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는 '백제의 계림'이다. '백제의 경주'라고 하지 않고 '백제의 계림'이라고 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서라벌 또는 계림이었던 신라의 서울이 '경주'라는 새 이름을 얻은 때는 935년(고려 태조 18)이지만, 부여는 삼국 시대에도 '부여'였고 지금도 '부여'이기 때문이다.
538년부터 660년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서울'이었던 부여는 읍내 입구의 121m 얕은 산에 사적 14호인 백제 고분들을 가지런히 깔아놓고서 손님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 산에는 '능산'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고분들은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려진다. 부여군이 제작한 관광홍보 소책자의 표현처럼,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여행의 시작'을 우아하게 '시작'할 수 있는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능산리 고분군
묘역 일대의 16기 무덤 중 사적에 포함된 것은 7기뿐이지만, 이곳 고분군은 관산성 전투에서 패사한 성왕과 그의 아들 위덕왕 등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사적이기 때문에 답사자는 문득 애잔해진다. 특히 근래에 조성된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는 그런 기분을 더욱 세차게 북돋운다.
고분군을 지나면 금세 부여 읍내의 번화가가 펼쳐진다. 부여 읍내의 지형을 대략 세모꼴로 보면, 꼭대기 정점이 낙화암이고 하변의 중앙쯤이 궁남지다. 서쪽은 백마강이 유유히 흘러 천연 해자 역할을 한다. 정림사지 5층석탑과 부여박물관은 이 모든 것들의 중간쯤에 있다고 보면 된다.
부여 답사는 궁남지부터 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 여정을 백마강 뱃놀이로 잡으려는 계획이다. 출렁이는 노을빛 물결을 타고 버들잎처럼 흘러가는 뱃전에 올라 황혼에 붉게 물든 백마강의 미학을 즐기는 여유 정도는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 궁남지
궁남지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인조 연못이다. 634년(무왕 35)에 조성되었으며 국가사적 135호이다. 부여군은 이 연못에 서동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뒷날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궁남지에서 시내로 들어서면 정림사터 5층석탑이 단아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가 8.33m나 되어 아파트로 치면 3∼4층에 이르는데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깔끔하면서도 다정한 것이 일견 기이하게 느껴지는 탑이다. 품위와 교양을 갖춘 훤칠한 중년 남자가 격식에 맞게 정장을 차려입고 손님을 기다리는 듯한 품새다.
정림사 5층석탑은 주위에 아무런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있다. 졸부나 치졸한 권력자들 옆에는 으레 굽신거리는 작자들이 잡초처럼 돋아있는 게 상례인데, 그는 온갖 너절한 것들을 다 물리친 채 홀로 고결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고고한 양 허세를 떨지도 않는다. 예로부터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이는 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국보 9호로 지정되었다. 정림사터도 국가지정 사적 301호이다.
'백제의 서울'을 상징하는 정림사 5층탑
부여는 백제의 서울이었다. 그러나 낙화암, 부소산성, 궁남지, 백마강 등 이야기가 서린 역사의 흔적은 곳곳에 많지만 1400년 이상 2000년 전의 그 날을 증언해내는 유적 자체는 거의 없다. 오로지 정림사터 5층석탑이 유일한 형편이다.
모습도 온전하다. 백제가 남긴 위대한 두 탑 중 하나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은 이래저래 부러지고 떨어져나간 상처투성이의 몸을 보여주지만, 정림사터 5층석탑은 고스란히 말끔하다. 경주 불국사와 다보탑 석가탑, 그리고 석굴암과 황룡사 9층목탑을 만든 이도 백제 사람이지만, 이 정림사탑 역시 이토록 규모가 큰 탑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저 감탄에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그러나 이 탑에도 깊이 속살까지 피를 흘린 상처는 남아 있다. 무심코 보고 지나가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 참혹한 흔적을 확인하고 나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갈파한 조선 시대 문장가 유한준의 말이 참으로 진리라는 실감을 가슴 아프게 느끼게 된다.
탑의 1층 탑신부에 '大唐平濟國碑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큰[大] 당(唐)나라의 소열이 백제국(濟國)을 평(平)정하고 나서 비(碑)에 새긴 글씨[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소열은 이 탑에다 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 어찌 처절한 피투성이의 상처가 아니랴. 소열의 무식이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고 만 것이다.
게다가 1942년 절터를 발굴하여 이곳이 본래 정림사(定林寺)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속 탑을 '평제탑'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이가 없지만, 정림사탑에 혼이 있어 그 사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한동안은 분노에 못 이겨 우리에게 매질이라도 했으리라.
나라는 망했지만 정신이 남아 있는 곳, 부여
그래도 답사자는 탑 앞에서 마음이 흐뭇하다. 지금까지 본 경주 감은사지 동서 쌍탑(국보 112호)은 물론이고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보다도 더 뛰어난 작품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은사탑은 장중하면서도 견실하지만 정림사탑에 견줘 미적으로 깔끔한 맛이 덜하고, 다보탑은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품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정림사탑에 비하면 견실한 남성미는 모자란다. 석가탑 역시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최고의 석탑이지만 정림사탑의 굵으면서도 고운 선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한다. 게다가 정림사탑은 682년(신문왕 2년)의 감은사탑과 751년(경덕왕 10년)의 다보탑 및 석가탑보다 세워진 때도 이르다.
신동엽은 '금강, / 옛부터 이곳은 모여 / 썩는 곳, / 망하고, 대신 /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이곳 정림사탑 앞에 서면 민요가 된다. 모든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정신이 된다.
아, 백제여! 백제의 혼이여! 온몸 가득 당나라 군사가 불지른 흔적을 안고서도, 나라가 망한 치욕의 글자까지 새겨진 상처투성이 몸으로도 1400년 긴 세월을 버티고 살아남아 우리에게 정치와 역사의 교훈을 남겨주는 탑이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