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23년에서 727년 사이, 신라 사람 혜초는 이 부근을 두 발로 여행한 경험을 자신의 답사기인 『왕오천축국전』에 남겨 두었다. “전으로 지은 웃옷과 가죽신을 신고 수염과 머리를 깎’은 사람들이 사는 곳, 가난한 자가 많고 부자는 적은데다, 산은 초췌하고 스산한데, 원래부터 나무나 다양한 풀이 없다는 곳. 위대한 여행자 혜초는 이 부근에 있던 왕국의 이름을 ‘소발률국(小勃律國)’이라 적고 있다”. 그로부터 5세기 뒤,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자 마르코 폴로가 또한 이 지역을 여행한 뒤, ‘40일 거리를 줄곧 산과 능선과 계곡을 지나고 수많은 강과 황야를 거쳐’ 여행하는데, ‘40일 거리 내내 집도 숙소도 없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스스로 음식을 갖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적었다. 이곳 사람들이 우상 숭배자들인데다 매우 야만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혜초나 마르코 폴로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졌다면 어떤 사진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을까? 그림이나 사진을 남길 수 없던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그들이 겪은 여정과 고행, 감동과 흥분 따위를 남길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사진가 박찬숙이 담아온 그 지역 사진들을 보면 흡사 세상 끝의 풍광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오래전 여행자 혜초와 마르코 폴로는 이런 험한 지역을 여행하며 저렇듯 한가로운 소리들만 남겨 놓은 것일까? 오늘날 이 지역이 그때보다 훨씬 더 접근 불가능한 땅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위대했던 탐험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데 카메라야말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호기심과 두려움의 세계를 ‘닮음’을 담보한 기계인 카메라가 유리 건판이나 필름에 새겨왔을 때, 미지의 세상은 더 이상 신화화를 허락하지 않는 땅이 되었다. 사진 발명 직후,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지들을 촬영해 온 막심 뒤캉의 사진이나, 인디언과 곰, 죽음의 협곡이 도사리고 있을 미국 서부의 광활한 풍경을 담아온 티모시 오셜리반의 사진들 속에 그 세상들은 조만간 인간의 문명에 귀속되기를 기다리는 땅이 된 셈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숭고(the sublime)’라는 감정을 정의하며 그것이 ‘미(美)’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숭고는 인간의 감각과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것, 단순화시켜 말해 압도적으로 큰 것을 대할 때 생기는 감정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막심 뒤캉의 누비아나, 티모시 오셜리반의 미국 서부 못지않게 박찬숙이 마주한 카라코람산맥의 풍광도 ‘숭고’에 가까운 풍경일 것이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이 서북으로 뻗어나가 카라코람산맥으로 이름을 바꾸는 이 지역은, 네팔 쪽 히말라야보다 더 거칠고 험하며 아름답다는 파키스탄 히말라야로도 불린다. 1년에 수천 명이 등정에 성공하는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비해, 여전히 사람들 발걸음을 쉬 허락하지 않는 세계 제2 봉(峰) K2를 비롯한 8천 미터급 산들이 5개 모여 있는 지역이 이곳이다. 높고 거칠고 척박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가장 높이 떠다니는 구름만이 그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고 혹자는 말하였다.
거대함을 넘어서는,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규모의 압도적인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은 무모해 보인다.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다 해도 프레임 안에 그 풍경이 온전히 담기기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다. 사진가 스스로 온몸으로 보고 맞닥뜨린 풍경과, 사진에 새겨진 흔적(index)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곳을 보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박찬숙의 사진들은 모종의 신비로움과 거룩함, 두려움 따위를 온전히 전해주려는 듯하다. 그 사진들 속에서 문명의 도전은 늘 좌절하여 길은 가까스로 나 있거나 무너져 있고,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쓸쓸해 보인다. 신화화를 무력화시키는 카메라를 사용했음에도, 이 사진들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각자 새로운 신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사진이 발휘할 수 있다는 압도적인 현실성이 오히려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수용되는 역설적인 경험으로. 카라코람이 너무도 숭고한 풍경이기 때문이거나, 우리의 상상이 그 풍경을 담아내기에 충분히 크지 않은 까닭일 터다.
이희인 (시각예술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