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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Portrait of a Ghost Laura Lynn Leffers지음 Createspace 2010.12.ㅣ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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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나" 클레어(Claire McCormack)는 화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미혼 여성이다. 소설에는 나 외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끝 날때 까지 정체성을 좀처럼 들어내지 않는다. 거의가 베일에 쌓인 인물이거나, 이름만 등장할 뿐 대사 한 마디 들을 수 없는 인물도 있다.
나는 센 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오빠네 집에 다니러 갔다가 39번 부두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부두를 배경으로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와 아이를 지켜보며 즐거워 하는 남녀의 나들이 모습을 담았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앞에 두 남녀가 회전목마를 타던 아이를 데리고 다가와서 그림을 두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의 이름은 브라이트(Bright, Paul Junior)고 남자는 폴 (Paul Theron Camden), 여자는 카르멘 (Carmen Desolla)이다. 나는 카르멘의 'How are you doing?'의 'are'발음을 듣고는 그녀가 인디아나 중부 석회암지대 사람들의 사투리를 쓴다는 걸 알아차리고 틀림없는 후져(Hoosier, 주: 인디아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카르맨은 내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대학 학생 바에 드나들던 여학생이었고 아마 그녀도 날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카르맨과 폴은 내가 그린 <회전목마> 그림을 사겠다면서, 대신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줄 것을 제안 한다.
인디아나에 있는 자기네 집 스튜디오에 들어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숙식을 제공하며 4주 마다 보수를 지급한다는 조건이다. 처음에는 초상화는 그리지 않는다고 거절했지만 화가로서 사실상 첫 고객의 진지한 제의를 뿌리치지 못한다.
열리지 않는 문
나는 센 프란시스코에서 자동차를 달려 인디아나 브라이트의 집 현관 문을 두드린다.
문을 두드렸다. 그런 다음 기다렸다. 가다림, 그것은 내가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낡은 <포드 에스콧트>를 운전하고 인디아나로 돌아오는 여정을 다 기억해 낼만큼 긴 시간이었다.
난 신경과민이었다. 내 달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이 날 불안하게 만들던 시기였다.
나로서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내 첫 번째 고객이라는 사실에서, 내 첫 번째 고객에게 나의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은 숨겨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내 안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평소 자주 쓰지 않는 시골집 현관 문이 그렇듯이 문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 틈새가 빼꼼히 열렸다. 파란 눈 '하나'가 문 가장자리를 통해 날 내다 보는 모습이, 분명 나를 여호와 믿으라고 전도하러 온 여자로 생각 하는 듯했다.
나는, 최근에야 현실을 돌파하는 법을 비로소 체득한 것이지만, 그녀가 날 저울질 하기 전에 그녀의 의심을 날려버려야 했다.내가 턱을 약간 기울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마음 속으로 점검하면서, "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클레어'라고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여자가 문 틈새를 겨우 10인치 만큼 연 다음 내게 그녀의 나머지 한쪽 파란 눈까지 마저 보여주는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듯 "'클레어'요?" 라고 되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한 쪽 발로 현관 문 밑 귀퉁이를 버틴 체 더 이상은 열지 않았다.
내게 허용된 그 10인치 문 틈새로 핑크 빛 엑스라지 스웨터 차림의 꽤 큰 가슴이 보였는데 아마도 문이 활짝 열렸다면 스웨터에 "센 프란시스코"라고 쓴 고딕체 글씨를 한 눈에 읽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화가시군요!" 그녀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네"라며 그녀의 예상을 뛰어 넘어 보다 감격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이내 참나무로 된 현관 문이 열렸다. 여자는 자기는 로즈 캄덴(Rose Camden)이고 폴의 고모라고 했다.
나도 당당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 집 또한 아무나 들이지 않는 엄격함이랄까 금기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거실에 들어가 거실에 놓인 벨벳 커버를 씌운 <부르고뉴> 안락의자에 앉았다. 두개의 안락의자는 연두색 타일로 장식한 벽난로 측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안락의자는 거실 중간에 일종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로즈 고모는 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폴을 부르러 갔다.
브리짓트의 초상
다시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주인인 폴이 거실로 나와 인사를 나눴다.
"그래, 브라이트 엄마는 만나 보셨습니까?" 폴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선생님의 부인" "카르멘"
"아닙니다. 카르멘과 전 결혼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 여자 분이 아이 엄마가 아니시라는 말씀이세요?" 그는 벽난로 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바로 초상화의 여인이 브라이트 엄마라고 말했다.
브라이트 엄마, 그러니까 초상화 여인의 이름은 브리짓트, 오빠가 그린 작품이다. 그녀의 오빠에게 아이의 초상화도 부탁을 했었는데 그는 아이 초상화 그리기를 거절했다. 아직, '인격이랄까, 내면의 정신 같은 것을 그려 낼 수 없는 유아의 초상화는 그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브리짓트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의 초상화 작업을 맡기는 일에 전혀 간여한 사실이 없다. 가장 큰 의문점은-아이 초상화를 어떻게 그려 달라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로즈 고모의 안내로 집 구경을 한다.
스튜디오가 있는 별채는 화재로 집을 잃은 브리짓트의 친정 부모 <밥> 부부를 모시려고 축사로 썼던 농막을 개조한 집인데 밥 부부가 니카라과로 선교여행을 갔다가 산사태로 죽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개조한 뒤로도 그동안 아무도 거처한 적이 없다.
당밀 빛 현관 문이 달린 하얀 집으로 내가 자랐던 집이 연상되는 전형적인 중서부 농장의 빅토리아 풍 가옥을 개조한 집이다. 집 구경을 하면서 나는 여전히 안주인이 궁금해서 로즈 고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쯤 제가 캄덴 부인을 뵐 수 있을는지요?"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으셨나요? 브라이트 엄마는 죽었는데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길로, 말하자면요."
"브라이트 엄마도 니카라과에 갔었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저 더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센 프란시스코 여행에서 봤던 여자 카르멘은 낮 시간에만 브라이트를 돌보는 보모다. 브라이트는 이제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한 돌 박이다. 건축가 아빠인 폴, 살림을 꾸리는 고모할머니 로즈와 함께 산다.
스튜디오
그 숲 속 외딴 집 별채 2층에 내 스튜디오가 있다. 더 이상 완벽한 조건이 없을 정도로 나에게는 어쩌면 화가성공 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스튜디오는 누가 쓰든 괜찮아 보였다. 이젤도, 바닥에 물감 한 방울 떨어진 자국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내 것-나의 작업 개시를 위한 것- 이었다. 당분간은.
이 모든 공간은 날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모든 게 이 안에 갖춰져 있다. 이 초상화 작업은 내가 행운으로 들어서는 창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작업이야말로 내 일생의 꿈을 현실로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런 행운을 잡게 된 현실에 내심으로 행복해 하며 밝은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스러운 참화를 가져올 죽음의 현장에 들어서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들어서지 말았어야 할 곳에 들어섰다는 암시의 단초는 이렇다.
그것은 이미 그림 안에 담겨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만일 오직 보려고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림에서 다 볼 수 있었다.
예술가란 무엇보다 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난 단지 잘은 볼 수 있었지만 무엇을 봐야 할 것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난 그저 아름다운 정경을, 피상적인 균형감, 채색, 움직임 등을 느낀 대로 그렸을 뿐이다.
만일 내가 그 그림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았더라면 그 문이 그들의 완벽하고도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들어서는 문이 아니라는 것 쯤은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 뱀 이야기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어린왕자에서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뱀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뱀이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모자 그림으로 보지 않던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 모양으로 판단하고 마는 것처럼 "나" 클레어 또한 그 점을 독백처럼 되뇌이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핑크 색 모자
나는 이집에 들어 온 후 공포감에 휩 싸인다. 창문에 커튼을 새로 달아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한다거나 내가 가진 현관문 열쇠 말고 누군가가 다른 열쇠를 가졌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른 자물통을 사다 달기도 한다.
내가 로즈 고모의 안내로 집을 구경하고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간 날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행운을 잡았다는 생각으로 행복에 젖어 이리 저리 둘러 보다 잠시 균형을 잃었었다.
갑자기 균형을 잃었다. 난 무턱대고 손을 뻗어 뭔가를 잡으려 했는데 언뜻 벽면 외투걸이에 뭔가가 눈에 띠었다. 다행히 외투걸이에는 자수실로 짠 부드럽고 두꺼운 모자 하나가 걸려 있어서 내 얼굴이 벽에 부딪히는 충격을 막을 수 있었다.
난 외투걸이에서 모자를 집어서 손에 올려놓고 한 바퀴 빙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핑크 색에 챙이 둥그런 모자였는데 ,혼자 웃으면서 모자를 써보았더니 내머리에 맞춘 것처럼 잘 맞았다.
그때 카르멘이 스튜디오에 왔었다. 카르멘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 머리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씹듯이, 삼키듯이, 맛을 음미하는 듯이, 특별히 의미 있는 중대한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움직거렸다.
난 그제야 그녀가 왜 그런지를 알아차렸다, 모자였다. 팔을 들어 모자를 벗었다. 난 모자를 손에 든 채 모자가 그녀 것인지를 물었다.
"전 모자가 외투걸이에 걸려있기에 한 번 써 본 거랍니다. 마음이 상하시지나 않았나요?"라며 사과를 했다.
그녀는 마치 모자에 온통 이라도 득실거리는 것처럼 내게서 모자를 뺏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하루는 식료품을 사려고 피니 벤드(Piney Bend) 읍내에 나갔다. 어떤 여자 점원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녀가 반색을 하며 핑크색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내가 쓰고 나간 핑크색 모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핑크 색 모자는 흔치 않다면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푸른색 모자를 쓰고 그 모양도 다르다고 했다. 마침 어떤 여자가 급히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여자도 엷은 푸른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나 말고 아무도 붉은 색 모자를 쓴 사람이 없었다.
난 내 계산 차례를 기다리면서 수다스러운 그 점원에게 왜 사람들이 붉은색 모자를 안쓰는지를 물어 볼 생각이었다.
"그 여자는 "죽기 전해까지 매 홀수 날이면 모자 하나씩을 만들어야 했답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그 여자가 왜 핑크 색 모자를 더 만들지 않았는지 아시지 않겠어요?"라며 내게 묻지 않은 말을 해줬다.
"아마도 그 여자가 핑크 색을 좋아하지 않은 거 아니겠어요?" 라고 내가 한마디 던지자
"어머나 아니예요. 그 여자는 핑크 색은 물론 빨강 색도 좋아했답니다." 라고 말했다.
<마리>라는 이름표를 단 그 점원은 죽은 그녀가 내다 판 모자는 대부분 푸른 색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게 모자를 갤러리에서 샀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그 갤러리에 더 이상 붉은 색 모자가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 하지는 말라고 했다.
내가 쓰고 온 이 모자는 과연 누구 것이고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모자의 주인은 편집광이었을까? 아니면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개성의 표현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우연인 것일까?
남자친구 시퍼
나는 대학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남자 친구 시퍼(Sypper)가 있지만 지금은 헤어진 거나 마찬 가지다. 내 여자 친구 마리아(Marria)가 시퍼를 좋아하지만 시퍼는 그녀를 달갑지 않아 해서 그녀의 상처가 크다. 나와 마리아는 시퍼를 두고 다투는 것 같지만 그건 마리아의 일방적 생각일 뿐 난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는 법과대학에 다니지만 공부보다는 겉멋 부리기를 좋아한다. 그가 클럽에서 추는 불꽃 춤은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도 그의 불꽃 춤에 매료되어 그가 춤추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얼마 전 금요일 오후, 내가 마리아를 만나러 클럽에 갔을 때에도 그는 나를 금방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왔는데 새로 온 듯 한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난 여자의 직감이랄까 그녀가 시퍼의 새로운 여자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 전에 남자 친구 시퍼가 늦은 저녁시간에, 불쑥 스튜디오로 찾아 왔었다. 그가 내게 전화로 내 근황을 묻기에, 어떤 집 아이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어떻게 날 찾아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동차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면, 숲길로 왔다는 말인데 숲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울타리 문은 항상 잠겨 있었다. 그는 내게 괜한 시비를 했다. 그가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지 묻기에 그럴 수 없다면서 당장 돌아가 달라고 했다. 그는 억지로 나를 끌어안으며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 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돌아갔었다.
시퍼가 다녀 간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폴이었다. 폴은 핑크 빛 모자 하나를 내밀며 그 모자가 누구 것인지를 물었다. 난 벽에 모자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그 모자는 케비닛 안에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폴은 내게 케비닛에 그 모자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케비닛을 열어 보니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다면 이 모자가 당신 모자가 맞군요"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새벽녘에 들판에서모자를 발견했다고 했다. 마치 내가 숲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두었다는 듯이 앞으로는 브라이트를 위해 문을 항상 잠궈둬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시퍼의 짓일까? 누구일까?
폴은, 내가 숲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어 준 것으로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시퍼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으며 어떻게 찾아왔는지, 어떤 경로로 들어 왔는지는 내가 먼저 궁금한 사항이었다. 폴. 그가 지난 밤 시퍼의 은밀한 침입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로즈고모
로즈 고모는 둥근 얼굴에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이 섞인 친절한 타입의 초로에 접어든 여인이다. 지금까지 결혼한 적이 없고 조카 폴네 집 살림을 도맡아 한다. 음식 솜씨가 남다르게 좋은데다가 샐비어 잎을 잘라내 차를 만들고 텃밭을 가꾸는 게 취미다.
그녀는 내게 '젊을 적, 한 때 폴의 장인인 밥을 좋아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로즈 고모가 내민창 안에 만든 간이 온실 묘판에 심은 씨앗에서 새 생명이 움터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내민창 안에 납작한 상자들을 줄을 맞춰 붙박아 넣은 모판에다 흙을 채워 넣고 묘판에 심은 씨앗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안개 같은 따스한 공기로 숨을 쉬며 싹을 틔워 낼 것 같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즈 고모는 자연과 함께 자연에 묻혀 사는데 만족해 보였다. 식사 때마다 내게 맛있는 음식을 덜어주기도 하고 남은 음식을 싸주기도 하는 등 내게 남다른 배려를 해준다. 나는 어느새 그녀가 좋아졌고 그녀가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에 매료된다.
완만한 기복이 있는 구릉지대를 차를 몰고 내려 갈 때, 그곳에는 백합이며 작약 밭이 펼쳐 있었고 로즈 가든 안에 새롭게 드러난 대지위에 그녀가 심어놓은 양파와 마늘 그리고 샐비어 이파리를 베어낸 흔적이 선명한 들판에 부는 선들바람을 들이마셨다.
딜만 가(家) 사람들
딜만 가(家)는 브라이트의 외가다. 딜만 가는 인디아나에서 몇 대째 석회암 광산과 석조건축자재 사업을 해오고 있다. 잭(Jack), 버트(Bert), 밥(Bob) 세 형제가 '딜만 엔 선스(Dillman & Sons)'라는 회사를 세웠다.
잭은 광산을, 버트는 석재공장을 그리고 밥은 제도(製圖) 일을 맡았는데 밥 의 사고로 지금은 잭과 버트 두 형제가 경영 한다. 잭은 캐리(Carrie)와 지니(Jeannie) 두 딸을 두었는데 캐리는 변호사와 지니는 증권 중개인 과 결혼했다. 캐리는 <돌 베이비>라는 별명의 딸 앰버(Amber)를 두었고 지니는 아직 아이가 없다.
버트는 딸 매간(Megan) 하나를 두었다. 매간에게는 이혼한 남편 사이에 톱시(Topsie) 몹시(Mopsie) 플롭시(Plopsie)라 부르는 세 딸이 있다. 그녀와 세 딸은 이혼 후 작은 아버지 잭의 집에 들어가 산다.
딸들의 원래 이름은 테레사(Taletha) 멜리사(Melissa) 플로렌다(Florenda)이다. 딸들의 이름은 이혼한 남편 가족성경책 뒤에 기록된 가족들의 이름에서 따 왔다. 가족성경책 뒤에는 이름과 낳고 죽은 날자와 그들이 남긴 어록 같은 것들이 적혀있었다.
매간은 그 죽은 사람들의 어록이라는 것들이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혔다고 말했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는 짜증나는 친척들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며 특별한 신앙이 없는 그녀와 소위 믿음의 가정 사람들과의 갈등이 그녀가 이혼에 이르게 된 원인의 하나였음을 암시한다.
밥의 아들 로버트, 그는 회사 경영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삼촌들이 일을 거들어 달라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회사 일에 간여하기를 마다한다. 그는 오직 화가의 길을 걸을 생각으로 일체 연락도 주고받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브라이트는 딜만 가의 외손이지만 30년 만에 얻은 유일한 사내 아이다. 딜만 가 사람들은 브라이트를 가보처럼 애지중지하며 자주 보고 싶어 한다.폴은 브라이트가 공장에 가는 날 나도 같이 갔으면 해서 난 브라이트의 사진도 찍을 겸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
카르멘은 브리짓트가 생전에 브라이트를 공장에 데려가는 걸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브라이트가 공장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폴은 브라이트는 당연히 공장에 자주 데려갈 필요있다고 말한다. 폴이 그리 주장하는 것으로 봐서 폴도 내심 브라이트가 딜만 가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행이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카르멘은 아직도 화가 안 풀려서 혼자서 석회암광산 쪽으로 가버렸다. 회사 비서 프레드(Winifred), 잭과 버트 두 할아버지가 브라이트의 도착에 환호성을 내며 기뻐했다. 프레드가 브라이트에게 사탕을 듬뿍 줘서 환심을 사려했고 서로 브라이트를 안아보려고 쟁탈전을 벌였다.
나는 잭과 버트의 안내로 거대한 크레인이 원석을 옮기고, 돌을 깨고 자르고 조각하는 공장을 둘러보고 그 위용에 놀란다. 나는 작업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볼 생각을 한다.
브라이트의 초상화
나는 이제사 브라이트의 초상화 작업을 위한 구도를 잡았다.
숲을 배경으로 하고 시내에서 사온, 나무로 만든 목마 흔들의자 위에 브라이트가 서있다. 자세를 높이기 위해 목마와 함께 사온 발받침을 놓았다.
내가 폴에게 그 포즈를 그리는데 사용했던 이빨을 드러낸 채 쿠키 부스러기가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의 사진을 내보이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어 재꼈다.
나는 폴에게 초상화의 구도에 침을 흘리는 모습을 넣을 것까지는 없다는 것을 확신 시켜 주자 그가 동의의 뜻을 표했다.
폴은 초상화 구도에 만족해하고 브라이트는 목마 흔들의자에 푹 빠져서 장난감처럼 손에서 놓지 못한다. 폴은 그림에 대한 안목이 전문가 수준이다. 야외에서 그린 회전목마 그림이 실내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빛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지적을 했는데 나는 그때서야 그림이 잘못되었음을 알아 차릴 정도였다.
폴은 브라이트의 초상화 그림이 마무리 되어 갈 무렵 스튜디오에 와서 다시 한 번 그의 느낌을 말해 주었다.
"그림이 거의 다 됐군요. 그런데 왜 자줏빛이죠?"
"참회, 속죄 그리고 슬픔의 빛입니다. 비탄의 색이기도 하고 살을 베어 내는 아픔을 나타내는 색이지요" 그가 다소 의아해 했으므로 난 과장해야 했다.
"그렇군요. 클레어! 그런데 왜 자줏빛 발판이 그렇게 밝습니까? 왜 브라이트가 그 위에 서 있나요? 가슴을 치켜세우고, 얼굴 표정은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건 전체의 일부만 보시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은 저쪽에...비탄의"
"탄생과 죽음, 둘 다 삶의 한 부분이 아니겠어요?"
"마루 바닥은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군요."라며 그가 웃었다.
"정말로 사실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카르멘이라는 여자
난 왠일인지 카르맨이 싫다.
그건 그녀가 클럽에 드나들 때 내 남자 친구시퍼가 유난히 그녀의 몸매에 눈길을 주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센 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두고 그녀와 나 사이에 잠시 다툰 적이 있는데, 그 전말은 이렇다.
"햇빛을 가리고 계시네요" 내가 얼굴을 찌프리며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난 힐끗 그녀가 풍기는 인상을 훓어 보고는 겔러리와, 가게와, 간판들과 **Alcatraz(주:센 프란시스코 만의 섬: 연방교도소가 있었음) 선전물을 그려 넣어 원래 그려 놓았던 그녀의 반쪽을 지워버렸다. 그녀는 어두운 슬렉스에 검은 긴팔 셔츠와 구도상 반짝거리는 푸른색을 강조해 줄, 좀 우스운 모양의 챙이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스케치를 거의 마칠 무렵에 얼굴이 벌개진 여자가 내가 들릴 정도로 미묘한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림을 뒤죽박죽으로 망쳐놓을 작정이세요? 그녀가 날 제지하고 나섰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아까 그림이 마음에 들거든요? 라며 그녀가 항의조로 말했다.
"방금 고쳐 그린 부분을 다시 지워주세요."
난 참으려고 애를 섰다. 무엇보다 나도 인디아나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여보세요, 전 화가고요, 시키는대로 해드리는 요리사가 아니거든요?"
"당신도 비지니스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죠?"
그녀는 그녀의 숄더백을 벗어서 그녀 앞에 놓더니 백을 두들겼다.
"200불! 어때요?"
"200불이라고요?"
"전 오일 값이 그 이상 할 것으로 알지만 저도 고정수입이거든요. 도대체 얼마를 원하시죠?"
"200불?" 난 다시 한 번 되묻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간만요. 제가 당신이 초상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요. 아마 그리 될 수 있다면 제 제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겁니다."
내가 초상화 일을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는 남자에게 뛰어 가버렸다.
......
카르멘은 브라이트를 열심으로 보살핀다. 그녀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들판과 숲을 산책한다. 나는 아이의 포즈를 잡기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해 카르멘의 산책길을 함께 하기로 한다.
산책길을 오가며 카르멘에게서 이 집과 이 집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언제나 겉모습 뿐이다. 카르멘은 나와 산책을 하거나 광산을 거닐 때 가끔 내게 가볍지만, 그러나 상당히 의도적인 신체적 접촉을 했다. 나는 그녀가 레즈비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그녀가 브라이트를 보살피는 걸 보면 모성이 넘쳐흘렀다. 그런 의미에서 레즈비언은 좋은 엄마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카르멘은 브리짓트와 대학 친구로서 둘은 뉴욕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브리짓트가 갑자기 결혼을 하는 바람에 뉴욕 행을 포기했다. 로즈 고모에 의하면 브리짓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카르멘은 과민해 했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 다고 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혹시 카르멘과 브리짓트가 동성애 관계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회전목마 그림을 마무리 하는 중에 이상한 일을 겪는다. 외출했다 들어와 보니 그림 속의 카르멘의 얼굴과 그녀의 챙이 넓은 모자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뭉개져 있었다. 스튜디오 주인인 나 말고는 아무도 방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로즈 고모에게 혹시 다른 열쇠를 갖고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괜히 그런 질문을 했다가 그녀가 모욕적으로 느끼거나 마치 그녀가 내 서랍들을 샅샅이 털어 조사라도 하는 사람인 것처럼 비난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쩌나 하고 망설였다.
그녀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내 물건에 흥미를 갖는 것일까?
카르멘 말고 누가 그녀처럼 내 속옷이 좋은 거네 아니네 하고 함부로 말 할 수 있을 만큼 도를 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채석장에서 그녀가 지나치게 계집애 같은 몸짓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 볼에 기대며 친밀감을 강요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채석장에서 찍은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도 그녀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카르멘, 그녀는 소꿉장난 같은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려놓고 그날그날 연극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 집안에서 내 그림을 뭉개버릴 수 있는 사람은 카르멘 밖에 없다는 의심을 했다. 폴은 뭉개진 그림을 보고 이미 카르멘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나로서는 엄청난 일인데도 집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그의 태도에도 의구심을 갖는다.
그런 의문 속에 다시 지워진 그림을 완성시킨다. 회전목마는 카르멘이 사기로 예약한 그림이다. 카르멘은 그림을 보고 크게 만족해하면서 나의 그림솜씨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그림이네요. 정말 마음에 드는 그림입니다." 라고 말한 뒤 카르멘은 동의를 구하듯 날 쳐다보았다.
난 그녀의 그런 찬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치밀하게 계산되고 그녀의 서양자두 빛 붉은 입술을 통해 나오는 가식적인 언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르멘이 그림을 가져간 지 얼마 후 나는 숲속 길을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숨은 숲>이라 부르는 숲 가장자리 높은 나뭇가지에 기다란 헝겊조각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카르멘이 찾아간 회전목마 그림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과연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카르멘은 그림을 차안에 두었는데 그 일이 나고 나서야 그림이 없어진 줄 알았노라 했다. 폴과 함께 찢겨진 조각들을 주어다가 밤새도록 퍼즐 맞추듯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지만 그런다고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돌 쪼개는 사람' 현장 스케치를 위해 다시 채석장에 나갔었다. 돌을 채굴해 낸 자리에 자연적으로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가 편편한 바위에 어떤 여자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앉아 있었다.
거리가 멀어 식별할 수 없었지만 차가운 물속에 아이를 허벅지까지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기를 반복하는 게 이상해 보였다. 카르멘이 브라이트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 시간이었는데 분명 카르멘과 브라이트는 아니었다. 물에서 꺼내 올린 아이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건 사람이 아니라 고무 인형 같아 보였다.
그렇다 해도 어른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 날 산책길에서 카르멘에게 어제 채석장에서 봤던 그 여자와 아이 이야기를 해줬다. 카르멘은 한사코 내가 뭔가 잘못 본 것일 거라고, 결코 그럴 리 없다며 내가 목격한 일을 부인했다.
채석장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추운 날에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나는 의문투성이의 일들을 더 이상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돌 쪼개는 사람'
브라이트 초상화 다음은 '돌 쪼개는 사람'을 그리는 일이었다. 공장을 다녀오던 날 저녁 나는 욕조 깊숙이 몸을 담그고 낮에 뒤집어 쓴 먼지와 땀을 씻어 냈다. 그날 나는 머릿속으로 작업에 그림의 구도를 잡고 있었다.
돌을 쪼개는 사람이 돌을 올려놓은 작업대 쪽으로 몸을 구부려 압축공기 호스로 돌에 쌓인 먼지를 날린다. 압축공기 호스가 공기의 압력을 못 이겨 허공에 커브를 그린다.
나는 작업 자체보다는 내가 목격했던 돌을 조각하는 장인의 모습을 그렸으면 한다. 목까지 늘어뜨린 머리카락 위로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치 깍꿍놀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안경을 쓴 석공의 모습을 봤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장인의 장갑 낀 손과 돌을 자르는 연장과 조각에 여념이 없는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열쇠는, 어떻게 하면 직선 형태 위주의 배경과 먼지를 뒤집어 쓴 생동감 넘치는 얼굴과 장갑을 낀 손의 곡선이 어떻게 대비를 이루느냐에 달려 있다.
공장과 돌과 먼지가 온통 베이지 색 한가지인 데서 부분분분 알맞은 색깔을 골라내기란 일꾼들이 벌이는 온통 딱딱한 작업의 날카로움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찾아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돌을 다듬고 조각하는 일이 어려운 것처럼....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그림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나 그림의 원근법이 맞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로 등을 구부려서 돌을 다치지 않게 옮기려고 애쓰는 작업을 하는 그 동작에서 지난 며칠 째 원근법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폴은 이 그림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돌을 쪼개는 사람과 압축공기 호스가 돌을 둘러싸고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클레어 당신은 그들이 협동해서 돌을 옮기는 모습을 거의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너무 진지해서 그냥 친절의 뜻으로 해보는 말같이 들렸다. 어떻거나, 그가 내게 위로의 선물을 주는 것 같았다.
"거기엔 불안감이랄까 긴장 같은 게 ...."
"'창조의 고통'"이라고 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평범한 노인의 고뇌 같기도 하고요" 그가 과장된 신음 소리와 함께 웃었다. 무엇보다 이 그림에서 돌 쪼개는 사람은 젊어요. 십대에게 그런 고뇌를 겪게 해서 되겠어요?"
그는 건축가라기보다 뛰어난 미술 비평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브리짓트
라일락꽃이 피어나는 봄 날 내가 라일락 꽃 향기를 맡고 있을 때 폴이 다가왔다. 폴은 내게 라일락 꽃 가지를 꺾어 주겠다며 한 때 마구간으로 썼던 헛간으로 가위를 찾으러 갔다. 폴이 연장을 걸어두는 못박이 판에서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 때 내가 헛간 벽 선반위에 모자들이 박스째 채워져 있는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브리짓트의 모자 창고"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당황해 하면서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를 묻자 그는 브리짓트가 모자를 너무 많이 짜 놓았다고 만 말했다.
"아내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내가 묻자 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 난 아내를 진정으로 내 아내로 가져보지 못했어요. 우리가 결혼한 그날부터 그녀는 그녀만의 세상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어요. 전 다만 그 세상을 보지 못했을 뿐이죠. 전 그게 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견뎌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브라이트를 임신하기 전에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지요. 아내가 단순히 입덧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건 호르몬의 문제였거나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죠."라고 덧붙였다.
"산후 우울증인지 검사라도 받아보지 그랬어요?"라고 내가 물었다.
"아니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아내가 가버린 걸요. 너무 늦었던 거지요"라고 힘없이 대답했다.
폴의 그물망에 갇히다.
그때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에게서 마치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그녀의 모자가 쌓여있는 창고로부터 밖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마치 그 기운이 빠져 나가는 마개를 막을 것처럼 내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얼마동안을 서로 기대어 서있었다.
그때 갑자기 우리 사이에 엄청난 기운이 흘러 넘쳤다. 내가 깜작 놀라 그를 쳐다보자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격렬했고 나중에는 격렬했던 입맞춤의 강도가 누그러지면서 우아하고 달콤했다.
다시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고 그가 마치 굶주렸었다는 듯 세 번째 입맞춤이 이어진 다음에도 그는 내게서 떨어지기 싫은 듯 했다.
라일락꽃이 흐트러지고 꽃잎에 멍이 들어 그 향기가 온 침대에 가득했다. 작은 꽃잎들이 내 머리카락에 내려 앉아 있었고 발가락 끝에도 꽂혀있었다. 그의 가슴에 고은 검은 머리카락이 휘감겨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훑어 내리며 하얗게 붙어있는 라일락 꽃잎을 뜯어내 굴리거나 마룻바닥 에 튕겨냈다. 폴은 가볍게 내 손을 두드리고 베개를 뒤로 젖힌 다음 내게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우리는 어느 달밤에 강가로 소풍을 나가기도 했다. 폴과 나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안고, 담요와 소풍 바구니를 들고 잠재적인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연기를 했다. 기이하게도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밥>의 생환
어느 날 새벽 캄캄한 어둠 속에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누군가가 스튜디오 도어 록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폴에게 전화를 걸어 누군가 침입자가 있음을 알렸다. 불을 폴이 달려오고 문을 열자 거구의 남자가 앞으로 쓰러졌다. 폴이 달려와 전등을 켜고 살펴보니 죽었을 줄 알았던 밥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밥은 아들 로버트가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가족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했다. 로즈 고모가 반색을 하며 세상을 다시 얻은 듯이 좋아라고 했고 형제들이 들이닥쳐 온 가족이 밥의 귀환을 축하했다. 밥은 별채 열쇠를 지니고 있었고 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밥은 자기가 생명을 건져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느님의 역사하심 때문임을 강조한다. 로즈고모는 말끝마다 '주님' '할렐루야'를 외치는 밥에게 "이래도 주님 저래도 주님"한다고 핀잔을 준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밥 부부의 '신앙'이 아들 로버트나 딸 브리짓트에게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하느님은 왜 같이 사고를 당한 부인은 살려주시지 않은 것일까? 부인에 대한 애도나 슬픔 같은 것도 없이 자신의 생환만을 하느님의 구원하심으로 받아들였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브라이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있어도 딸에 대한 안위를 묻는 일조차 없다.
가족이 모여앉아 밥의 귀환을 축하한다. 밥은 '돌을 쪼개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보고 딜만 가가 그림을 사겠다는 제의를 한다. 세 형제는 그림 값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며 구체적인 것은 나중에 공장에서 만나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사건
카르멘은 이날 휴가를 받아 집에 오지 않았다. 폴과 딜만 가 형제들이 공장으로 간다며 스튜디오를 나섰다. 나는 어지러워진 스튜디오 안팍을 쓸고 닦았다.
일행이 나가고 나서 전화벨이 울렸다. 못 듣던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그녀는 회사 비서 프레드가 출근하지 않아 오늘 하루 임시 비서라고 했다. 지금 곧 내가 공장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 전화를 한다 했다.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이미 브라이트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그림 값을 흥정하자는 연락인가 싶어서 그림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임시비서는 그런 말은 듣지 못했고 공장으로 오라는 연락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행운이 너무 빨리 찾아온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부리니케 차를 달려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해 보니 주차장에는 어떤 차도 보이지 않았고 공장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물 쪽에 있을까 해서 다른 건물로 건너가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기이한 생각이 들어 다시 처음 공장으로 들어갔다. 완성된 자재 더미 속에 정적만 맴돌았다. 어디선가 자재 더미 속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타이어 링같이 생긴 쇳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뭔가가 획 지나가는 것 같아 움켜쥔 쇳덩이를 휘둘렀다. 순간 내가 거꾸로 나동그라지면서 뭔가가 밧줄에 매달린 채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시퍼>였다. 그는 장갑으로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전화선 줄로 온몸이 감겨서 공중에 대롱거렸다. 갑자기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크레인 조정석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보였다. 돌무더기가 실린 팔레트가 시퍼 위에 매달려 곧 시퍼를 향해 내리 덮칠 태세였다. 시퍼는 그 돌더미에 뭉개 없어질 것 같았다.
시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그러다가 클레어가 바닥에 있는 클러치를 건드리자 시퍼를 매단 밧줄이 쿵 하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퍼의 얼굴과 셔츠에 온통 핏자국이 낭자했다.
나는 시퍼를 내려놓고 전화선으로 묶여있는 줄을 풀었다. 크레인 조정석 창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를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크레인 조정석을 나와 긴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 왔다. 그때 공장 문으로 밥과 폴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여자를 향해 저 여자를 잡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
엠브란스를 부르고 시퍼가 실려 갔다. 다시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문득 브라이트가 어디 있는지,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살폈다.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재더미에 쌓여있는 돌을 하나씩 들춰 옮겼다. 돌 사이에 채워 넣은 완충재 톱밥이 흘러나오고 돌무더기 사이에 작은 동굴 같은 공간 속에 동물의 살 같은 감촉이 와 닿았다.
그곳에 브라이트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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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소개는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이하, 이야기의 결말 부분은 다른 독자들의 몫이다. 내가 모골이 송연했던 여기에서 줄이지 않으면 독자들의 재미를 다 빼앗아버리는 거나 진배없을 테니까.
작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의도적인 복선을 여러 군데 깔아 놓았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도 미로 속을 헤매게 만들 장치를 숨겨두었다.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에서 독자는 누가 사건의 장본인인지를 알고 있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 까지 짐작할 수 없다.
책을 읽다 보면 이야기의 실마리를 잘못 잡고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 쉽다. 간결한 문체지만 그 속에 숨은 행간의 뜻을 잡아내기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소설을 원서로 보는 맛을 만끽할 수 있어서 읽는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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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인디아나 출신의 여류 문인으로 신비주의(Mysticism) 추리소설 작가이다. 작중 인물의 성격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은 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신비주의 소설의 특징인 듯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개글을 보면 작가는 한때 카톨릭 수녀가 되려고 지원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이력으로 미루어 이 작품이 혹 종교적 신비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까 했다. 밥의 겉치레 신앙을 비난 하는 로즈 고모의 이야기나 매간의 이혼이 가족성경을 삶의 금과옥조로 삼는 남편 가족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깔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겉치레 신앙이나 형식에 치우친 신앙에 대한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기존 종교가 봉착한 문제의 대안으로서 깊이 있는 영성의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른바 종교적 신비주의' 를 표방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도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는 신비주의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 여럿 나와 있고 나름대로 이런 장르의 매니어도 많은 것같다.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구도 속에서 우리는 클레어가 느끼는 신비랄까 공포랄까 환상 같은 분위기에 빠져든다. 더운 여름날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흔히 납량물로 읽기 맞춤인 소설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우연히 우연한 장소에서 조우한 클레어와 폴 사이에 얽히고설킨 서스펜스 로맨틱 스토리다. 서스펜스란 무엇인가. 윌리엄 케인('거장처럼 써라'의 저자)은 '독자가 미래에 벌어질 어떤 사건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소설에서 기대란 곧 긴장이다.
특히 핑크색 모자와 푸른 색 모자이야기는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서스펜스 요소의 하나로 보인다. 여기서 점원 <마리>가 '대부분의 여자들이 푸른색 모자를 쓴다'고 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수적인 대비로 어떤 유행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영혼이 없는 이질적 인간도 섞여 산다.'는 함축적 의미로 보인다. 영혼이 없는 이질적 인간 이란 싸이코패스거나 허깨비다. 우리는 허깨비를 귀신이라거나 유령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좀비>같은 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 무렵 노르웨이에서 비레이빅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것을 보고 난 악의 화신같은 이질적 인간이 연상되었다. 소설이 어디까지나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지만 그 허구의 세계는 얼마든지 현실 세계에 모습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로맨틱 스토리가 이 소설의 겉포장이라면, 영혼이 없는 허깨비 같은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는 경고가 담긴 이야기야 말로 이 소설의 주제라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은 이 작품 "어떤 유령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알게 된다.
"아, 그랬었구나!" 하고. 작가의 철두철미한 복선에 한편 속은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작가의 치밀한 구성에 탄복을 아끼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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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작품 이전에 두 작품을 썼다.
하나는 Dance on the Water(Blue Star Productions, 1996.)이고 또 다른 하나는 Out of the Blue (Thornton Publishing, 1999.)이다. 이 책 Portrait of a Ghost는 작가가 위 두 작품이후 한 동안의 공백을 깨고 지난 해 말에 출간되었다.
간결한 문장이면서도 깊이가 있고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취사선택의 흔적이 역력하다. 산문이면서 어딘가 시적 음률이 느껴지는데 이는 다분히 작가의 천부적인 언어 구사능력이지 싶다. 추리소설의 문장이 자칫 차고 무미건조하기 쉬운데도, 오만가지 색깔로 그림을 그려내듯 묘사가 섬세하고 아름답다.
작가는 습관처럼 인디아나 석회암벨트에 사는 사람들의 예술혼을 발굴해 왔다. 석회암지대 특유의 문화는 은혜로운 성당건물과 미국 전역 각 주의 의사당 건물 같은 아름다운 석조건축 자재를 다루는 장인들을 길러 냈고, 돌 조각가는 물론 그 밖의 여러 분야에 걸친 예술가들에게 오랜 역사를 통해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인디아나의 풍물을 담아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열정이 돋보인다. 이름은 다르지만 '딜만 엔 선스'같은 석조건축 자재회사와 로즈고모의 꿈인 '힐 하우스(Hill House)'가 실재하고 클레어가 브라이트의 초상화에 못지않은 애정으로 그린 '돌 쪼개는 사람'도 그런 열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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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catraz 원작에는 Alcatraz merchandise로 나온다. 분명치는 않으나 알카트라즈 섬에 있었던 연방정부 형무소 '관광 안내판'이거나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의 광고판을 지칭한 듯 보인다.
**조선일보 김태훈 국제부장 [조선데스크] 테러범의 독서목록 8월 5일 (금) | 조선일보 | 브레이빅의 독서목록에 소설을 비롯한 문학이 빠져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보게 된다. 소설은 독자에게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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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금은 한가한 날, 시간을 내어 찬찬히 읽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