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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강공 이상급 신도비(충북 유형문화재 63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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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선생 묘를 돌아나와서 주변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이상급이란 사람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가 볼 만하다고 한 번 가보자고 하셔서 가보았습니다. 묘역 입구 좌측편에 이상급선생의 신도비각이 있는데 마침 수리 중에 있어서 신도비의 이수 부분까지 올라가 보았습니다. 광나루가 무수히 많은 신도비를 보았습니다만, 8각의 신도비는 처음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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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신도비 전경. 팔각의 신도비가 특이합니다. |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강공 이상급(1571∼1637)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대석을 8면으로 만들었고 8면에 조각을 하였으며 6개면은 연꽃을 대칭 되는 2면에는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면은 큼직큼직한 연꽃잎 8개를 조각하고 8각 기둥형의 비를 세웠다. 한면의 길이는 26cm로 8면에 동일한 글자를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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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신도비의 이수와 받침돌 모습 |
비에 사용된 석재는 흰색의 대리석이며 이수는 4각으로 만들어 지고 비와 이수가 같은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전후면에 각각 두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 비는 형태가 특이하고 그 조각이 뛰어나며 비문은 예서체로 새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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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사당 전경 |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왕을 모셨으며, 강화도로 가던 중 적병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에 이조판서의 벼슬로 추증되었고, 순조 때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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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묘역 원경 |
▲ 문인석의 거리가 100미터는 되는 듯 합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이다. 자는 사언이며 호는 습재이고 동몽교관 희선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605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를 거쳐 형조좌랑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평안도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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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은 정방형으로 두께가 두껍습니다. |
그러나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과 뜻이 맞지 않아 승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때는 병을 빙자하여 벼슬을 그만둔 일도 있었으나 다시 형조정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이때 경상도관찰사로 정조가 임명되자 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돌아가 농사와 낚시로 소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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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묘역 |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었으나 장령·집의 등 대간으로 있을 때 직신의 기품이 있어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단천군수와 연안군수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얻고 세자 시강원의 보덕이되었다. 이어 병조참지로 있을 때 치군, 축성 등 국가방위에 공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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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묘역 전경 |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여일 동안 대결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형 상길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살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강이다.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묘소가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가 있는데 지방유형문화재 63호로 지정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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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급선생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이상급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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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치 부근에 이상급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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