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모습을 한 천재, 먼델을 추억하며
199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흔히 '유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먼델(Robert A. Mundell, 1932–2021)을 나는 세 번에 걸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 폐인, 청년, 그리고 인간. 그 세 번의 만남을 돌이켜 보는 것이 내게는 곧 그를 추억하는 방식이다.
폐인이 된 천재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로버트 먼델이라는 이름은 이미 낯설지 않았다. 국제거시경제학과 국제금융의 대가로 익히 소개받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겠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마주한 먼델은 그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자주 끊겼다. 칠판에 직선 하나를 긋는데도 손이 떨려 선이 구불구불하게 휘었다. 그 무렵 선배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옛날 천재 먼델은 다 죽고, 이제는 알코올에 빠진 먼델만 남았다." 실제로 그는 1970년대 중반 시카고대학교에서 컬럼비아로 옮긴 뒤 술에 깊이 빠져 있었고, 내가 처음 마주한 그는 지독한 알코올리즘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짊어진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첫 먼델은 '폐인 Mundell'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또렷했다. 손과 목소리는 떨렸지만, 학생을 바라보는 그의 눈만큼은 깊었다.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하는 열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다만 몸이 그 열의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무너지기 전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오직 선배와 동료들의 회고를 통해서만 전해 들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편집장을 지냈고, 개방경제 거시이론의 핵심 틀을 거의 새로 세운 사람이었다는 것. 서른넷의 나이에 그 학계 최고 학술지의 편집장을 맡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 캐나다 출신 동료 학자 해리 존슨(Harry Gordon Johnson, 1923–1977)과 함께 술과 학문을 나누던 '천재이자 술꾼' 버디였다는 것. 존슨이 세상을 떠난 뒤 먼델의 음주는 더 깊어졌다고도 전해졌다. 20년 넘게 쌓아 올린 학문적 성취 뒤에 찾아온 크나큰 공허감이, 그를 술로 이끌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발레리와의 부활
먼델의 부활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돌았다. 내가 들은 버전의 중심에는 그리스 대사의 딸이자 시인인 발레리 낫시오스-먼델(Valerie Natsios-Mundell)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서, 발레리는 먼델에게 술을 완전히 끊으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허락할 때만 마시겠다고 약속하면 결혼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큰 지성인이자 학자로서의 먼델의 자질을 한눈에 꿰뚫어 본 발레리는, '사랑과 자존에 의해 통제된 음주'라는 현실적이면서도 다정한 처방으로 그의 재기를 이끌었다.
내가 그 부활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1991년, 클렘슨대(Clemson University)에 있다가 세미나 때문에 다시 뉴욕에 올라왔을 때였다. 컬럼비아의 세미나실에 들어서니, 1982년에 보았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표정은 또렷했다. 그는 칠판에 수평선을 곧게 긋고 이어 수직선을 그린 뒤 학생들에게 물었다. "Do you know what this is?"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This is the world."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폐인처럼 보였던 사람이, 다시 청년의 얼굴로 세계를 칠판 위에 그려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날의 먼델은 내게 말 그대로 '청년 Mundell'이었다.
논문 심사와 한인타운의 저녁
나와 먼델의 인연은 거기서 끝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 박사논문 디펜스가 그 인연을 다시 이어 주었다. 내 지도교수 로널드 핀리(Ronald Findlay)는 먼델과 가까운 사이였고, 그 인연으로 먼델이 내 박사논문 심사위원회 의장을 맡게 되었다. 심사석의 그는 놀라울 만큼 다정하고 우호적이었으며 질문도 유난히 많았다. 훗날 핀리는 먼델이 그 논문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전해 주었다. 알고 보니 먼델의 MIT 박사논문 주제 역시 장기 국제 자본 이동이었고, 내 논문은 이타적 유산 동기를 접목한 같은 문제였다. 오래전 자신이 씨름했던 문제를 새로운 세대가 다시 풀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내 논문은 우수논문상(with distinction)을 받았다. 오랫동안 힘겹게 붙들었던 작업이, 먼델이라는 큰 학자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디펜스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에 대한 감사의 자리에 먼델과 발레리를 함께 초대했다. 장소는 맨해튼 34가 근처의 한국식당이었다. 먼델 부부는 한식을 아주 잘 먹었고, 그는 식사 내내 한국에 대한 애정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여럿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그는 종이에 좌석 배치를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직접 적어 나눠 주었다. 큰 이론을 만든 대가가 초면인 사람들의 이름까지 챙겨 적어 주는 모습은 뜻밖이었고, 그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배려하는 성격이 인상 깊었다. 그날 그는 명함도 두 종류를 건넸는데, 하나는 컬럼비아대 교수 직함이 적힌 공식 명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가풍의 개인용 명함이었다. 학자의 얼굴과 예술가의 얼굴을 함께 지니고 다니는, 뜻밖에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 뒤로도 104가 부근의 한 스패니시 레스토랑에서 몇 차례 더 식사를 함께했다. 어느 날 와인이 몇 잔 돈 자리에서, 그는 문득 냅킨을 집어 들어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로 매트릭스 하나를 휘갈겨 쓰고는 내게 건넸다. "derive the global stability condition of this matrix." 나는 그 자리에서도,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틈이 날 때마다 그 냅킨을 펼쳐 보았지만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그 냅킨조차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숙제만은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내게 그것은 단순한 계산 문제가 아니라, 먼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한 장의 상징이었다.
아기천사의 모습을 한 천재
먼델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처음 본 그는 폐인이었고, 다시 본 그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까이에서 만난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한국 식당의 정취를 즐기며, 세계 경제보다 예술과 삶의 이야기를 훨씬 더 자연스럽게 꺼내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묘한 순수함이 있었다. 아기천사 같은 장난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거대한 이론을 세운 사람인데도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함이 있었다. 그의 눈은 하늘색이었는데, 신비할 만큼 맑고 투명해서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그 호수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내게 먼델은 단지 국제거시경제학의 거장이 아니라, 세상에 잠시 내려온 천사의 모습을 한 천재였다. 한때 무너졌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 자기 몫의 세계를 칠판 위에 그려 보인 사람. 그래서 나는 그를 오래, 그리고 다정하게 기억하게 된다.
2026.7.26 접수 From 우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