가깝다. 적응, 응용, 압축, 재구성, 실행의 능력 역시 엄연한 창의성이다. 한국과 동양 사회가 보여 준 강점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런 종류의 창의성에 속한다.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Michio Morishima)는 창의성을 기존 아이디어의 재조립과 변용을 통한 성공적인 문제풀이 능력으로 본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양적 가치관과 창의적 생산성의 관계 역시 단순하지 않다. 비교문화 연구들은 개인주의 문화가 평균적으로 더 높은 창의성 점수를 보인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양적 가치관은 창의성의 내용을 바꾸고 그 발현 방식을 달리한다고 지적한다. 독창성의 돌출보다 응용과 재구성, 개인의 파격보다 집단적 실행과 관계적 신뢰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어떤 환경에서는 창의적 생산성의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동양은 창의성이 낮다’가 아니라, 무엇을 창의성으로 보고 어떤 종류의 성취를 더 높이 평가하느냐에 있다.
## 제도가 창의성을 만든다
이 대목에서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논의는 뜻밖에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올슨은 사회의 성과를 개인의 고정된 성격보다 제도와 유인구조, 집단행동의 조건으로 설명하려 했다.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함께 움직이지 않으며, 어떤 행동이 보상받고 어떤 행동이 불이익을 받는지가 실제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을 창의성 문제에 가져오면 중요한 점이 드러난다. 새로운 생각을 내도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의 비용은 지나치게 크고, 기존 질서를 거스르면 불이익을 받는 사회라면 창의성이 약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제도의 문제일 수 있다.
올슨은 또 사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이익집단과 경직된 규칙들에 묶여 활력을 잃을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진입은 어려워지고, 새 아이디어는 쉽게 채택되지 않으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이 더 강해진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산성도, 창의성도 쉽게 위축된다. 다시 말해 창의성의 부족은 창의적인 인간이 없어서라기보다, 창의성을 보상하지 않는 구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인은 원래 비창의적이다”라는 식의 단정을 상당 부분 무력화한다.
주커만(Harriet Zuckerman)의 연구도 다른 방향에서 같은 점을 시사한다. 노벨상 수상자 연구로 잘 알려진 그는 뛰어난 창의적 성취가 단번의 영감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축적, 연구 환경, 동료 집단, 인정 체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누가 더 창의적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떤 환경이 더 높은 수준의 창의적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가를 묻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뜻이다. 창의성을 민족적 기질이나 고정된 성격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여기서 설 자리를 잃는다.
이 경우 정책적 대응도 조금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해외 교포 사회와의 인적 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세계 수준의 연구와 산업 현장에 이미 진출해 있는 한국계 인재들과의 네트워크를 교육과 연구에 연결하는 방안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학교 안에서는 평준화의 기본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소수의 국가대표급 인재를 체계적으로 키우는 장치를 더 정교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단계에서는 최고 수준의 인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구와 기업의 자율성, 보상체계, 실패의 비용 구조를 손질해야 한다. 다만 이런 대응은 평균 중심 교육의 성과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매우 신중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바닥을 넓게 받치지 못하는 엘리트 교육은 오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 편견을 넘어서
최근의 현실은 오래된 편견이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반도체, 인공지능, 생명과학, 문화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과 동양계 인재들은 이미 세계적 성과를 내고 있다. 엔비디아(NVIDIA)의 젠슨 황(Jensen Huang), TSMC의 모리스 창(Morris Chang) 같은 인물은 동양계가 첨단산업의 최전선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만 보더라도 메모리 반도체의 성장 과정에는 황창규, 진대제 같은 세계적 수준의 인재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 뒤를 잇는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글로벌 경쟁의 현장을 이끌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동양인은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오래된 말은 점점 설명력을 잃는다.
여기에는 더 큰 변화도 함께 작동하고 있다. 한때 동양을 근면하지만 독창성은 약한 세계로 그려 온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이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물론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성취가 쌓일수록, 그리고 창의성의 의미 자체가 더 넓게 이해될수록, 그 편견은 유지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한국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라질 필요가 있다. 없는 것을 억지로 꾸며 내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능력을 더 정확하게 읽자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한국인이 창의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창의성이 보이고 어떤 창의성이 가려지는가이다. 창의성은 몇몇 천재의 전유물도 아니고, 서구적 개인주의만의 산물도 아니다. 창의성은 주어진 조건을 새롭게 배열하는 힘이고, 제약 속에서 해법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며, 익숙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결합해 현실에 정착시키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결코 창의성이 없는 사회가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창의성을 제대로 읽는 언어를 갖지 못했고, 그것을 보상하는 제도를 충분히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창의성 콤플렉스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은, 우리 안에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어 내자는 뜻이 아니다. 이미 있는 힘을 더 정확히 보고, 그것이 더 크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뜻이다.
20260801 From 우천식
[요약본] 컬럼용
# 한국의 창의성 콤플렉스의 허와 실
한국에서 창의성 교육은 새로운 과제가 아니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창의성은 교육개혁의 핵심 의제로 제기되었고, 이후에도 미래인재 담론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어 왔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문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왜 그것이 충분히 구현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진단은 아직도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한국 사회가 너무 쉽게 스스로를 “비창의적”이라고 규정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통념은 정확한 진단이라기보다 오래된 편견의 반복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한국인의 비창의성 통념은, 소위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정체되고 비합리적이며 뒤처진 존재로 일반화해 온 인식틀을 뜻하며,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그 권력적 성격과 편향성이 널리 비판받아 왔다. 다만 이 개념 역시 동양 사회 내부의 차이와 변화 가능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를 본질적으로 덜 창의적인 집단으로 보는 통념이 이런 낡은 시선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아 형성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현장과 일상에서 관찰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 통념과 다르다. 생활세계와 실무의 차원에서 한국인들은 높은 적응력과 문제 해결 능력, 실행 중심의 실용적 창의성을 꾸준히 보여 왔다.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가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약점은 창의성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상층부, 곧 최고 수준의 연구와 과학기술, 문화 창작, 세계적 인재 경쟁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한국의 문제는 전면적 무창의성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역량을 탑티어 수준의 혁신으로 끌어올리는 제도적 사다리가 약하다는 데 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창의성 교육의 문제를 두 갈래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학교 안에서의 교육 문제다. 다른 하나는 학교 밖에서 최고 수준의 인재와 역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키울 것인가의 문제다. 전자에서는 반복학습과 정답 찾기 중심의 수업,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평가, 질문과 탐구를 충분히 장려하지 못하는 문화가 병목으로 작용해 왔다. 후자에서는 세계적 인재가 들어와 정착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개방적 제도와 환경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못했다. 결국 창의성 교육의 미래는 수업방식만이 아니라 인재 생태계 전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과거 정부가 시도했던 해외 우수 인재 유치 정책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2013년과 2014년 무렵 정부는 창조경제 인재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우수 인재 유치 전략을 비교적 본격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세계 수준의 과학자와 연구자, 기술 인력을 국내에 유치하고, 이를 통해 대학과 연구기관의 역량을 높이며 새로운 혁신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는 국내에서만 천천히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는 속도와 규모 모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문제의식 자체는 옳았다. 한국의 약점이 생활세계의 창의성 부족이 아니라, 탑티어 창의성이 집적되고 증폭되는 상층 생태계의 취약성에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짚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끝내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행정 미비나 예산 부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해외 탑티어 인재를 본격적으로 유치한다는 것은 단지 비자를 늘리고 연구비를 조금 더 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학 인사, 연구비 배분, 조직 위계, 언어 환경, 보직 구조, 기존 네트워크와 같은 내부 질서를 건드리는 일이다. 외부의 최고급 인재가 들어오는 순간, 기존 구성원에게는 자원과 기회의 재조정이 발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항이 생긴다. 과거 실패의 핵심적인 정치·경제학적 함의는 여기에 있다.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정치적 연합과 제도적 수용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목은 지금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당시에는 해외 우수 인재 유치가 창조경제의 한 요소로 제시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국가의 산업전략과 직결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양자기술 같은 첨단 분야에서는 메가 투자와 산업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력 전략은 부수적 과제가 아니라 핵심 인프라가 된다.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산업전략이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 수준의 인재가 들어와 연구하고, 가르치고, 연결하고, 정착할 수 있는 구조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의 반복이 아니라 제도 전환이다. 과거의 실패를 감추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전략이 무산되었는지에서 배워야 한다. 인재 유치를 단순한 초빙사업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비자, 세제, 주거, 가족 동반, 연구 자율성, 영어 행정, 성과 보상, 장기 정주 같은 요소를 포괄하는 패키지 전략으로 가야 한다. 또한 교육부, 산업부, 과기정통부, 법무부, 지방정부, 대학이 제각기 움직이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통합된 조정 메커니즘과 데이터 기반 인재정책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 제도 전환은 특히 지방화 전략과 결합할 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최근 지역대학 육성과 글로컬대학 정책은 지방대학을 지역 혁신의 거점으로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지역대학이 진정한 혁신 거점이 되려면 단지 재정을 지원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외부의 우수 연구자와 교육자, 실무 전문가를 받아들이고, 이를 지역 산업 및 국제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글로벌 인재 유치는 수도권 몇몇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대학 개혁의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지역대학이 세계적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채용이 아니라 지역의 리더십과 혁신 역량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결국 한국형 창의성 교육의 미래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한국 사회 전체를 비창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생활세계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실용적 창의성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수준의 창의성이 집적되고 증폭되는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따라서 정책의 초점은 모든 사람을 막연히 더 창의적으로 만들자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존재하는 역량을 더 높은 차원의 혁신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그 사다리는 학교 안에서는 질문과 탐구, 프로젝트와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놓여야 한다. 동시에 학교 밖에서는 산업전략과 인재전략, 대학개혁과 지역혁신, 국내 양성과 해외 유치를 연결하는 국가적 제도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 1990년대 말부터 반복되어 온 창의성 교육 담론이 이제 정말 달라져야 한다면, 그 변화는 선언의 문구가 아니라 제도의 구조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창의성은 말로 장려될 때가 아니라, 실험이 보호되고 실패가 축적되며, 세계의 최고 인재가 들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란다. 한국형 창의성 교육이 나아가야 할 거시적 방향은 바로 그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