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
김여정
내 유년의 고향 언덕에 원두막이 하나 있었다.
참외밭 어귀에 세워진 한평 남짓한 원두막은 우리들의 공부방도 되고
놀이터도 되었다. 짙푸른 송림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수런거리는 나
무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던 산밑 비탈 밭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과 원두막으로 간다. 아버지
께서 먼저 오셔서 잘 익은 청참외와 개구리참외를 따다 놓으시고 잘 놀
다 숙제 해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시며 집으로 가신다. 내가 참외를 따
면 구별을 잘 못하여 설익은 것을 따서 맛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속이 붉으스레 잘 익은 참외를 창칼로 까서 통째로 하나씩 들고 코를
파묻고 먹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누구누구 콧등에
참외 나겠네 이마에도 나겠네, 놀려대며 마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예쁜 그릇에 얌전하게 담아놓고 우아하게 포크로 먹을 생각
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신이 나서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
람”을 합창하며 골짜기를 가득 흔들어 놓는다. 밭 뚝 뽕나무 상 가지
에는 보리매미 소리, 더운 바람 숨결에 껍질 벗은 수수매미의 교향곡이
쟁쟁하게 울리며 추억에 입력되었다.
산 속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 애잔한 풀벌레의 울음소리 이 자
연의 소리에 빛깔들이 보이는 듯 소리 그 자체가 절묘한 아름다움의
빛을 빚어 낼 것만 같았다. 꿈의 작은 궁전 원두막에 분위기가 고조되
어 가는 때쯤이다 갑자기 바람이 몰고 온 먹구름은 크르릉 쾅쾅!!'요
란한 소리와 함께 번개가 번득이며 원두막 안에도 비바람이 들이친다.
크게 놀랜 작은 동생은 치마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엄마야!”하며 소
리내어 운다. 우리 자매는 평소에는 티격태격 할 때도 많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이 부둥켜안고 한 마음이 되었다. 천진스런 동생
들을 다독이며 안심을 시킨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수목 사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구름을 몰고 저 멀리 사라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햇볕이 쨍하게
쪼이고, 소란한 매미소리는 드넓은 푸른 무대 위에서 연주가 펼쳐지고,
멀리서 가까이서 우주의 대 합주곡으로 메아리쳐 들려온다.
그 시절 우리 마을에는 특별한 문화공간이나 놀이터 같은 시설이 한곳
도 찾아볼수 없었다 여름 방학이면 깨끗하고 맑은 물에 피라미가 한
가하게 떠 노는 앞개울에서 미역감고 고기를 잡으려고 첨벙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고무신짝에 피라미 새끼와 미꾸라지 몇 마리를 잡
았다가 살려주는 재미가 솔솔 하였다. 오늘같이 무더운 날 그 시원했
던 시냇물과 풀 냄새 바람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던, 어린 날에 꿈이 묻
어나는 환상적인 원두막을 생각게 한다.
네 기둥은 나무로 세우고 이엉으로 초가집방식인 삿갓모양의 지붕을
한 원두막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올라 내리는 이층 다락집으로 되어있었
다. 바람이 잘 통하는 바람 골에 자리를 잡았다. 아래 바닥에는 농작
물을 임시 수장(收藏)하고 위에서는 참외 수박 등을 돌보기도 하며 휴
식하면서 기거하지만 밤의 잠자리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여름밤 무더
위를 피할 수 있는 시원한 장소이기도하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울
때면, 멀리 산기슭에 깜빡이는 개똥벌레를 보고 동생들과 나는 호랑이
불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놀래어 숨죽이고 있었다 차츰 원두막 부근
풀밭에 여기저기에서 사랑에 등을 깜빡이는 반딧불임을 이내 알게 되었
다 우리는 개똥벌레를 모아놓고 작은 벌레에서 파란빛을 발하는 반딧
불에 관심을 쏟고 신기하기만 했다.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나타나며
쏟아지는 별밤의 감동......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부르던 내
유년의 원두막 전경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이 그
리워지기 때문이리라.
내 나이 이 순을 넘어 바라보는 원두막은 유년의 당년치기 원두막 보
다 그 규모가 서너 배나 크고 튼튼한 기둥과 넓은 스렛트 지붕으로 장
기적인 안목에서 시설되었고 과수원인 경우 사방을 막아 임시창고로 쓰
기도 한다 그리고 지붕이 넓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내린다 해도 들이
치지 않도록 만들어 졌다. 예나 지금이나 목적은 여름철 농작물 도난
을 감시하기 위하여서다. 청주시에서 가까운 양촌 마을에 있는 어느
원두막은, 소나무 향이 솔솔 불어오는 산밑에 육각형의 오렌지색의 기
와 지붕을 머리에 이고, 뻥 돌려 알루미늄 사시로 유리문을 하여 투명
하게 만든 최신식 원두막이었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깜찍하고
예쁜 별장과도 같았다. 시대에 흐름을 따라 원두막이 이색적인 생활의
변화를 주는 다양도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유년의 원두막은,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지저귀
는 산새소리 매미 소리가 태초의 음률로 들려오고,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아슴아슴 어린 시절이 다가오기도 하고 내 고향의
전경이 나이 들면서 더욱 그리워진다. 그래서일까 이순의 나이로 이
억 만리 외국 땅에 살고있는 동생이 아직도 유년시절 그 원두막에서 치
마를 뒤집어쓰고 엄마를 부르며 울던 그때의 모습이 마음 한켠에 아련
히 남아 떠오른다.
2002/13집
첫댓글 내 유년의 원두막은,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지저귀
는 산새소리 매미 소리가 태초의 음률로 들려오고,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아슴아슴 어린 시절이 다가오기도 하고 내 고향의
전경이 나이 들면서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