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Violin Sosata in B flat major, K454
Arthur Grumiaux / violin
Clara Haskil / piano
1. Largo - Allegro
2. Andante
3. Allegretto
Violin Sonata in A major, K526
Arthur Grumiaux / violin
Clara Haskil / piano
1. Allegro molto
2. Andante
3. Presto
아르투르 그뤼미오(1921~1986)
그뤼미오의 생애
그뤼미오는 1921년 3월 21일. 벨기에의 발레르페루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할아버지 마을의 밴드 마스터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렇다 할 음악적 환경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
다. 그러나 5세때부터 2개의 막대기를 사용해 바이올린을 켜고 흉내내곤 했는데, 그 흉
내는 리듬과 활 켜는 법 등이 예사롭지 않아 곧 작은 진짜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던 할아버지에게 간단한 음계 연습을 배웠을 뿐이
지만, 반 년 쯤 지났을 땐 이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솜씨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천재적 기질을 타고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자질에 주목한 부모는 그를 사를 르 루아 음악원에 보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뤼미오의 학습속도는 너무도 빨리 진척되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분에에서 우승을 받은 그는 12세의 나이로 브뤼
셀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거기서 알프레드 뷔부아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진 아부실에게 대위법, 푸가 등 기초를 닦았다.
뒤부아는 이자이의 직계 제자인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프랑크 소나타가 남겨진
SP 음반 등을 들어보면 비록 스케일은 작지만 세련된 기품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였음 확인 할 수 있다. 그뤼미오는 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뒤, 1936년(15세)에 파리로
가서 당시에 망명해 있던 대가 조르주 에네스코에게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곧 두 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9년에 앙리 비외탕 콩쿠르와 프앙수와 프룀 콩쿠르에서 우 승했고, 이듬해엔 벨기에 정부로부터 비르투오니네 상을 수상하여 유럽 바이올린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의 데뷔 무대는 그로부터 몇 년 지난 1943년에 펼쳐졌다. 사를르 뮌 슈가 지휘하는 브뤼셀 필과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 데뷔 무대였다. 그러나 이 제 막 비상의 날개를 펼치려는 그에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라는 시련이 들이닥쳤다. 그뤼미오는 애국심 강한 사람이었다. 독일 점령 시절엔 모든 연주회를 거부했다. 이 당 시 스승인 뒤부아와 프로아르티스 현악 사중주단의 멤버로 잠시 활동한 바가 있었는데, 이 활동은 공식적인 작은 연주회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뤼미오는 활동을 재개했다. 1945년 BBC 심포니와 협연해 영국에 데뷔
했고, 같은 해 파리에서 뮌슈와 모짜르트 협주곡 3번을 협연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 다. 이로인해 그에겐 한동안 '티보의 재래'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
31세 연상인 명 연주자 자크티보(1880~1953)와 그뤼미오는 예술적 풍모에서 상당히 차
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은 현란하 기교로 청중을 정복 하려는 스타일이 아니라 긴장되고 청초한 음으로 영혼을 매혹시킨다는 점에서 티보와
동일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그뤼미오는 한동안 파리에서 활동하게 되 었다. 그러나 1949년 스승 뒤부아가 51세의 나이로 세상를 떠나게 되자 벨기에 정부와 왕립음악원은 그들의 바이올린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그뤼미오가 도와줄 것을 종용했다. 결국 약관 28세의 그뤼미오는 브뤼셀 음악원 바이올린 교수로 초빙되어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쏟게 되었다.
아르투로 그뤼미오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해지게 된 것은 1950년대 초부터 60년 사이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과 듀오로 활동하면서 부터이다. 그뤼미오와 하스킬의 만남
은 1950년, 두 사람이 프라드의 카잘스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하여 베토벤의 소나타
10번을 함께 연주한데서 시작된다. 이 때 그뤼미오는 하스킬이 가진 음악성에 깊은
영향과 일치감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27년이나 나는 차이였지만, 오히려 이 차이가 모
녀나 오누이처럼 따스하고 맑은 음악을 선사하게 만들었다. 하스킬이 세상을 떠난 후, 그뤼미오는 베이용 라크루라, 파울 크로슬리 등과 듀오를 벌였지만, 하스킬 같이 완벽한 어울림은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비올라의 쥬르쥬 얀체, 첼로의 에바 차코와 함께 그뤼 미오 3중주단을 결성하여 앙상블 활동을 벌인 일도 간과할 수 없다.
인간과 그의 음악
그뤼미오는 조용하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사생활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
으며, 애호가들 또한 그런 것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무대도 원치 않았고, 만년엔 거의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거의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도 극도로 피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외 그러냐고 질문했다. 그뤼미오는 당연하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
다. "나의 사생활은 나의 음악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내 음악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내 연주를 들으러 오거나, 내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된다. 그러니 인터뷰 할 이유가 없지 않 은가?" 그렇다고해서 그가 괴팍하다거나 외골수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뒤메이를
비롯한 브뤼셀 대학의 많은 제자와 주변인들이 그에 대해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
진 사람"임을 증거한다. 단지 그가 싫어한 것은 기자나 장사꾼처럼 음악 외적인 것으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만년에 들어선 연주 횟수를 극도로 줄이고, 교육과 레코딩만 전념했기 때문에 그의 사적인 부분은 더욱 베일에 가려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음악적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 바이 올린의 스승이라 불리는 비오티는 1780년대 파리에서 몇 명의 재능 있는 제자들을 길러냈 다. 그 중에서 바이요는 프랑스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모랭, 카페 등 프랑스계 바이올 리니스트들을 키워냈다. 로드는 베를린에서 독일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키워내는가 하면 헝가리 바이올린의 선구자자인 뵘을 길러냈다. 만하임 출신 출신의 픽시스는 프라하 음악 원의 교수가 되어 보헤미아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당시 비오티의 또 한명의 제자로 벨기에에서 건너온 로베레쉬츠는 비오티에게서 수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건너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오늘날 우리가 벨기에 알파라고 부르는 바이올린의 줄기가 이로
부터 시작한다. 그는 베리오를 길러냈고, 베리오는 비외탕으로 이어지며, 비외탕은 이자 이라는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를 탄생시켰다. 이자이가 길러낸 제자가 바로 뒤부아와 에 네스쿠였다. 따라서 뒤부아와 에네스쿠에게 배웠으며 벨기에 왕립음악원의 바이올린과를 무려 30년 이상 지켜온 그뤼미오야 말로 벨기에 악파의 적자인 셈이다.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은 예를 들면 크라이슬러나 하이페츠가 강렬한 개성으로 음악팬을 사로잡는 는 형태가 아닐지 모른다. 또 오이스트라흐나 스턴처럼 그 포용력과 친화력에서 대다수 의 음악팬을 만족시티는 타입의 연주가도 아닐 것이다. 그뤼미오는 우선, 누구나가 인정 하는 아름다운 음의 소유자였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에 음량, 음색에 있어서도 그는 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표출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음양은 항상 적은 듯하게, 음 색은 긴장시켜서, 그리고 쓸데없는 정감의 과잉에 빠져들지 않도록 절도있게 연주한다.
세련된 절도의 미는 결코 금욕적이거나 단조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뉘앙스, 극히 섬세하면서도 단아한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한 테크닉과 리듬감을 바 탕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간혹 그는 고운 음색으로 인해 낭만주의자나 서정주의 자로 분류되는데, 이 점은 분명 오류다. 그뤼미오는 오히려 구시대의 낭만주의적 대가들 에게서 볼 수 있던 템포 루바토, 포르타멘토, 그 밖에 장식을 잘라내는 편이었다.(그렇다 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번성했던 즉물주의적 연주가들의 무리와 같은 것은 아니었 다) 따라서 그의 서정주의는 음밀하게 말하자면 '로코코적 유사 서정주의'다. 그의 서정 은 센티멘털한 것이 아니라 상처입기 쉬울 정도로 섬세한 것이었다. 참고로 그뤼미오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애용했는데, 레코딩에는 주로 '타이탄'이라는 이름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그러나 큰서트에선 '엘스 헬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744년
과리넬리 델 제수를 사용했다. 또는 그는 활을 조금 느슨하게 쓰는 편이었다고 한다.
우아하고 맑은 음색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14세부터 21세가 될 때까지 거의 매일 그뤼미오의 지도를 받은 바 있는 직계 제자 오귀스탱 뒤메이는 그뤼미오가 제자들 에게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이 말이었다고 한다. "악보 가운데 한 음부터라도 사소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본인소장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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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