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아홉 번째 시간인 9강은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입니다.
.................................................................................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
- 겨울사경회 둘째 날 : 아홉 번째 시간 -
9강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재세례파
16세기 종교개혁을 분류하면, 루터파, 칼빈파(네덜란드 종교개혁,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프랑스 종교개혁 등), 잉글랜드 국교회와 극단적 종교개혁으로 나눈다. 극단적 종교개혁의 주요 세력은 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Anabaptists)이다. radical(래티컬)이라는 단어 번역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급진적으로 번역하는데, 극단적, 과격한 등으로도 번역한다. radical 종교개혁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교회와 사회에 내 놓았다. 재세례파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재세례파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되어 교회와 사회 영역에 자리잡았다. 필자는 재세례파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은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질서’를 생각하는데, 제세례파는 ‘평등’을 제안했다. 필자는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재세례파는 초대 기독교를 복원하려는 성향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아닌 복음서에서 예수가 원하는 교회를 상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은 세례, 30세에 받은 세례를 추구하니, 기존의 물세례 방식을 거부하고 침례 방식을 재현했다. 그리고 기존 교회의 물세례 방식을 거부하고 재세례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재세례파의 기본 자세가 성경본문에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라고 말하지 않고 손가락만 보라고 외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재세례파 운동은 츠빙글리의 사역지에서 발생했다(롤란드 베이튼). 1521년 1월 21일, 십여 명의 사람들이 취리히의 좁은 골목을 의연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걸었다. 뮌스터 교회당 근처에 자리한 만츠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시의회로부터 성경 공부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 1498-1527)1)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아이를 낳은 후 8일 이내에 세례를 받도록 했고, 만약 어길 시에 추방하겠다고 경고했다. 이것을 의논하기 위해 만츠의 집에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시의회에서 개최한 1525년 1월 17일 공개논쟁에서, 유아세례를 옹호한 츠빙글리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해 패했다. 시의회는 토론 후 일주일 안에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추방한다고 경고했고, 결국 이들은 만츠의 집에 모여 세례를 베풀었지만 취리히를 떠나 졸리콘(Zollikon)에 거주하며 재세례파 집단이 조직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 지도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18-1526), 펠릭스 만쯔, 조지 불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er, 1480?-1528) 등이었다.
재세례파에는 메노파, 후터파, 침례파, 퀘이커 등이 포함된다. 메노파 아미쉬(Amish)는 지금도 현대문명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대로 농작물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16세기 유럽의 재세례파(The Anabaptists) 가운데 하나인 스위스 형제단(The Swiss Brethren)으로부터 1693년 야곱 암만(Jakob Ammann, 1644 혹은 1656-1730)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재세례파에 속한 다른 교단인 메노파, 야곱파와 그 신학과 실천면에서 공통적인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16세기에 초대교회를 회복하려 했던 재세례파운동은 조지 폭스(Goerge Fox, 1624-1691)와 퀘이커교, 경건주의 운동과 형제교회, 존 웨슬리, 청교도 운동, 침례교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교권주의에 항거하며 영적인 갱신을 추구했던 12세기 말 프랑스의 왈도파(the Waldensians)와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는 삶”을 살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체스코파(Spiritual Franciscans)와도 신학적으로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527년 1월 7일 지도자였던 펠릭스 만츠는 참수형으로 재세례파 최초 희생자가 되었다. 스위스 재세례파는 평화주의자였고, 평화주의는 네덜란드 재세례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은 티롤(Tyrol) 지방으로 옮겨 활동했다. 로마 카톨릭은 재세례파를 발견하고 핍박했다. 1529년 9월 6일 블라우록은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더욱 북쪽으로 이동했다. 모라비아(Moravia) 지방에 이르러서 정착했다. 그곳에서 비뤼더호프(형제촌)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초대교회의 형태를 따라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개인 소유는 없으며 공동으로 재산을 관리했고, 자신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때에 침례를 주었다. 개인보다 형제애를 우선시하여 공동체 형태로 살았다. 이들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이름을 따라 ‘후터파(Hutterits)’로 불렀다. 후에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부흥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존 웨슬리 등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온순한 성향이고, 모라비안은 선교 역사를 주도한 대표적 세력이다.
재세례파에는 스위스에 재세례파가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에 재세례파가 있었다. 전자는 온건한 성격으로 평화와 평등을 주장했고, 후자는 폭력적이고 광신적인 면으로 천년왕국의 실현과 평등을 주장했다.
루터와 함께 라이프치히 논쟁에 참여해 요한 에크를 공격했던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는 재세례파인 동시에 혁명적 변혁을 추구했다. 결국 농민 전쟁(German Peasants' War, 1524-1525)을 주도하다 1525년 5월 27일 사형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에 1530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안정기가 되었을 때, 뮌스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Münster Rebellion, 뮌스터 반란).
모피 상인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1495-1543)은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루터를 추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성경 해석을 하면서 무지한 자들을 미혹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가르침은 국가와 교회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는데, 스위스 재세례파까지 그를 거절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1533년에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발생했다. 그 중에 네덜란드 서부 하를렘 출신의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가 있었다.
마티스는 호프만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에 에녹 선지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는데 자신이 바로 그 에녹 선지자라고 선언했다. 1533년, 마티스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뮌스터의 주인들이라고 선언하며 뮌스터를 정복했다. 그는 뮌스터가 율법이 없고 또한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새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에 독일과 네덜란드로부터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뮌스터로 집결했다.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라는 인물이 광신적 신앙을 뮌스터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군대가 그들을 포위했고, 뮌스터의 재세례파는 무력을 동원하여 방어했다. 1534년 여관 주인이었던 라이덴의 얀이 권력을 쟁탈했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구약처럼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을 ‘다윗 왕’으로 불렀다. 결국 1535년 6월 24일 성은 함락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며 막을 내렸다.
뮌스터 사건 이후 저지대 라인에 살았던 이들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헌신 덕분에 철저한 비폭력 공동체로 전환하여 생존했다. 이들은 후에 메노나이트라는 이름되었다. 유럽에서 극심한 핍박을 피하지 못했던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와 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
재세례파는 수 많은 변형과 융합 과정을 거쳤다. 단일신론, 천년왕국, 유아세례금지 등 공통점을 보인다. 지금 재세례파적 경향에서 위험한 성격은 ‘성경제일주의’이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성경 문자대로 산다는 것으로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 또 반대로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문자에 매이지 않는 신령한 방식대로 산다는 것도 유사한 패턴이다. 문자주의와 신령주의는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란성 쌍둥이이다. 모두 목표가 아닌 손가락만 보도록 한다.
신령주의(Spiritualists, 신비주의)
재세례파는 일관된 신학 사조가 있었는데 반해 신령주의자는 개인적 사상의 사조로 구성되었다. 일치된 신학이 없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사유 체계는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는 신학들에 영향을 미쳤다. 신령주의를 강력한 성령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재세례파도 성령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령주의는 문자와 영을 대립시키고, 가시적인 것을 부정하는 내면성이다. 신령주의는 1) 복음적 신령주의, 2) 합리적 신령주의, 3) 신비적 신령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령주의는 퀘이커교와 경건주의로, 합리적 신령주의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로, 신비적 신령주의는 낭만주의적 관념철학으로 발전했다. 박창건은 재세례파와 달리 신령주의가 오랜 기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영향력도 감소되지 않았다. 재세례파와 신령주의는 여러 모습으로 교회와 사회에 침투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과 직접 영적 교제를 바라는 반(反)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혜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 들며 조용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이 근대와 현대에 갈수록 확산되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감흥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과 교리의 권위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있게 보았다. 그런데 이런 영적 운동이 합리주의와 잘 융합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합리주의와 신령주의의 공통점은 인간의 능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신령주의는 로마 카톨릭을 부정할 수 있지만, 로마 카톨릭적인 위계질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퍼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1489-1561, 독일),2) 세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 1499-1542, 독일),3) 후안 데 발데스(Juan de Valdés, 1490-1541, 스페인)4) 등이 있다.5)
야곱 뵈메(Jakob Böhme, 1575-1624)는 종교 개혁 직후에 활동한 독일의 신비주의자, 영성가, 르네상스의 자연철학자, 최초의 독일 철학자 그리고 초월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다. 신지학의 아버지(father of theosophy) 야곱 뵈메는 1575년 경건한 루터주의자이자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99년 뵈메는 쾨르리츠의 시민이 되었고, 그곳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그는 그해 5월 카타리나 쿤츠만(Catharina Kuntschmann)과 혼인했고, 그녀는 1601-1611년 사이 4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이 시기에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얼마 후 뵈메는 구두 수선공 일을 그만두고 무역업자로 변신했다.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다가 1624년에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와 죽었다. 뵈메는 종교개혁 당시에 가장 유력한 신비주의자이다. 독일의 뵈메에서 스웨덴의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보리)6)가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비주의(독일신학)는 영성주의 그리고 유대교 일파인 카발라(Kabbala) 사상을 수용했다. (*)
....................................................................
1) 1498년경 취리히에서 출생한 만츠는 에라스무스, 레오 쥬드(Leo Zud) 그리고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와 같은 카톨릭 사제의 사생아였다. 만츠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간증문과 18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또 익사 당하기 2년 전 추리히 법정에 제출한 문서인 「항의와 변호」(Protestation und Schutzschrift)가 남아 있다. 이 글은 재세례파의 주장을 변호한 글이었다.
2) (참고) 슈벵크펠트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와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를 통해 종교개혁의 원리를 접했다. 즉 재세례파적 개혁 원리를 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원칙을 창안했는데, 성찬 이해(1524)을 놓고 마틴 루터와 갈등했다. 그는 인문주의 동료인 발렌틴 크라우트발트(Valentin Krautwald)와 긴밀하게 협력했고, 천상의 육체 교리로 알려진 성찬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종파가 이루었는데 독일에서는 불법으로 정죄되었다. 그의 사상은 아나뱁티즘, 유럽 경건주의, 영국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주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현대에 약 2,500여명의 회원으로 단체를 이루고 있다.
3) (참고) Frank는 루터파와 재세례파와 모두 접촉했지만, 루터파의 도덕적인 모습에, 아나뱁티스트의 독단적이고 편협한 모습에 실망에서 양측에 속하지 않았다. 프랭크는 로마 카톨릭, 루터파, 재세례파를 모두 거부하고 자기 진영을 구축했다.
4) (참고) 후안 데 발데스는 스페인 귀족의 아들이었고, 관료, 학자, 정치가, 신학자로서 활약했으며, 그의 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찰스 5세의 개인 비서였다. 학문의 초점이 성경 연구에 맞춰진 알칼라의 신설 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개혁자 알카라즈에게서 성경을, 특히 바울 사상을 소개받았다(저자 소개의 글에서). 후안 데 발데스, 돈 베네데토, 『쉽게 읽는 그리스도 때문에』, 김태곤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2009).
5) (참고) 미하엘 벨커 외 다수, 『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48개 도시, 72명의 개혁자들이 이룬 대변혁”인데 제네바와 칼빈과 기욤 파렐에 대해서는 없다.
6) 조덕영 박사의 스웨덴보르그에 대한 글.
1. 스웨덴보르그는 누구인가 : 에마뉴엘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 1688-1772,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짐-편집자 주)는 일찍부터 국내에 알려진 인물이나 무엇보다 최근 천국 체험에 대한 그의 책("천국은 있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뒤늦게(?)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과거 그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으나 그리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그의 천국 관련 체험 책이 재출판되어 광고를 타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새삼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태생인 그의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부친은 루터파 궁정 목사인 동시에 대학의 신학 교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사색적이고 종교적 관심과 신비주의 경향을 가졌다고 하는 데 1709년 21세의 나이로 웁살라 대학을 졸업한 후, 스웨덴 광산국 기사로 근무하다가 영국 런던에서 5년 동안 뉴턴과 천문학자 할레, 수학자 라일 등을 연구하다가 귀국 한 후 스웨덴 왕립 광산 대학의 부교장이 되고 야금학(冶金學)의 권위자가 된다.
2. 스웨덴보르그의 천재성 : 1719년, 그는 귀족 칭호를 받고 귀족원의 회원도 되었으며 정계로도 진출하는 데 그가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다재다능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9개 국어를 구사하였으며 그의 책들은 주로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당시 학자들의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광물학자, 과학자, 수학자, 생리의학 연구가, 발명가로서의 삶을 산 그는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성운설(星雲說)을 발표하고 제염기(製鹽機), 피아놀라(pianola, 자동 반주기), 잠수함, 비행기(엄밀하게 말하면 지금의 글라이더에 가까운 기구) 등의 발명에도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그를 언급했고, 문호(文豪)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가 스웨덴보르그를 모델로 했다는 일화 등은 그를 더욱 유명 인사로 만든 면이 있다. 그의 책은 놀랍게도 광산과 채굴법에 대한 책만 자그마치 77종에 달하는데, 다음은 그가 1747년 과학적 연구를 완전 포기하기 이전까지 펴낸 그의 다재다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 저서 목록들이다. 그는 1747년 이후에는 과학적 연구가 아닌 영적 생활과 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3. 스웨덴보르그의 1947년 이전 주요 저서 목록 : "마음의 연구"(1714), "토양과 진흙"(1716), "화석"(1716), "입체측량"(1716), "사물의 원인"(1717), "지구의 정지"(1717), "소금의 증류"(1717), "상업과 공업"(1717), "불과 색채"(1718), "대수학"(1718), "경도의 측정"(1718), "지구의 회전"(1719), "수위"(1719), "운동과 그 본질"(1719), "용광로"(1719), "기하학 및 대수학"(1719), "열의 보존"(1722), "조류의 계산방법"(1722), "정수역학"(1722), "철의 가공에 대하여"(1723), "유황과 유황철에 대하여"(1724), "소금에 대하여"(1725), "철학과 해부학상의 잡다한 주제에 대하여"(1733), "경험적 심리학"(1733), "마음과 몸의 메커니즘"(1734), "철학과 광물학 평가, 3권", "인체"(1734), "무한과 유한"(1738), "근육의 일반론"(1740), "피부와 혀"(1740), "인쇄술"(1740), "뇌 1권~4권"(1740), "미립자론"(1740), "우주의 수학적 원리"(1740), "동물계에 나타난 경륜(1740-41)" "섬유"(1741), "생식기관에 대하여"(1743), "꿈에 대하여(1744). 그리고 이후에 쓴 중요한 책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오직 영계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와 자신의 견해를 말년에 정리한 "진정한 기독교"(Vera christiana religio, 1771)가 있다.
4. 스웨덴보르그의 신비주의 : 스웨덴보르그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천사들이 이 아이를 통해 말한다"고 할만큼 그는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재다능한 능력뿐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초자연 현상에 관심이 많던 스웨덴보르그는 급기야 50대 중반 무렵인 1743년, 예수님을 3번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때부터 자신은 천리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천국이나 영계(靈界)를 보고 왔다거나 성경 속의 많은 왕들이나 인물들의 영혼을 만나기도 하고, 화성이나 금성이나 달에도 사람이 산다고 주장(친히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 신비주의자로 흐르게 되었다. 그는 영계는 세상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며 영계의 언어와 글자에 대해서 말하는 가 하면 영계에서 만난 역사상의 인물들을 언급하고 지옥에도 한번 다녀왔다고 말하는 등 세상과 영계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48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스톡홀름의 대화재를 궤뚫어보고 정확히 묘사하거나 자신의 죽음 예고(1772. 3.29) 편지를 요한 웨슬리에게 보낸 것 또한 유명한 사건이다. 역사상 이런 인물은 어디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을만큼 전무후무한 독특한 세계에 빠졌던 개척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주관적 체험이 성경이나 기독교적 전통과는 너무 동떨어진 주장을 하여 주관적 신비주의라 하는 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도 영계의 일부이고 그는 정령과 자유자재로 대화하는 영매였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무당 유사한 체험이었다. 개인적, 학문적, 탁월함이 균형 잡힌 신앙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스웨덴보르그는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5. 스웨덴보르그의 신학적 입장 : 어릴 적부터 일찌감치 교회의 목사들과도 신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던 스웨덴보르그는 비록 정통적 신관은 아니나 성경의 신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놓지를 않았다. 현재 그의 무덤도 스웨덴 웁살라 대성당에 있을 정도이다. 이런 스웨덴보르그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신론 : 하나님은 3위(3位, three persons)가 아니며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성부)이시며 신인(神人, 성자)이시며 신적인 권능자(성령)이시다.
2)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존재이시며 신적인 존재이시다.
3) 시험과 악에 대해 :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이김으로써 지옥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우리 인간들도 악을 배격할 수 있다.
4) 성경관 및 성경 해석 : 성경은 일부만 신뢰할만하다(예를 들면 신약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따라서 성경은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인 상응(相應, correspondences)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담과 노아도 교회의 표상이다.
5) 교회론 :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1757년 이루어졌다. 즉 1757년은 지상 교회의 종말이다. 따라서 스웨덴보르그를 추종하는 스웨덴보르그주의에서는 기독교 모든 교파의 참여를 권유하면서 새 교회(the New Church) 또는 새 예루살렘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6. 나가면서 : 결론적으로 스웨덴보르그는 재능면에서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요, 영적으로는 프랑스의 점성술가 노스트라다무스와 유사한 존재요, 믿음으로는 정통을 벗어난 신비주의자가 된 사람으로 보면 맞을 듯하다. 따라서 스웨덴보르그의 천국 체험도 정통 기독교나 성경적 체험이 아닌 성경을 벗어난 개인적, 주관적, 신비 체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최근 한국교회에 온갖 신비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천국이나 지옥 체험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을 벗어난 이같은 스웨덴보르그식 체험은 결국 신앙을 자기 주관화하여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넘어서버리는 신비주의로 빠져버리게 만든다. 천국,지옥 은 그렇게 함부로 자기 주관대로 체험하고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마다 다녀왔다는 천국, 지옥 간증이 전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제각각인 것이 이들의 체험이 자기 주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천국, 지옥 체험은 괜한 환상과 불안감을 조성하여 신앙의 열심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간증자들과 목사들은 이런 측면을 노리고 이들 간증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근본적으로 스웨덴보르그식 체험은 성경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혼돈"을 조장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초월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지옥을 믿는다. 기독교에는 분명한 초월과 신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신비주의화 될 때 참된 신앙을 훼방하고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들이 활개치도록 만드는 도구가 됨을 신비주의 간증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신비와 신비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