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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경 송
유교사회이인 조선시대의 역사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성리학 대가(大家)이며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었던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에 의해 조선 유학(儒學)이 최고봉에 도달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 건국(建國)의 사상적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性理學)은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 이론에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었는데, 이황(李滉) 이이(李珥)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영남학파)와 ‘율곡’학파(기호학파)가 형성되었다. 동 · 서 붕당(朋黨)시기 동인(東人)에 속한 주리파(主理派) 이황은 도덕적 신념을 중시한 반면, 서인(西人)이며 주기파(主氣派)로서 이이는 현실문제와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학파의 대립과 더불어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 성리학의 학문 · 사상을 최고의 경지로 이끌어 한 세기를 풍미한 조선 중기의 대학자들이다.
이황(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문신 · 학자 · 사상가이다. 생전에 사용한 호는 퇴계(退溪) · 도수(陶叟) · 퇴도(退陶) ·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 있다. 후세들은 보통 퇴계 이황이라고 부른다. 퇴계 이황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자식 교육에 소홀함이 없었던 어머니 춘천박씨의 노력으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중종 29년(1534) 34세에 관직에 오른 후 그 관직이 대사성(大司成){성균관 책임자, 정3품, 현 대학총장에 해당함}에 이르렀으나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이기(李芑)에 의해 삭직 당했다. 선조 2년(1569) 대제학(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의 으뜸 벼슬, ‘황제의 고문’)직을 은퇴한 후 고향 예안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해자인 이황에게는 훈구파에 대응하기 위해 성리학적 도덕 정치를 강조할 필요성이 더 많았다. 박식하고 겸허한 성격의 학자로 중종, 명종, 선조의 중용과 존경을 받았다.
이황(李滉)은 성(誠)을 기본으로 일생 동안 경(敬)을 실천하고 조목을 다져 깊은 연구 및 통찰함을 학문의 기본자세로 했다. 그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주자(朱子)의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우주 생성의 원리와 연계하여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성질에서 본연의 성(性)과 기질의 성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사단(四端)은 이(理)가 먼저 움직여(발/發) 기(氣)가 따르는(수/隨) 것이며, 칠정(七情)은 기가 먼저 움직여(발/發) 이가 이에 타는(승/乘) 것이라고 하였다. 뒷날 이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라고 하였는데, [이기호발설]을 핵심으로, [4단 7정]에 관하여 기대승(奇大升)과 8년 간 논쟁하였다. 이황은 [영남학파]의 우두머리로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제자들을 배출했다. 이황은 주리론의 성리설(性理說)을 폈던 대표자로서 백운동 서원(書院)을 소수 서원으로 사액 서원(書院)화하였고, 고향인 예안에 칩거할 때 예안 향악을 시행하였으며, 본인이 직접 창설한 도산 서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황이 주장한 것은 [이기 이원론]이다. 주자(朱子)는 구체적인 사물에서는 이(理)와 기(氣)가 분리되지 않지만, 사물이 생성되는 근원을 캐어 보면, 먼저 이(理)가 있은 다음에 기(氣)가 있는 것으로 이(理)와 기(氣)가 섞일 수 없다고 하여, 이(理)가 우선된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발전시켰는데, 이(理)와 기(氣)가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이(理)를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중시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자성록(自省錄), 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 주서기의(朱書記疑),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疑), 등이 퇴계전서(退溪全書)에 전한다. 이황은 많은 저술을 통하여 주자의 학설을 계승 · 발전시켜 <동방의 주자>라 불렸으며, 그의 사상은 임진왜란 후 日本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황은 시문(詩文)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나 시조에 도산 12곡(陶山12曲), 글씨에 퇴계 필적(退溪筆迹)이 있다.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시대의 학자 · 문신 · 정치가이다. 자는 율곡(栗谷), 숙헌(俶獻)이며, 사용한 호는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흔히 율곡 이이라고 호칭한다.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에게 학문을 배웠다. 19세에 성혼(成渾)과 교유하였으며, 한때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다가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심하였다. 23세에 이황(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논의하였으며, 대선배 이황으로부터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이후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하였다. 선조 16년(1583) 동, 서/붕당의 갈등을 중간에서 조정하려다가 오히려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율곡 이이는 16세기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이는 이황보다 후기의 인물로 사림(士林)의 세력이 보다 안정된 때에 활동하였으므로 이황의 사상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켜 현실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원론적 이기이원론(一元論的 理氣二元論)에 입각한 주기파(主氣派)의 완성자로서 이황과 함께 조선 유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또한 [기호학파]의 조종(祖宗)으로서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이귀(李貴) 등의 문인을 배출했다.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동시에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여 주기 철학을 집대성했다. 현직기간 이이는 정치, 경제, 국방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붕당(朋黨)간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노력했고, 사림(士林)의 사상과 주장을 집대성하였으며, 또한 외향적인 사회 현상에 관심을 두어 그의 사상은 실학(實學)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에 반대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사상의 차이가 붕당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이이(李珥)가 주장한 학문은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이다. 주자(朱子)나 이황과 같이 이(理)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원론, 이(理)는 움직임(동정/動靜)이 없는 것으로, 현상의 변화는 오직 기(氣)의 움직임에 따라 이루어지며(일원론적), 이(理)는 이러한 기(氣)의 작용에 내재하는 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기발이승(氣發理乘)].
그는 만년에 서원(書院) 향약, 해주 향약 등을 실시했으며,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또한 이이는 29세에 관직에 들어가 그 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47세에 이조판서(정2품, 현 국방부장에 해당함)에 임명되어, 주변 국가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으로 <십만 양병>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주요저서(著書)로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인일기(經筵日記) 등이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수록 되어 있고,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는 10만양병설을, <동호문답>에서는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시호가 문성(文成)인 이이는 광해군 3년(1611)에 시문집으로 율곡집(栗谷集)이 간행되었고, 영조 18년(1742) <율곡전서>가 간행되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16세기) 성리학의 양대 거장이었고,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조종(祖宗)인 그들의 성리학 사상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상호보완은 당시 조선시대 유학의 발전을 최고의 경지로 이끌었던 것이다. 젊어서 유학을 전공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간 그들은 당시 조정의 중용을 받아 벼슬이 모두 정2품(대제학/이조판서, 현 장관급)에 이르렀으며, 16세기 조선왕조의 사상이념과 정치제도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황의 [이기 이원론적 주리론(主理論)]과 [이기호발설]이 임진왜란 후 일본 성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면, 이이의 [이기 일원론적 주기론(主氣論)]과 [이통기국(理通氣局)론]은 실학(實學)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관직에 미련을 버린 두 사람은 만년에 여러 차례의 벼슬의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각자 고향에 서원(書院)을 창설하고 학문과 교육에 정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많은 유명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사후(死後), 두 사람 모두 유교 이념의 전당(殿堂)인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들에 대한 ‘우열’(優劣)을 따지기에 앞서 그들은 모두 위대한 삶을 산 동시대 대학자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 정치 · 사상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대가로서 조선시대 유교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아울러 학문과 정계에서 모두 ‘성공’한 조선 중기의 위인(偉人)들이었다. 또한 그들이 삶에 대한 태도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역시 달랐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방식에 따라 후세가 위인(偉人)들에 대한 평가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 생전에 많은 노비와 여러 채의 가사(家舍), 수천 두락의 전답을 소유했던 이황(李滉)에 비해, 죽을 때까지 재산 한 푼 없이 청렴한 일생을 살아온 이이(李珥)는 이황의 성리학 사상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성리학)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켰고, 또한 다양한 사상 연구를 진행, 사회문제에 대한 명철한 분석을 통해 다방면의 현실적 개혁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성리학의 유종(儒宗)이라고 불리는 대선배 이황(李滉)에 비해 훨씬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한국 화폐, 세종대왕(만원)에 이어서 ‘서열 2위’로 [5천원 지폐]에 모셔져 있는지도 모른다(이황/천원). 즉 후배가 선배를 ‘초월’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바람직한 케이스(事例)라고 사료된다.
필자의 소견이지만, 경상도 출신이며 ‘실리’형의 학자이었던 이황(李滉)이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학문에 더욱 전념한 것은 그의 정직한 인품과 다소 ‘우직’(愚直)하고 고집스러운 ‘학자’형 스타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반면 ‘수도권’ 출신인 이이(李珥)는 세속에 밝고 처세술에 강한 ‘관리’형 스타일의 정치가로서 그가 후세에 더 이름을 남긴 것은 학문과 사상을 현실에 접목시켜 개혁 주장과 민생 질고를 살핀 <청렴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 아닌 가고 생각한다. 한편 학문에 치중하면서 여유 있는 인생을 산 ‘장수’(長壽, 70세) 학자 이황(李滉)에 비해, 정치적으로 더욱 명성을 떨친 ‘관료’ 학자 이이(李珥)는 빈고(貧苦)하고 청렴한 인생을 살았지만, 국력 강화를 위한 개혁과 민생을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한 끝에 49세의 중년의 한창나이에 애석(哀惜)하게 일생을 마쳤다.
-2006년 4월 20일
첫댓글 좋은 연구로 우리를 밝게 해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자세히 읽고 답글로 예를 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