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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식 시집, <고개 숙인 모든 것>, 푸른사상, 2017년 5월.
고요의 시학 맹문재 1. 박노식 시인의 작품들에서 ‘고요’는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토대이자 주제를 심화시키는 제재이다. 고요는 잠잠하고 조용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무게와 깊이와 색깔과 형태를 변주시킨다. 그와 같은 면은 “산 아래 작은 마을이 항아리 안에 내려앉은 우물같이 고요하다”(「가을 저녁」)라는 면을 넘어 “가을의 고요가 먼저 내려와 눕는데 내가 서운했다”(「고요」)라거나 “저녁이면 항아리에 고인 빗물이 고요히 가라앉는 소리를 들으며 귀가 밝아졌다”(「채송화」)라고 노래한 데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고요한 곳에서 고요한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다운 고요함이 아니다. 소란한 가운데서 고요함을 지켜야만 심성의 참 경지를 얻으리라.”는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조지훈 시인은 이 말을 “고요함 속에서 몸과 마음이 고요하기는 쉽지만 이것은 참다운 고요함은 아니다. 움직이고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맛볼 줄 알아야 천성의 진실경(眞實境)이니 참 고요함이다. 대은(大隱)은 시항(市巷)에 숨는다는 옛말이 있다. 깊은 산골에 숨어 살기는 어렵지 않지만 시끄러운 저자에 숨어 살기는 쉽지 않은 까닭이다. 절간에 앉아서 도를 닦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지러운 거리에 나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시끄럽고 어려운 고비에 앉혀 놓아 보지 않고는 과연 그 사람이 참 고요함을 체득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요는 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주자(朱子)가 인식한 것과 상통한다. 주자는 복건성 장주의 지사로 있을 때 사사한 임일지라는 제자가 존양(存養)을 위해서 고요함이 많이 필요한가를 묻자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공자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제자들이 수양하도록 하였다. 지금 ‘고요함을 주로 삼는다’라고 하여도 그것은 사물(사람이나 사태)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부모를 섬기고 친구와 사귀며 처자를 사랑하고 하인들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설마 그런 것들을 버리고 오직 문을 닫고 정좌하며 사물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존양’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인간의 착한 본성을 간직하고 양성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버리고 고요를 구하는 차원을 넘어 실천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 박노식 시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고요 역시 정적인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요하지만 이 세계의 시끄러움을 회피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품기 위해 함께한다. 배타심이나 차별성이나 경계심을 극복하고 포옹하는 것이다. 시인의 고요는 평온하고 담박하면서도 풍진이 선명하고 기운이 느껴지고 그리고 따스하게 들어온다. 2. 한 뼘쯤 대문이 열려 있다 감나무 그늘 안은 고요하고 현관문 앞에서 고양이는 빗자루처럼 누워 있고 빈 먹이통엔 개미 떼 소란스럽다 우체부는 몇 통의 안부를 내려놓고 우물가로 간다 호스의 물이 뜨듯하다 ―「빈집」 전문 “감나무 그늘 안은 고요”해서 “현관문 앞에서 고양이는 빗자루처럼 누워 있”는 시골집의 여름날 풍경은 그지없이 한가하다. 그 “고요” 속에는 어떠한 대립도 갈등도 보이지 않고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한 뼘쯤 대문이 열려 있”는 풍경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품의 화자는 그 “고요”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를 발견하고 있다. 가령 “고양이”가 먹고 난 “빈 먹이통”에서 소란스러운 “개미 떼”나 “몇 통의 안부를 내려놓고 우물가로” 가는 “우체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화자의 관심은 조용하고 고요한 시골집의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화자는 특히 “우체부”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고요” 속에서 부단하게 움직이는 인간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생김새가 매력적이거나 권세가 대단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경제력이 풍부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소박하고 나약하고 박력이 없는 인상이다. 화자는 그와 같은 그를 주목한다. “몇 통의 안부를 내려놓고 우물가로” 갈 정도로 부단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를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며 품는데, 이와 같은 자세는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외조모는 홀로 김을 매고 지게를 지고 외양간을 보살피느라 마흔 무렵에 허리가 휘었다 큰 눈 깊숙이 그늘이 들어 앉아 한낮의 햇빛이 다녀가도 그대로여서 내 유년의 눈빛도 그 안에서 일찍 철이 들었다 뒤란의 사철나무 울타리와 길게 누운 간짓대는 처마 밑에서 늘 외로웠고 저물녘엔 나의 작은 발자국만 일없이 다녀갔다 어느 외딴 농가의 뒤란이 낯익고 서글퍼서 잠시 발을 멈추는데 울타리 사이로 내려앉은 한 줌 이끼가 나의 눈을 채운다 ―「뒤란」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어느 외딴 농가의 뒤란이 낯익고 서글퍼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외조모”를 떠올린다. “외조모”는 “큰 눈 깊숙이 그늘이 들어 앉아” 있을 정도로 서글프게 살았다. 또한 “뒤란의 사철나무 울타리와 길게 누운 간짓대는 처마 밑에서 늘 외로웠”다고 기억하듯이 “외딴 농가”에서 외롭게 지냈다. 그렇지만 작품의 화자는 그 외로움 속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 “외조모”를 주목한다. “홀로 김을 매고 지게를 지고 외양간을 보살피느라 마흔 무렵에 허리가 휘었”던 외할머니의 삶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내 유년의 눈빛도 그 안에서 일찍 철이 들었다”고 밝힌다. 외로운 날들을 극복할 전망이 보이지 않았지만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영위해나간 외할머니를 따르는 것이다. “저물녘엔 나의 작은 발자국”을 찍는 행동도 그 모습이다. 이와 같이 작품의 화자는 우연히 외딴 농가를 지나다가 발견한 낯익은 뒤란을 바라보면서 회한에 젖지만 그것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울타리 사이로 내려앉은 한 줌 이끼가 나의 눈을 채운다”고 노래한다. “이끼”는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생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항공우주국의 실험에서는 우주 공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화자가 생명력이 대단한 “이끼”를 자신의 “눈”에 담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온몸으로 생애를 밀고 나아간 외할머니를 따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한빛약국 앞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공복의 까마귀처럼 졸고 있는 팔순 노파 낡은 파라솔 그늘엔 한 소쿠리의 밤과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토란만이 행인의 눈길을 주워 담는다 어느 유명한 화가의 손끝마저 비켜 간 무정한 가을의 저녁 거리를 나는 마음에 그린다 멀리 달려오는 자동차의 전조등은 뜨겁고 앙상한 은행나무 가로수는 줄 지어 안부를 묻건만 수심이 가득한 밤과 토란의 눈망울은 어떤 그리움도 호명하지 않는다 까마귀는 외롭고 거리의 인파도 꼬리를 감추었다 나의 피로한 동공 속으로 안산(案山)의 외할머니가 성큼 들어와 지금 쓸쓸한 저녁을 주무시는 중이다 ―「쓸쓸한 저녁 거리」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한빛약국 앞에서/좌판을 벌여 놓고/공복의 까마귀처럼 졸고 있는/팔순 노파”를 발견하고 “안산(案山)의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화자가 좌판을 차린 한 노인을 보며 자신의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이나 체구나 인상이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팔순 노파”는 “낡은 파라솔 그늘”에 “한 소쿠리의 밤과/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토란”을 놓고 “행인의 눈길을 주워 담”고 있다. 좌판에 내놓은 물건들은 다 팔아도 몇 푼 되지 않지만, 노인에게는 삶의 전부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어느 유명한 화가의 손끝마저 비켜 간/무정한 가을의 저녁 거리”에서 그 노인을 품는 것이다. “멀리 달려오는 자동차의 전조등은 뜨겁고/앙상한 은행나무 가로수는 줄 지어 안부를 묻건만” 노인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수심이 가득한 밤과 토란의 눈망울은/어떤 그리움도 호명하지 않는다”. 진정 “밤”과 “토란”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할 여유가 없다. 그저 처한 현실에 매진할 뿐이다. 작품의 화자는 “까마귀는 외롭고/거리의 인파도 꼬리를 감”춘 저녁인데도 자신의 분신을 내놓고 있는 그 노인을 외면하지 않는다. “피로한 동공 속으로/안산(案山)의 외할머니”를 불러들여 편안하게 “주무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만치, 장터 밖 외진 입구에 노파는 홀로 앉아 있다 질긴 고사리와 쭈글쭈글한 대추를 만지작거리며 눈은 자꾸 장터 안으로 향한다 서로 눈을 마주보며 푸성귀 한 줌 흥정할 거리도 아니지만 인파에 밀려가는 나의 무릎이 아팠다 밖에서 마음 다치고 들어오는 날은 왠지 방안이 낯설어 습관처럼 자꾸 빈 서랍만 열어 본다 서랍 안이 고요해서 반질한 손잡이를 끌어당기면 대추도 아닌 고사리도 아닌 노파의 설운 손등이 눈을 가렸다 ―「화순 장날」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저만치, 장터 밖 외진 입구에” “홀로 앉아 있”는 “노파”를 응시하고 있다. 그 노인은 “질긴 고사리와 쭈글쭈글한 대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고 장터로 들어가자 “자꾸 장터 안”쪽을 바라본다. 화자는 “서로 눈을 마주보며/푸성귀 한 줌 흥정할 거리”에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노인의 그 모습에 “인파에 밀려가는/나의 무릎이 아”프다고 토로한다. 그뿐만 아니라 “밖에서 마음 다치고 들어오는 날은/왠지 방안이 낯설어/습관처럼 자꾸/빈 서랍만 열어”보는데, “대추도 아닌/고사리도 아닌/노파의 설운 손등이 눈을 가”린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이 화자는 좌판을 열었지만 물건을 제대로 팔지 못하는 “노파”를 끌어안고 있다. “서랍 안이 고요해서/반질한 손잡이를 끌어당기면” “노파의 설운 손등”이 보이듯이 화자는 마음속에 그 노인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노파”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움직이는 존재이다. 화자는 그 노인에게 기꺼이 다가가 함께하고 있다. 4. 처마 밑, 거미는 그늘과 햇볕과 낮과 밤을 잇고 공중을 오가며 길을 만든다 노모는 굽은 허리를 펴고 서서 걸어가는 거미를 보는데 싸리나무 빗자루가 허공을 몇 번 지나가버렸다 어느 해의 내 집에 고요한 날이 있어서 거미는 집을 짓고 쌀을 안치고 빨래를 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릴 것인가 ―「거미」 전문 “처마 밑”에 있는 “거미”는 고요하지만 부단하게 움직이고 있다. “거미는 그늘과 햇볕과 낮과 밤을 잇고 공중을 오가며 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를 내거나 힘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령을 피우거나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저 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길을 내고 있을 뿐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거미”와 같은 삶을 살아온 인물로 “노모”를 결합시키고 있다. “노모” 역시 “굽은 허리”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길을 걸어왔다.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거미”처럼 고요하게 길을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노모”가 “굽은 허리를 펴고 서서 걸어가는 거미를 보는” 동안 당신의 생애를 떠올리는 것은 이해된다. 작품의 화자는 “거미”와 “노모”의 모습에서 자신의 길까지 생각한다. “어느 해의 내 집에 고요한 날이 있어” “집을 짓고/쌀을 안치고/빨래를 하고/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있을지, 부러워하며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신의 삶을 각성하고 새로운 의식을 갖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며 능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 화자의 이와 같은 자세는 안빈낙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자공이 묻자 “괜찮기는 하나 가난하면서도 낙도(樂道)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라고 공자가 대답했듯이 군자로서 갖추어야 할 몸가짐은 대단하다. 가난하면 비굴하게 아첨하기 쉬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넘어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 교만하기 쉬운데도 겸손한 자세를 넘어 예를 좋아하는 삶이란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화자가 지향하는 “거미”나 “노모”의 삶 또한 그 못지않다. 그들의 삶이란 학식과 행실의 차원을 넘어 생애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절대적이고 절실한 것이기에 화자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자세로써 추구하려는 것이다. 외할머니의 시렁은 작고 어두워 간혹 집왕거미가 내려와 머물다 가곤 했는데 저녁이면 항아리에 고인 빗물이 고요히 가라앉는 소리를 들으며 귀가 밝아졌다 이른 아침 부엌은 또 비어서 장독대 채송화만 바라보다가 산 너머 범바우골에서 호미 긁는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가득 차오를 때면 굳게 다문 채송화의 여린 입술을 매만지며 나의 침묵도 시작되었다 어느 날 뙤약볕을 달려와 빈 집에 이르니 텃밭 울타리의 나팔꽃은 시들고 뜨건 장독대 아래 조용한 채송화만 남아서 나를 반겨주었다 ―「채송화」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외할머니의 시렁은 작고 어두워 간혹 집왕거미가 내려와 머물다 가곤 했”고 “저녁이면 항아리에 고인 빗물이 고요히 가라앉”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 “빗물”의 “소리를 들으며 귀가 밝아졌다”고 토로한다. “빗물”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화자는 “이른 아침 부엌은 또 비어서 장독대 채송화만 바라보다가/산 너머 범바우골에서 호미 긁는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도 들었다. 화자는 그 소리가 “귀에 가득 차오를 때면 굳게 다문 채송화의 여린 입술을 매만지며” “침묵”했다. 부엌이 빌 정도로 가난한 살림을 채워보려고 “외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산 너머 범바우골”의 밭을 매었지만, 가난이 해결될 날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외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화자는 그 소리를 듣고 “침묵”한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화자는 “뙤약볕을 달려와 빈 집에 이르니 텃밭 울타리의 나팔꽃은 시들고 뜨건 장독대 아래 조용한 채송화만 남아서 나를 반겨주었다”고 노래한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시들지 않은 “채송화”가 “반겨주었다”고 인식한 것은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에 주눅 들었던 마음이 되살아난 것을 상징한다. 위의 작품의 서술이 “귀가 밝아졌다”로 시작해 “침묵도 시작되었다”로 바뀌었다가 다시 “반겨주었다”로 마무리된 것은 주목된다. 긍정적인 마음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긍정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적인 것이 정적으로 되었다가 다시 동적인 것으로 돌아온 상태로, 화자는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끝내 희망을 놓지 않고 움직인 것이다. 가까운 산이 달아날 즈음 먼 산은 이미 지워져서 별 서넛이 곧장 튀어나올 것 같다 산 아래 작은 마을이 항아리 안에 내려앉은 우물같이 고요하다 주먹을 쥐고 펴면 고단한 소리가 난다 오늘 하루가 빠져나가서 손금이 가볍다 빈 깻대는 한낮에 잠시 비워둔 몸속으로 저녁을 들여와 마디마다 습이 고였다 ―「가을 저녁」 전문 “가까운 산이 달아날 즈음 먼 산은 이미 지워져서 별 서넛이 곧장 튀어나올 것 같”은 저녁 무렵, “산 아래 작은 마을”은 “항아리 안에 내려앉은 우물같이 고요하”기만 하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작품의 화자가 바라보는 산골 마을은 이렇듯 고요하다. 어슴푸레한 저녁 기운이 마을을 덮고 산을 덮고 화자의 마음을 덮는다. 하늘을 따라 하루가 저무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하루가 저무는 그 시간에 “주먹을 쥐고 펴면 고단한 소리가 난다”고 노래한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매달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오늘 하루가 빠져나가서 손금이 가볍다”라고 다시 노래한다. 농사의 힘듦을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온몸으로 다했기에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저무는 하루를 고요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빈 깻대는 한낮에 잠시 비워둔 몸속으로 저녁을 들여와 마디마다 습이 고였다”라고 긍정한다. 빈 몸에 저녁을 들여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다. 일찍이 주자는 움직임과 고요함의 관계를 물과 배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했다. 조수가 밀려오면 움직임이고 조수가 물러나면 움직임을 멈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움직임과 고요함에는 단서가 없으므로 두 상황을 확실하게 분리할 수 없다. 사람의 호흡에 비유하면 마실 때는 고요함이고 내쉴 때는 움직임이 된다. 또 대화할 때 대답하는 것이 움직임이고 침묵하는 것이 고요함이다. 무슨 일이든 다 그렇다. 인간의 삶에는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항상 존재한다. 고요함 속에 존재하는 그 움직임은 관념이나 추상이나 상상의 실재가 아니다. 언제나 같은 몸으로 보이는 우리의 육신도 흐르는 강처럼 변하고 있듯이 그 변화로 인해 우리는 생존하고 있다. 박노식 시인의 시작품들은 그 고요 속에 움직이는 존재들의 가치와 의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지닌 착한 본성과 강인한 생명력을 정중동의 실체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孟文在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