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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에 9:11-19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아뢰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한 시행하겠노라 하니
13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15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7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19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더 9:12-19 / 그러자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유다인들이 이 수사 도성에서만 500명을 죽이고, 하만의 아들 열 명까지 모조리 죽였으니, 이 나라의 모든 지역과 마을에서는 어떠하였겠소? 이래도 그대에게 남은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내가 그대로 이루어 주겠소! 무슨 요구를 더 하더라도 즉각 이루어 주겠소!' 13) 에스더가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일을 옳게 여기신다면, 오늘 수사 도성에서 유다인들이 한 일과 같이 내일도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하만의 아들 열 명의 시체는 나무에 매달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도록 해주소서!' 14) 왕은 즉각 에스더의 소원대로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수사 도성에 효력이 하루 더 연장된다는 새 조서를 공고하였다. 그리고 하만의 아들들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매달도록 하였다. 15) 12월 14일, 바로 그 다음날이 되자, 수사 도성의 유다인들이 다시 집결하여 성중의 원수 300명을 더 찾아 죽였다. 그러나 그들이 원수들의 재산은 약탈하지 않았다. 16-17) 바사 제국의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도 12월 13일이 되자 모두 단합하여 자신의 목숨을 지켰고, 그들에게 대드는 원수들을 7만 5천 명이나 쳐죽였다. 이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안전과 평안을 지켰다. 그러나 이들도 원수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2월 14일이 되자 지방의 유다인들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제의 통쾌하고 황홀한 사건을 기념하며 하루동안 쉬고,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하였다. 18-19) 그래서 바사 제국의 지방에 사는 유다인들이 12월 14일을 경축일로 정해 놓고 잔치를 베풀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수사 도성의 유다인들은 이틀 동안 원수들을 처단하고, 그 다음날인 12월 15일에야 비로소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며 하루를 쉬었다.
본문은 유다 민족이 극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에스더서의 대단원입니다.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고하니(11-13) 국가의 중요한 일은 항상 실록에 기록되어야 했습니다(6:1). 따라서 유다인들에 의해 500명과, 하만의 열 아들도 살해되었다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즉각적으로 보고됐습니다. 왕은 자신이 보고 받은 것을 에스더에게 말하며 에스더의 다른 요구를 묻습니다. 에스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수산 성읍에 한하여 조서를 하루만 더 연장해 달라고 하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직도 수산성에는 대적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조서를 내리니(14-17) 왕은 에스더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교수대에 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행위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수치와 모욕을 가증시키는 관례였고, 또한 유다인 대적자들에 대한 경고의 표시였습니다. 유다인들은 13일에 죽이지 못한 300명을 그 다음 날 수산에서 죽였습니다. 이제 수산에 있는 모든 적들까지도 제거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산에는 끝까지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탐욕거리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달월 13일에 페르시아 전역에 있는 유다인들은 그들의 대적자 75,000명을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지방의 유다인들도 죽은 이의 재산에는 손대지 않았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원수를 이긴 유다인들은 14일에 쉬며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였습니다.
14일과 15일의 잔치들(18-19)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그들의 대적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아달월 13일과 14일 이틀의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15일에 그들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반면에 지방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아달월 13일 하루 동안에 그들의 적들을 죽였으므로 14일에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유다인들도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며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에게 선물을 나눠주어 상호연대를 증진하였습니다.
적용: 모든 유다인들은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고 그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당신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남자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는 뭔가를 포장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천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포장하고 계십니까?” “행복을 포장하고 있답니다.” 남자는 다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장지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나요?” “이 포장지는 고난입니다.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을 받을 수 없답니다.” 포장을 다 끝낸 후에 천사가 떠나려고 하자 남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천사님!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은 어떻게 하면 열 수가 있나요?” “고난이란 포장을 쉽게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포장은 스스로 벗겨지며 행복이란 선물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 설 교 >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에 9:11-19
구약성경에서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헤렘(~r,xe)”에 관한 것입니다. 헤렘은 일반적으로 “모두 없애버리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뜻은 “(하나님께)바쳐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진멸하라”라는 명령을 준 것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군과 싸워 이기라는 것과 그들로부터 얻게 된 전리품이나 땅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이 대적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느냐입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으로서 모두 “거룩한 전쟁(Divine War)”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이 패배하면 민족의 말살보다는 이긴 민족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쟁에서 지면 강제로 개종당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존 월튼(John Walton)이 말한 것처럼 “공동체의 헤렘은 특정 민족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라는 것이 사실로 보입니다.
예전에도 언급한 “헤렘”에 관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이유는 에스더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헤렘’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만과 그의 가족, 그리고 유다인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쟁은 아니었지만, 전쟁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헤렘의 명령이 주어지거나 헤렘을 실행하고자 하는 모습은 없지만, 헤렘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잘 읽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에게 약속한 언약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죠. 문제는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범죄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이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그곳에서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내길 원하셨습니다. 아마도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에스더를 통해 일어난 구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큰 기쁨과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아달월 13, 14일에는 유다인이 아니라 유다인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숫자는 수산 성에서만 총 800명이 넘었고(12, 15절) 수산성 밖의 사람들까지 합치면 75,000명이었습니다(16절). 페르시아는 인도로부터 구스(에디오피아)까지 127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즉, 한 지역당 대략 6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왜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정치적 관점으로 보면 하만의 죽음은 유다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었고, 그것은 결국 아하수에로의 권력에 도전할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내분의 불씨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즉, 왕비도 구하고, 자신의 대적도 없애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보게 된 것이죠.
유다인들은 대적들을 물리치면서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이해했을 수 있지만, 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대적들을 물리치면서 대적들의 가문 전체를 진멸하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인들은 지역에 따라 아달월 14일 혹은 15일을 명절로 삼아 축제를 즐겼습니다. 이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날은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런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아마도 “다윗의 노래”로 되어 있는 시편 124편으로 함께 기쁨을 나누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라는 노래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항상 불러야 할 노래이자 기도가 됩니다. 불안과 염려를 버리고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주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사는 것이 복이다
에스더 9:11-19 / 매일큐티
1.에스더는 왕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13~14절)
2.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어떻게 기념합니까?(17~19절)
3.에스더는 왜 하만의 열 아들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도록 왕에게 요청합니까?
4.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는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5.하나님의 백성인 내가 여전히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된 승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겠습니까?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다인의 생명을 구한 이야기에는 구체적인 날짜와 지명이 언급돼 있습니다. 아달월 13~14일, 장소는 바사 제국의 수도 수산과 각 지방이며, 죽임당한 원수들의 숫자도 명확하게 기록됩니다. 수산에서는 13일에 500명과 하만의 아들 10명이 죽었고, 14일에 추가로 300명과 수산 이외의 각 지방에서 75,000명이 죽었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열 아들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도록 왕에게 요청하는데, 죽은 자를 나무에 매다는 일은 최고의 수치였습니다(13~14절). 이처럼 본문은 왕이 내린 조서에 따라 원수들을 죽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의 끝은 패망임을 알려 줍니다. 이후 수산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14일,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15일에 자축하는 축제를 엽니다. 이는 부림절의 유래로,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를 누리는 날을 뜻합니다(17~1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기대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주권 통치 아래에 사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잊지 맙시다.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영생을 허락하신 주님의 승리를 삶에서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심판하시는 주님과 함께하기
에스더 9:11-19 / 밀알을 꿈꾸며
본문 기타 기능
왕이.. 조서를..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각 지방..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4-16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19
자칫 신앙을 오해하기 쉬운 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내 삶과 생명까지도 맡겨야 한다는 교훈으로 인해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인식되 되기 쉬우나 오늘 본문은 과하다 싶을 만큼 피흘리기까지의 적극적인 행위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이처럼 때때로 맡기는 신앙과 마치 자기방어를 위해 적의 생명까지 심판하는 행동에서 참다운 믿음이 무엇인지 헛갈려 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는 하만 뿐만 아니라 하만의 열 아들 모두 아버지 하만의 죄에 대한 심판과 동일하게 함께 나무에 달려 죽였다. 성경은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를 죽이지 않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과연 이들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단순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인함이 아닌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 명의 아들이 함께 죽일 수 밖에 없는 아들들에게도 심각한 죄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행한 유다인들의 행위가 과연 과격한 폭동이 아닌 믿음 안에서 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에 우리 안에 자리잡은 신앙적 편견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시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까지 오른 하만을 생각할 때 열 아들들의 나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어린 아이를 자녀라는 이유로 죽였다면 유다인은 앞서 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나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의 심각한 죄에 대해 침묵하여 동조했다면 아버지 하만의 죄와 동일한 죄를 묻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간청에서 시작된 유다인들의 도륙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님은 그것이 합당한 심판이라 여기심이 틀림없다. 사람의 인정으로 볼 때는 그렇께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다. 그러나 돌이켜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신 주님이 결국은 세상을 진리 가운데서 심판하신다는 성경의 기본 메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심판에 대해 감히 반론할 수 없다. 다만 주님의 심판이 두려울 뿐이다.
에스더서의 이러한 일련의 내용으로 몇 가지를 정리하면..
첫째, 하나님께서는 진리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 심판의 자리에 자기 백성, 곧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심판하신다. 자기 백성이 주님의 심판에 동참하게 하신다. 이는 마치 아들을 아버지의 일에 참여시키는 아버지와 같다.
둘째,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세상의 제도와 권력, 믿음과 상관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모두 도구가 된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
셋째, 그럼에도 유다인을 오랫동안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가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에 앞서 자기 백성에게 간절히 주님을 붙들어 기도하게 하심으로 초대하신 과정이며 동시에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도 오래 참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넷째, 성도의 고난은 주님의 (주권자의 심판)영광에 동참하기 위한 과정이다. 물론 모든 성도가 에스더서의 경우처럼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승리하거나 성공하지 못해 보일지라도 부활하신 예수와 같이 우리도 부활할 때 영원한 심판에 동참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
다섯째, 누군가의 죄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그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에 주님은 경고하신다. 성도는 의롭지 못한 것을 의롭지 못하다 이야기해야 하며 적어도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의로움을 구해야 한다. 나아가 주님께서 보이신 의로움을 행동해야 한다.
여섯째, 신앙은 단순히 믿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의 심판에 동참해야 할 때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일곱째, 성도의 믿음은 주님이 이루실 것을 잠잠히 묵상하고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나 믿음에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다. 마땅히 일어날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선포하고 또 행해야 한다.
여덟째, 신앙의 단편적 편견의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이를 위해 성경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4)
주님, 주님의 계획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인내하게 하시고 주님의 일하심이 보여질 때 과감하게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향해 외치게 하소서. 행동하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복수할 시간을 하루 더 줌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아뢰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한 시행하겠노라 하니13.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도성 수산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그 날로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항상 실록(6:1)에 기록되어야 했으므로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된 자의 숫자가 왕께 보고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러한 관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신의 조서가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그 결과 보고를 받을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에스더 왕후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도성 수산에서만도 그들의 원수를 오백 명이나 죽였고, 하만의 열 아들도 다 죽였소.” 에스더는 모르드개 혹은 그밖의 소식통에 의해서 12월 13일에 몇 명의 대적들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살해 됐는지를 보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왕은, 에스더가 모르는 것으로 간주한 채 자신이 부하들로부터 보고 받은 바를 에스더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의 에스더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왕은 “그러니 나머지 다른 지방에서야 오죽하였겠소?”라고 합니다. 수산에서 죽은 수효를 생각해 볼 때 전국적으로는 엄청난 숫자의 대적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사실(16절)을 암시하기 위한 감탄문입니다.
이제 당신의 남은 소청이 무엇이오? 내가 그대로 들어주리다. 당신의 요구가 또 무엇이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여 주겠소. 왕은 유대인에 의해서 살해된 대적의 숫자와 함께, 그 대적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세가 대단하였다는 보고도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태의 추이를 익히 알고 있었던 아하수에로 왕은 나머지 대적들을 소탕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다시 이같이 에스더에게 소청의 유무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은 에스더와 유대인들에 대해 은총을 허락하고 또 은혜를 내릴 것을 요청케 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즉흥적이고 허영심이 많은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수에로가 본절에서 처럼 반응한 것은 그의 성격과 마음을 여호와께서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만 좋으시다면,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이 내일도 오늘처럼 이 조서대로 시행하도록 하여 달라고 합니다. 하만의 조서(3:12, 14)나 모르드개의 조서는(8:11, 12) 모두 하루 동안만 유효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적 공격을 해왔던 모든 대적들을 그 하루 동안에 모두 진멸키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은 대적들이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유대인들에게 큰 해를 입힐 것이 뻔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그러한 것을 미리 예견하며 대적들의 완전한 진멸을 위해 왕에게 다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절대명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자신의 개인적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요청을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만의 열 아들의 주검은 장대에 매달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대적들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 시체를 훼손시키는 등의 일은 멋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같은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하더라도, 12월 13일 하루만에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달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이처럼 그 다음 날인 12월 14일에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달 수 있게끔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처럼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 닮으로써 유대인의 대적 아각 자손(3:1)인 하만 일가가 완전히 진멸됐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그밖의 대적 혹은 그들에게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삼상31:10)를 하고자하였습니다. 이처럼 나무에 다는 것은 히브리와 페르시아에 유행했던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신21:22 스6:11).
왕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수산에는 조서가 내렸고, 하만의 열 아들의 주검은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여기에서 왕이 내린 조서의 내용이 혹자의 주장처럼 유대인들에게 다음날도 싸울 수 있다는 것만을 허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하수에로는 다음날의 싸움과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 수 있게 한 조서를 동시에 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하만이 매어 달렸던 높은 나무(7:9, 10)에 일부 달렸고, 그 나머지도 그 옆에 새로 세웠을 나무에 나란히 달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나무에 다는 것은 그 시체에 대한 대단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한 사람에서까지도 심한 모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하였습니다.
(재산은 손대지 않고 목숨만 죽임)
“15.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수산의 유다 사람들은 아달월 십사일에 한 곳에 모여서, 수산에서만도 삼백 명을 죽였으나, 역시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300명을 죽인 행위는 왕이 내린 새로운 조서(14절)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의 삼백 인은 12월 13일에 미처죽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서 저자는 재산에는 손대지 않았다는 이와 같은 표현을 15절 뿐만 아니라 10절과 16절에도 기록하여 유대인들의 바른 행위와 그들의 살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왕이 다스리는 각 지방에 있는 나머지 유다 사람들도, 지방별로 함께 모여서 조직을 정비하고, 자체 방어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는 수산 이외의 지역 유대인이 왕의 조서를 어떻게 실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6절). 그들은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며 자위권을 발동하였습니다.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생명을 보호하여와 동일한 의미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어느 특정한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22절). 그들은 원수들을 무려 칠만 오천 명이나 죽였으나, 역시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수산 이외의 지역에서 살해된 대적의 숫자 칠만 오천 인은 수산에서 하루 동안 살해된 숫자 500명에 비하면 조금 많은 듯합니다.
(잔치를 베푼 14일과 15일)
“17.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수산성 외에서 복수한 것은 아달월 십삼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사일에는 쉬면서, 그 날을, 잔치를 하면서 기뻐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16절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정당한 행위가 언제 이뤄졌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수산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여 일을 벌였으므로, 십오일에는 쉬면서, 그 날을, 잔치를 하면서 기뻐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수산 지역의 유대인들은 왕의 특별한 조서에 따라 십 사 일에도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15절). 그러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은 십 삼 일 하루 동안에(8:12) 대적들을 진멸하였기 때문에, 그 다음날 14일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수산성 외에는 14일에 잔치함)
“19.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19절은 16, 17절의 결과로서 수산 이외의 지역 유대인들이 12월 14일을 경축일로 지키게 되었던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는 앞에 언급된 내용의 결론을 유도하는 접속사가 됩니다(창2:24 느6:6). 따라서 여기의 그러므로는 19절이 16, 17절의 결론에 해당됨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의 이 용어는 대체로 어떤 습관의 유래에 대해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성벽이 없는 여러 마을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정하고, 즐겁게 잔치를 벌이면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은 까닭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촌촌은 고을 고을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요새화되어 있지 않고 탁 트인 마을 혹은 도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촌촌과 고을 고을은 곧 요새화되어 있었던 수산과 대조되는 수산 이외의 다른 모든 지역들을 가리캅나다. 이처럼 수산 이외 지역의 유대인들이 명절을 십 사 일로 정한 것은, 그들이 그 전날에는 대적들과 싸우고 그 날에는 안식을 얻고 잔치를 베풀었었기(17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산에 사는 유대인들은 십 오 일에야 쉴 수 있었기(15, 18절) 때문에 명절이 다른 지역 유대인들과는 달리 십 오일이었습니다(21절).
여기의 명절은 문자적으로는 좋은 날이라는 뜻으로서, 그 날에 있었던 상서로운 역사적 사건을 계속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정한 기념일이었습니다(출 12:14). 이 날에는 모든 노동을 그치고 그 날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며 하루를 보냈습니다(8:17).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 등에 주로 행하는 선물 교환과 거의 흡사하게 예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상호 연대감을 증진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