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드 체페슈
블라드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의 유명한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이었다. 지금의 루마니아에 있는 왈라키아 공국의 지배자였던 드라큘라는 1431년 트랜실배니아의 한 마을인 쉬그슈아라, 혹은 슈왈스부르그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블라드 드라쿨(악마 블라드)은 터키와 영원히 싸우기로 맹세한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의 일원이었다. 드라쿨이란 이름은 용이나 악마를 의미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용이 그려진 통화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13세 때, 드라큘라는 투르크인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고문과 사람들을 꼬챙이로 꿰는 형벌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것을 실제로 사용한 것은 1456년부터 1462년까지, 그가 왈라키아를 다스렸을 때였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일어난 것 역시 사실상 이 기간 동안이었다.

드라큘라의 다른 이름인 체페슈는 꼬챙이로 꿰는 자를 의미한다. 블라드는 자신의 적을 꼬챙이로 꿰어 죽이곤 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꼬챙이로 꿰는 형벌은 무척이나 끔찍한 형벌이었다. 이것은 한쪽 끝이 날카롭게 깎이고 기름이 발라진 긴 나무 꼬챙이에 희생자를 꿰어서, 그 즉시 죽지 못하도록 한 형벌이었다. 의심많은 아내와 난잡한 여성은 그들의 성적 기관이 잘려나가고, 산 채로 피부가 벗겨 진 채 대중 앞에 공개되었다. 드라큘라는 특히 땅에 박힌 여러 개의 꼬챙이에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에 처형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들이 꼬챙이에 꿰인 채 공중에 있는 동안, 몸무게는 점점 그들의 몸을 아래로 끌어 내리게 되며, 그러면서 그들의 내장을 찌르게 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끔찍한 광경을 더 잘 즐기기 위해, 드라큘라는 종종 그들의 광경을 보면서 만찬을 준비시켰고, 그것을 바로 그들 앞에 놓고 먹고 마셨다. 드라큘라의 성은 왈라키아에 북쪽에 있는 티르고비스트라는 마을에 있었다. 블라드 드라큘라는 1476년에 죽었다. 몇몇 소문에서는 그가 투르크인으로 변장하고 있다가 살해당했다고도 했다. 승리가 가까와 오자 그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가까운 언덕으로 가서 그 광경을 보고자 했다가, 그만 터키 군으로 오인되어 자기의 병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은 1931년에 열렸지만, 거기에선 심하게 훼손된 유골, 황금 왕관, 서펜트 장식이 달린 목걸이 하나 그리고 반지와 붉은 실크 의복 조각만이 발견되었다. 아쉽게도 모든 그의 유물들은 그것이 보관되어 있던 뷰쿠레슈티의 역사 박물관에서 도난당해 버렸다.
아마도 블라드 백작이 피도 눈물도 없는 흡혈귀라는 전설이 내려온 것은 적군에 가차없이 말뚝을 댄 백작의 잔인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백작이 다른 것도 아닌 '말뚝'을 사용했다는 것이 그가 흡혈귀로서 이름을 굳히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당시에는 의학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해 사망진단을 내리는 데 오진을 내리곤 했는데 그 때문에 살아있음에도 관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필사적으로 관을 두드리다 죽은 그들을 교회에서는 페스트를 불러온 흡혈귀라 단정하고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았다. 잔인한 성품과 말뚝. 여기에 마늘과 십자가만 더하면 완벽한 벰파이어가 아닌가.
중세 교회의 권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이 시대에 어떻게 저런 식의 무자비한 살육이 가능했으며 어떻게 비크리스트적이고 민간신앙적인 흡혈귀 전설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으나, 중세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가난하고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서유럽과는 달리 비잔틴 정교회가 지배하고 있던 배경으로 민간설화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이었던 그가 흡혈귀로써 서유럽 사회에 소개된 것은 19세기 영국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 의해서이다. 그는 당시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여행하던 줄 드라큘라의 잔인한 처형방법을 듣고 이것을 모티브로 흡혈귀 드라큘라를 주인공으로한 소설을 내놓게 된다. (1897년) 이후 소설 드라큘라가 여러차례 영화화 되면서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 드라큘라는 우리들에게 흡혈귀로 알려지게 되었다.
자료출처: 풍부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서프라이즈 세계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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