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쭉한 건물에 ‘工’자 지붕을 가진 서울 동관왕묘(보물 제142호, 서울 종로구 난계로 27길 84)에는 삼국지에 등장한 관우장군이 앉아 있다. 중국풍 건축양식에 중국인을 모신 사당이 수도 한양 땅에 600년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낯설고도 흥미롭다.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만든 여인시장(종로구 창신동)은 오늘날 동묘벼룩시장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영조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오간수문(사적 제461호, 종로 6가)은 유유히 흘러가는 청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288)은 유일하게 4글자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
△ 서울 동관왕묘(보물 제142호)의 정전 건물. 정면 5칸, 측면 6칸, 2기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어 길게 보인다.
한양지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긴 세월동안 반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도성은 물론 궁궐까지 폐허가 되었으니 선조는 왕실을 바로 세우고 전염병과 굶주림에 지친 민심을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국운을 되찾을 수만 있다며 수도이전이나 왕릉천장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용하다는 술사를 불러 해결책을 찾았는데 술사는 한양의 지기가 수구를 통해 빠져나가 전쟁에 이르렀으며 동대문 일대의 수구(水口)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구란 청계천 물이 빠져 나가는 곳으로 광희문과 동대문 사이를 말한다. 풍수지리상 허한 곳에 가산(假山)이라는 인공 산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어 결점을 보완했지만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나무가 황폐해진 것이다. 그 차선책으로 사당이나 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 지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한편 정유재란을 끝으로 왜군은 철수했지만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군대는 떠나지 않고 한양 도처에 주둔했다. 심지어 양민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받았던 터라 전쟁이 끝났다고 바로 본국으로 되돌아가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민심마저 흉흉한 데다 명나라가 조선을 병탄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선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명군을 다독이려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 해법이 도성에 틈이 벌어진 수구에 삼국지의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 일인 만큼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위기 타개책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명나라 조정에 감사를 표시해 더 많은 지원책을 내심 기대했다.
△ 열주로 둘러싸인 서울 동관왕묘 건물,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
중국인을 위한 사당을 짓겠다고 하니 명나라 장수들은 크게 환영했다. 명군이 평양성 전투와 울산 도산성 전투 때 관운장의 신령이 도움을 줘 왜군을 물리쳤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관왕묘 건립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장수는 기금을 갹출했고 명황제도 크게 기뻐해 친필 글씨에 건립 기금까지 보내왔다. 1599년 착공을 시작해 1601년 2년 만에 중국풍의 사당 동묘가 완성되었다.
사당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여(呂)씨 성을 가진 인부가 지붕위에 발을 들여놓는 데 갑자기 혼절해 떨어져 죽고 말았다. 여몽(呂夢)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촉나라 장수 관우가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을 일부러 죽였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그 후 백성들은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당 근처에 오거나 영정 앞에 서기만 해도 목숨을 잃는다고 여겼다.
관왕묘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대칭해 관우를 모시는 무묘(武廟)라 할 수 있다. 한양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양묘(東關王廟)의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다.
삼국지 장군에서 조선 백성의 신으로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관리사무소, 오른쪽에 화장실이 마주하고 있다. 화장실 앞 석단에는 앙증맞게 생긴 석수 3기가 서있는데 그 표정이 익살스럽다.
내삼문 앞에는 '금잡인(禁雜人)'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긴 비석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라고 일러준다. 오랜 수령의 배롱나무 두 그루가 핑크빛 꽃을 피어내고 있다. 내삼문 벽에는 빛바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오랜 세월 탓에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대칭해 서있는데 전통과 중국풍의 건축양식이 혼재하고 있다.
△동관왕묘 석수
세월의 향기를 잔뜩 품은 향나무가 긴 가지를 뻗고 있으며 그 뒤쪽 정전은 튼실하게 쌓은 단 위에 서 있다. 중국풍 사당이다 보니 외관은 우리 건축물과 판이하게 다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지붕은 丁자모양과 ㅡ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으로 중국의 사찰이나 사당에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정면 5칸, 측면 6칸 건물로 두 기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어 기다랗게 보인다. 정전 앞쪽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며, 뒤쪽은 관우와 부하장군을 모신 본실이다. 정면은 살창문을 달고 있어 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요즘도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있는가보다. ‘목창살 사이로 현금 또는 귀중품을 집어넣지 마십시오.’ 라는 특별 경고문이 걸려 있다.
중국 촉나라 장수가 우리 민족의 숭배대상이 된 이유는 왕의 역할이 컸다. 숙종이 능행을 마치고 동묘에 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역대 임금들은 동묘에 배알을 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동관왕묘를 찾았고 정조는 작은 제사인 관왕묘 제례를 중사로 승격시켰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관우신을 모시는 무녀를 통해 피난지에서 궁으로 돌아갈 날을 점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관운장은 남이장군이나 임경업장군처럼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고 복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정면을 제외한 3면의 벽은 벽돌로 쌓았고 좁은 툇간을 두고 열주를 둘렀다. 정면보다는 측면이 길어 내부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나는데 중국의 묘사건축양식을 따랐다 정전 내부는 문짝을 달아 공간을 구분했는데 안쪽 본실은 금으로 단청한 관우상이 긴 수염을 뽐내고 있으며 좌우에 아들 관평을 비롯해 4분의 무인상이 서 있다. 제례 장소인 전실 양쪽은 옥대, 황룡선, 면류관 등 동묘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기둥과 벽면에는 만고표명, 만고충신, 천하영웅, 천추완인, 천추의기 등 관우를 칭송하는 글씨들로 빼곡하다.
금남의 여인시장과 동묘 벼룩시장
△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만든 여인시장, 동묘벼룩시장으로 이어오고 있다.
동묘를 벗어나면 벼룩시장이 펼쳐져 흥정하는 소리에 시끌벅적하다. 옷, 신발, 중고가구, 시계, 자전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까지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최대 벼룩시장이다. 이 살가운 시장의 역사는 조선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왕비에서 폐위된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궁궐에서 쫓겨나 관노비 신세로 전락해 근처 정업원에 머물며 유배 간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얻어온 음식으로 간신히 끼니를 이어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의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채소시장을 개설한 것이다. 조정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금남의 시장을 개설했지만 지금은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까지 즐겨 찾는 플리마켓으로 바뀌었다. 여인시장의 표지석은 숭신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있다.
영조의 애민사랑, 오간수문지(사적 제461호)
△ 한양도성의 은밀한 통로인 오간수문 모형
5칸 수문의 의미를 지닌 오간수문은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문을 설치했지만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외부인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었던 통로였나 보다. 그러나 이 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물이 범람해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 올리는 대공사를 감행했다.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준천도’인데 청계천 오간수다리 아래 벽면에 그림을 볼 수 있다. 다섯 개의 수문과 그 안의 쇠창살을 볼 수 있는데 청계천 주변 버드나무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놀이 장소가 알려졌다. 오간수문은 1925년 경성운동장을 건립되면서 사라졌고 그 위에 콘크리트로 만든 근대식 다리가 놓이면서 그 위로 전차가 지나갔다. 오간수교 아래 북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축소한 모형을 조성해 놓았다.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이 4글자인 까닭은
△ 보물 제1호인 서울 흥인지문은 다른 한양의 대문과 달리 4글자이며 방비를 위해 옹성을 둘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외적을 막기 위해 도성을 축성했다. 도성 동서남북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4덕(德)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대문 이름에 넣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북쪽에 숙정문(肅淸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을 세웠다. 모두 3글자인데 왜 흥인지문만은 4글자일까?
이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기세가 너무 약해 풍수에서 기세를 상징하는 ‘之’를 넣어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처음에 흥인문으로 명명할 때 기인이 나타나 문 이름에 之를 넣으면 임금의 자손 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훗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란을 가는데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가진 지도에는 흥인문으로 표시되어 있어 흥인문을 찾으러 간 사이 인조가 흥인지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흥인지문은 강원도와 중원과 연결되는 군사적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 방비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4대문 중 유일하게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두르고 있는데 밖에서는 성문이 보이지 않아 적을 방어하기에 용이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큼직하게 반원을 그리며 성을 쌓았는데 북쪽만 일부 터져 출입구로 사용되었다. 성에 여장을 쌓고 총안을 뚫어 적이 이곳에 들어오면 독 안의 든 쥐가 된다.
북쪽 낙산 성벽에서 흥인지문을 내려다보면 현대식 건물인 DDP(동대문 디지털 플라자)와 잘 어우러지는데 특히 해질 무렵 야경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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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봤어요 동묘
정보 감사드려요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가보고 싶습니다.
자주 와서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