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화 선생 고택
항일시인 이상화 선생이 1939년부터 1943년에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상화는 건강악화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품활동을 했지만 상화의 시가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한 일제 순사가 상화의 원고를 모두 압수해 갔다. 그런 이유로 상화는 생전에 시집 하나 발간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인으로 남게 되었다. 1943년 상화는 빼앗긴 들에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최근 개발로 허물어질 뻔했지만 시민들의 도움으로 철거를 면하고 상화와 그의 문학을 기념하는 장소로 남게 되었다. 고택 안에는 상화의 작품세계와 생애가 정리되어 있어 상화와 상화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상화선생은 떠났지만 그의 시와 함께 고택 곳곳에 선생의 흔적과 역사가 남아있다.
◆ 서상돈 선생 고택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꿈꿨던 민족 운동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 구한말 시대의 장사꾼으로, 청렴한 선비로, 교육가로 산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1850년 김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17살 때부터 보부상을 하기 시작해 큰 돈을 벌었고 대지주가 되었다. 선생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부를 많이 썼다고 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고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선생은 구한말부터 63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민족을 생각하며 민족을 위해 일했던 민족운동가였다. 서상돈 고택은 이상화 고택과 마찬가지로 초고층 건물이 건설될 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민들의 서명운동과 후원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1899년 로베르 신부에 의해 한옥으로 처음 지어졌지만 1901년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1902년에 프와넬 신부에 의해 다시 설계되어 지금의 건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설계와 100여 년의 긴 전통 때문에 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딕 양식의 우뚝 솟은 쌍탑이 특징인 계산성당은 고풍스러운 내부와 건축물의 아름다움 덕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인사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성당 내부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순교했던 우리나라 성인을 의미한다. 계산성당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대구 가톨릭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1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왔다.
◇ 청라언덕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지난 100여 년간 지역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 온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놀랄만한 변화의 과정이 이곳에 녹아 있다. 특히 청라언덕은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불러보았을 ‘동무생각’의 노랫말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대구가 낳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의 로맨스를 담은 노래 ‘동무생각’은 시인 이은상 선생이 박태준 선생의 연애사를 듣고 쓴 시(詩)에 다시 곡을 붙인 가곡이다. 노랫말에서처럼 바로 이곳이 푸른 담쟁이 넝쿨이 휘감고 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라고 한다.
◆ 화교협회(대구화교소학교)
종로에는 화교의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 화교는 근대에 들어 이곳 종로에서 포목업, 건축업, 요식업 등을 하며 경제적으로 정착했고 학교를 세우고 협회를 창설하며 이곳에 화교 사회를 만들었다. 원래 1929년에 지어진 대구 갑부 서병국의 저택을 화교협회에서 매입하여 현재까지 협회 건물로 쓰고 있고 부지 내에 화교 소학교도 들어서 있다. 현 화교협회 건물은 80년이 넘었지만 보존상태가 좋아 문화재적 가치가 크며 근대 건축물 등록문화재 제252호로 등록되어 있다.
◆ 정소아과 의원
1937년 민간 자본으로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주택으로 대구 갑부 서병직의 저택이었는데 1947년 정필수 원장이 매입해 정소아과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정소아과는 한국전쟁 전후의 대구를 담은 소설 ‘마당깊은 집’에도 등장할 정도로 대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병원이었다. 정소아과 건물은 변형이 거의 없어 일제강점기의 상류층 주거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근대 건축물이다. 집 내부에는 있는 곡선으로 처리한 담, 1층에 있는 일광실, 서양식 욕조 등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유층의 생활 모습과 그 시절 근대 건축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