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두환과 김일성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대부분 전두환을 10·26 / 12·12 사태로 권력을 거머쥔 자(者)로 평가한다. 또한 그를 5·18 광주 사태의 원흉으로 생각하여 민족의 역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는 언론사들이 만든 작품도 많다. 그들은 하나같이 ‘5·18 광주 학살자의 수괴는 바로 전두환이다!’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영화도 만들고 책도 만들었다. 오죽하면 5·18 묘역에 올라가는 계단에 ‘전두환’이라 새겨진 비석을 밟고 올라가도록 만들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하나, 둘씩 밝혀지는 영상이나 글을 보면, 5·18 사태는 고도로 훈련을 받은 북한 공작조와 유격대와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들이 합해서 만든 것이다’라는 설이 있다. 또 유튜브에서는 ‘5·18 광주 사태를 주도하다 사살된 북한 공작조의 영웅적 비석이 북한 여기저기에 있다’고 한다.
어느 정보기관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5·18 유공자들이 4,300명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는 광주 사람보다 외지 사람들이 더 많단다. 거기에는 이른바 ‘민주화 운동했다’는 사람들의 일가친척, 선후배, 고향 아는 사람, 사기 치다 붙들린 사람, 고위 공직자, 감옥 갔다 온 자들이었다. 참으로 웃기는 것은 당시에 13살 먹은 경상도 여학생이 5·18 유공자가 되어있고, 부산에서 민주화운동 하다가 머리가 깨진 사람이 갑자기 유공자로 둔갑한 예도 많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5·18 유공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그 연유를 말하고 정당한 대우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참으로 억울하게 상처 입은 광주시민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후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가짜들이 불법으로 나랏돈을 빨대로 수십 년간 빨아 왔다면 모두 토해내든지, 감옥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모든 언론매체는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이유는 5·18 유공자 명단에 수많은 고위 공직자, 국회위원, 정당인, 예술인,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감히 벌집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또 다른 평가도 있다. ‘전두환 시대야말로, 이승만, 박정희 대(代)를 이어 8년의 재임 시에는 경제가 부흥 활성화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에 하나도 막힘없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민의 소득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국방이 튼튼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말 그대로 <태평 시대>였다.’는 것이다. 물론 아웅산 테러로 내각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는 천행으로 살았다. 또한 전두환은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전두환은 석두(石頭)가 아니었다. 그는 육관 사관학교 시절 <하나회>를 만들었는데, 원래 그 모임은 전두환 집에서 모인 독서클럽이라고 한다. 그 후 정규 육사 생들이 서로 밀어주고, 댕겨준다는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를 아예 해체해버렸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10·26 / 12·12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권력을 잡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5·18 광주 사태로 그의 치적은 물거품이 되고 빛을 잃었다. 아직도 그의 유골이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자택에 있는 비운을 맞았고, 유골함마저도 봉황(鳳皇) 문장이 없으니 그는 참으로 불행한 대통령이다.
1984년 그해 여름으로 기억된다. 꼭 40년이 되었다. 당시 8월 말에 한강 본류와 지류(支流)에 상상할 수 없는 폭우가 쏟아져 서울, 경기의 모든 마을이 수몰된 적이 있었다. 역사적인 대 홍수였다.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집들은 모두 3층까지 침수되었고, 농장은 물속으로 들어가 검은 뻘로 변해 버렸다. 대한민국은 그 장마로 말 그대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바로 그때 북한의 <김일성>이 호기를 부리면서 우리나라에 ‘수해 원조를 하겠다’고 떠벌였다. 말하자면 ‘수해의연금과 구호물자를 줄 터이니 조선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보다 더 잘 산다’라는 것을 선전함으로써 김일성은 자신의 통 큰 정치로 남북한을 묶으려 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속으로 ‘전두환은 자신의 제안을 절대로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을 했고, 그러면서 9월 초까지 거들먹거리며 호기를 부리며, 인민의 위대한 어버이로 추앙을 받았다.
당시 언론이 전혀 모르고 있는 사건 하나가 있다. 김일성의 제안을 들은 전두환은 9월 초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 총장들을 모처에 비상소집했다. 전두환이 직접 회의 장소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당시 교육부 장관 이규호 박사의 인도하에 회의는 진행되었다. 서울대 총장 권이혁 박사는 말하기를 “김일성이 원조를 준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대통령이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총장들은 하나같이 <그냥 받아버립시다!>라고 문교부 장관에게 건의했고, 그 의견은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되었다. 서울권 총장들의 의견을 들은 전두환은 김일성에게 “귀화의 뜻을 겸허히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회신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난리가 나고 뒤집어 졌다. 자신의 허세로 남북한의 주도권을 가지려 했던 김일성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전두환의 승리였다. 김일성은 쌀을 구입 못해 중국에서 꾸어오고, 보내온 쌀, 시멘트나 의약품과 포목도 모두 허접했다.
전두환에게는 두둑한 배짱과 결정적일 때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지혜가 있었다. 그 후 남북한의 물꼬가 트였고, 남북의 평화 모드가 이루어져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다. 그때 그 모임에 참석했던 총장들은 지금 모두가 고인이 되었고, 필자만 이렇게 혼자 살아남아 있기에 이 일이 전임 대통령 전두환을 이해하는 약간의 도움이 될 듯해서 기록으로 남긴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