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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
【함석헌 咸錫憲〔1998 ~ 2005〕】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명은 언제나 자아를 찾음으로써 자신을 창조해낸다. 이를 두고 함석헌은 “사랑하는 벗들아, 나는 너희를 만나기를 참 바라고 기다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의 부름은 언제나 자아에게는 새롭고 놀라운 일이다. 인격은 자아를 가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는 생명을 가졌지만, 나는 언제나 놀라움과 경이 속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내가 너희를 이렇게 부르면 적지않이 놀랄 줄을 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너는 모르리라만은 나는 너희를 늘 지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또 생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젊음아 네 더운 가슴 나를 열어주렴아”
생은 자신을 온전히 피워낼 “바위 같은 혼”을 기다린다. 생이 진정 원하는 바는 곧 저항이다. 함석헌에게 생명이란 곧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는 전장터에 비유한다. 진정 생과의 만남을 이룬 혼(자아)은 자신과 자신을 비롯한 이웃들을 싸움터로 몰아낸다.
“그래도 하나 둘 쯤은 버티고 서는 바위 같은 혼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위에 앉아, 우리가 저 말없는 친구들을 동무하여 사는 동안에, 구름 위에 솟은 바위로부터 내리부는 하늘바람에서 배운 곡조를 아뢰어, 이 동산의 구석구석으로 보내어, 거기 눕던 지친 혼들을 불러 새 싸움터로 내보낼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생은 늙은 버드나무다. 자아는 흘러가는 문화의 흐름이다. 생명은 결국 정신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생명, 전체는 그렇게 자아가 전체를 드러내줄 것을 언제나 기대한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서 있는 늙은 버드나무 모양으로 이 흘러가는 문화의 흐름을 들여다보며 그 언덕 위에 서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은 내 그림자가 아니고 너희 모양이다. 그런 줄이나 알아라. 너희밖에 또 내 마음을 둘 곳이 어디냐?”
하지만 생은 결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켜보고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 생명은 결국 정신이 생각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이성이 갈 곳 까지 간 후”에야 자아에게 열린다. 정신이 생명을 품을 만큼 깊어지지 않고서, 생명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함석헌은 이를 부끄럼으로 표현하는데, 부끄러움이란 곧 자기상실의 징후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과 합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죄란 부끄러움이다. 이 점에서 생명이란 실은 영원히 온전히 자아와 합치할 수 없음을 제 운명으로 가진 부끄러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석헌에게 부끄럼이란 부끄럼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부끄럼이 곧 그의 자존심이었다. 부끄럼이야말로 나의 자유함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얼이 빠져 해가 저물도록 서면 섰지, 밤이 다 깊도록 기다리면 기다렸지, 결코 내가 너희께 가지는 않는다. 나는 자존심이 많은 사람이다. 자존심이라기보다 부끄럼이 많다. 아니다, 부끄럼이 자존심이지 뭐냐? 부끄럼 다 팔아먹은 너희는 자존심도 없느니라. 하여간 너희가 나를 더럽다 보는 날까지는, 즉, 들 냄새를 싫어하는 때까지는 나는 가지 않는다. 흙 냄새를 향기롮다 맡으리만큼 너희는 코가 낮아지고, 눈서리에 찢긴 나무통 같은 나를 안으리만큼 너희 가슴이 넓어지지 않다면 나는 너희에게 결단코 가지 않는다. 너희 마음을 차지하잔, 차지함으로 기르잔 내 마음이기 때문에.”
생명 전체를 안음이란 곧 그 모순을, 그 죄를 떠안는 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나’를 품기 위해서 ‘너희’, 자아는 한없이 낮아지고 자신이 가진 도덕 허영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너희’가 자신을 내려놓고 ‘나’를 품고 차지할 때, ‘나’는 ‘너희’ 마음을 길러낸다. 함석헌에게 생명이란 영원히 자라나는 것이었고, 자아는 그런 생명을 품음으로써 성숙한다.
자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자기발견이란 이미 알고 있는 자기를 재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 자기를 말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모르게 찾아온다. 이해할 수 없는 무엇 앞에서 매혹되어 그 기호를 해석하려는 것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나의 사유에 상처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사랑을 두고 단순한 인식이 아닌, 해석되어야할 기호를 마주치는 행위로 묘사한다. 그에게 기호signe란 사유에 “상처를 줌으로써 사유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엇 앞에 정신은 상처받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세계 안에는 우리가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 어떤 것은 재인식recognitionml 대상이 아니라, 근본적인 ‘우연한 마주침recontre’의 대상이다. … 그것은 감정적인 색조, 즉 놀라움, 사랑, 증오, 고통 속에서 포착된다. … 그 어떤 것이란 … 기호이다.”(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사랑이란 수동적으로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이따금 우리는 세계를 살아가다,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어떤 것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 마주침으로부터 나는 ‘새로운 나’이길 시작한다. 이 우연한 마주침이야말로 진리가,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며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 거듭난다. 진리는 그렇게 주체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기인하기보다, 기호에 내재된 폭력이 우리 정신에 상처를 입혔을 때 그 기호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해독해내기 위해 비로소 수동적으로 시작되는 활동이었다. 이점에서도 함석헌은 “너희가 나를 불렀다. 너희도 모르게 불렀지”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나’와 ‘너희’가 단절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서로 다른 성격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으로 말하자면 우리 인격 안에 서로 다른 성격이 모순적으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그 까닭에 대해서 함석헌은 말하지 않는다. 실은 까닭이 없다. 그저 그런 것이다. 다만 “너희와 나 사이에는 알지 못하는 손이 있어 줄을 매어 끄는 줄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알게 된 계기는 바로 그 줄을 연결해 자기 안에 전체를 품어 아름답게 표현해낸 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혁명에서도 말했듯, 삶이란 오직 삶으로만 감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들사람이란 뒤에서 ‘예수’로 말해진다.
“너희를 알뜰이 생각하는 너희 동무가, 이미 이 들사람의 노래에 취한 이가 있어 이것을 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너희도 이 들사람의 벗이 되기를 바라서다.”
하지만 ‘나’와 ‘너희’가 만남을 이루어도, 나는 나고 너희는 너희다. 그 자기거리는 극복될 수 없는 무엇이다. 조화이면서도 부조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롭기를 그치질 않는다. 아름다움은 다른 데 아니라 거기에 있다.
“그러나 너희와 나는 만나기는 했으나 적어도 겉모양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들의 사람이요, 너희는 어디까지나 문화의 사람이다. 나는 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새 중에서도 기러기를, 나무 중에서도 전나무를 좋아하는데, 너희는 다듬은 화강암의 전당에, 문화의 장식 속에, 자연의 소리가 아니고 일부러 꾸며서 하는 노래에 취하고 있다. 너희는 여자 중에서도 처녀요, 나는 남자 중에서도 귀 밑에 흰 털이 날리는 사람이다. 너희를 한마디로 아름답다면, 나는 한마디로 추하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극단의 대조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비극성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극이 슬픔의 자기반성이라면, 슬픔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다. 정신의 크기와 깊이는 고통의 크기, 슬픔의 깊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기쁨과 도취 앞에서 정신은 그 크기와 깊이를 보이지 못한다. 오직 정신은 자신의 한계와 마주할 때 보이는 태도로써 자신의 성숙함을 증명해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두고 “비극은 크기를 가진 고귀하고 완전한 행동의 모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마주했던 장애물이란 죽음과 운명이었다. 그것들은 삶과 자유로운 정신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과 운명은 삶에서 제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애물이다. 제거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운명 앞에서 정신은 고통 받는다. 그러나 고통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굴복하지 않을 때, 정신은 자신의 숭고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함석헌 또한 비극을 두고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 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자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 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노력은 정신의 크기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함석헌에게 이 행위는 단순히 고립된 ‘나’의 정신의 크기를 드러내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에게 모순으로서의 인격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아를 내려놓고 전체와 하나 되려는 인간 정신은 그 자체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아름다움은 곧 선함, 즉 너 나 갈라 생각하지 않고 “너도 나라” 생각하는 선함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담 비극이란 곧 ‘나’와 ‘너희’의 따로 있음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함께 있으려함’에 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이란 곧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아름답게 해주는 관계가 그 본질이다. “서로서로는 저 때문만이 아니고 남 때문에 아름다워 진다.” 이처럼 보편으로서의 생의 자리에서 보자면, 미움이란 사랑의 부족의 다른 말이다. ‘나’와 ‘너희’ 사이에 있는 “메꾸지 못하는 골짜기”로 말미암아 생기는 분함과 슬픔이 곧 미움이라는 감정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미움을 극복하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슬픔을 정신이 희망으로 승화시켜 혼을 살려냄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역시 정신의 성숙을 요하는 일이다. 한용운의 말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나’와 ‘자아 나’ 사이의 근원적 거리에서 오는 슬픔에 굴하지 아니하고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中)
이처럼 정신이 자기 속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의 길로 다시-나서게 된다. 함석헌 또한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밉게 생긴 늙은 솔인 양, 나의 슬픔을 이 맑고도 향기로운 가을바람에 부쳐 너희[자아] 위에 퍼부으리라. 그렇다, 퍼부을 것이다. 아낌없이 퍼부어 너희 가엾은 혼을 진동시키고야 말리라.”
자아가 자기 내의 근원적 모순(죄)을 회피하지 않을 때, 자아(너희)는 하나님 나(‘나’)와 만남을 이룬다. 이때의 만남을 함석헌은 자아를 내려놓는 모양새로 표현한다. 곳곳에서 함석헌은 “크게 한 번 버리는 경험”이 중요함을 말한다. 이를 그는 여기서는 “사랑하는 벗들아,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라고 말한다. ‘나’와 ‘너희’는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가 제 모습을 어느 정도 버려야 한다. ‘나’와 ‘너희’ 사이에는 “은하수 양쪽의 견우 직녀”와 같이 “막힌 것, 떨어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해놓은 무장을 먼저 풀어버려야, 또 “껍질을 벗어야”만 둘은 만날 수 있다. 자아의 자리에 있는 ‘너희’가 버려야 할 것은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나’라 하는 생각이다. ‘나’와 ‘너’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는 허영심이다. 생의 자리에서는 나도 너도 없다. 보편의 자리이자 전체의 자리이다. 함석헌은 이를 수박껍질과 붉은 속으로 비유하는데, 이윽고 그는 자아 ‘너희’에게 적나라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뜨거운 피 뛰는 심장을 내놔야지. 그리하여 그 심장의 육비에 금강석 촉으로 폭폭 박히도록 써야지.”
피 뛰는 심장을 내 놓으라하는 말은 ‘자아’에서 한 번 더 속에 있는 생명 그것을 내 놓으란 말이다. 그런데 그 심장의 살가죽(육비)에다가 “금강석 촉으로 폭폭 박히도록” 쓰자고 말한다. 앞에서 함석헌은 ‘너희’를 “다듬은 화강암의 전당”으로 비유하였다. 화강암은 화산이 넘쳐 만들어진 것으로, 단단하면서도 부서질 수 있는 돌이다. 반면 금강석은 흔히 말하는 다이아몬드로 가장 단단한 물질이다. 함석헌은 자아가 생의 자리에 닿아 그 자리에서 틀을 짤 때를 절대의 단단함을 상징하는 금강석으로, 자아의 자리에서 짜는 틀은 화강암으로 은연중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피 뛰는 심장의 살가죽에 쓰이는 말은 화강암이 아니라 금강석이다. 자아는 백번이고 깨지고 새로 형성되지만 하나님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나다.
아름다움이란 생기生機하는 것, 틀을 짜고 옷을 입는 것으로 비유되는 자아의 종합·해석·조화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어려운 것은 “가리우고 꾸미는 옷을 벗어야”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다시 “옷을 입어야”하는 것이 참 아름다움인 저이다. 이때 꾸미는 옷이란 자아가 제 자신에 갇혀버리고 허영심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생의 자리에서 비추어 다시- 나와 너희가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그 조화는 완전치 않다. 여전히 빠져나가는 ‘나’가 있으며, ‘나’는 또 영원히 자라고 달라지기 때문에 옷이란 자꾸 자꾸 갈아입어야하는 것이다. 유의해야할 것은 우리가 다시-입을 때 그 옷 입음은 개체가 전체를 나타냄이라는 점이다. 이를 걱정하여 함석헌은, “사람이란 잘못이라, 옳은 일 중에도 잘못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생각 없이 본능 충동에만 따라 노는 동안에 옷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온통이 껍데기를 씌우는 옷으로만 되어버리고 만다.”라고 말한다. 개체가 전체를 나타내는 것, 그 모순을 자기 속에 드러내 보이는 것, 그렇게 예수와 전태일처럼 자기 안에 전체를 품음으로 죽어버려 사는 모양새, 그것이 정말 아름다움이다. 그점에서 아름다움이란 개체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전체와의 산 관련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서로에 의존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믿음이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뭐냐? 아름답다는 것은 앎답다. 남이 알아줄 만큼 값이 있단 말이다. … 첫째 알아야 할 것은 아름다움은 하나를 나타냄이라는 것이다. … 아름다움은 그 내용 되는 자료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나타내는 방법에 있다. 조화에 있다. 조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됨이다. 전체의 각 부분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다. 조화의 화는 하나됨이다.”
2.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하여
함석헌에게 아름다움은 조화였다. 이때의 조화란 단순히 내 앞의 시계가 조화를 이루어 시계로서의 역할을 해낸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거기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부분들이 따로 떨어져 놓여있을 때보다, 시계의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어 시계라는 하나를 표현해낼 때 더 아름답다. 그러나 참 아름다움이란 사물적 객체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배경에 있다고 함석헌은 말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전체란 사회, 나아가 역사였는데, 그리하여 함석헌에게는 전체와의 조화, 역사와의 조화야말로 우리에게 참 아름다움이었다.
그렇다면 조화란 무엇인가? 조화란 하나됨인데, 이는 내용의 하나됨이 아니라 하나 되도록 나타내는 표현에 있어서의 하나됨이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되게 하는 방법이 곧 아름다움이다. 미(美)적 판단에 있어서 ‘조화’는 서구 미학에서도 전통적으로 본질적인 내용이었다. 가령 플라톤은 비례의 개념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했다. 그는 미의 본질을 다섯 가지 척도로 규정하였는데, 질서(order), 척도(measure), 비율(proportion), 일치(consonance), 조화(harmoney)가 그것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부분들 간의 적절한 배열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표현해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만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측정과 비율을 미의 핵심으로 보았다.
한편 칸트에게서도 아름다움이란 곧 조화에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취미판단은 인식판단과는 엄밀히 다르다. 인식판단이 보편적·객관적인데 반해, 취미판단은 주관적인 쾌의 감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관적 쾌라고 하여 그것이 단순히 서로 다른 개개인들의 취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칸트에게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주관적 쾌의 감정이란 다른 게 아니라 “조화에서의 쾌의 감정”, 혹은 “일치의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칸트에게서 미적 감각은 감각기관의 자극으로부터 오는 단순한 쾌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능력들, 특히 상상력과 오성 사이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종류의 쾌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생각의 제한없는 자유로운 흐름이요 오성이란 종합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조화와 일치 속에서 아름다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칸트의 대답은 ‘자유’였다. 칸트는 미적 조화에서의 인식작용을 단순한 인식판단과 구분지어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라고 불렀다. 부연하자면, 누군가는 쌀을 두고 “이것은 쌀이다”라는 인식판단을 하는데, 이러한 판단에 아름다움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쌀을 보고 “한없이 많은 흰 이들로, 쌀은 누구에게 미소 지을까?”(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쌀을 얹히는 과정에서 부처의 좌선을 떠올리며 노래한다. 이러한 종합에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생각이 자유롭게 상상력과 오성을 조화시켜 만들어낸 유희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경우를 두고 “인식능력들을 특정한 규칙에 따르도록 하지 않은 경우”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조화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오성에 의해 종합될 때, 우리는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생각하면 누가 쌀과 이를, 그리고 부처의 좌선을 조화시킬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 조화될 때,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조화라고 하는데 서로 이견이 없을지라도, 함석헌과 서양의 미에 대한 판단에는 차이가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해 위와 같이 말하면서, 결국 아름다움의 근거는 주체의 의식에 있지 않고 “대상의 형식”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 까닭은 나의 상상력과 오성을 자극하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모든 대상에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칸트에게 아름다움이란 대상에게, 즉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대상”의 문제로 귀결된다. 반면 함석헌은 대상도, 주체도 아닌 배경에 주목한다.
“그러나 어울림, 하나됨 중에서도 더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배경과의 어울림이다. … 그러고 보면 들국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배경에 있다. … 장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거든 장엄한 배경이 있어야 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보려면 그윽한 배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배경이란 소위 환경이다. 대상을 두고 아름답다 할 때에, 그 아름다움의 본질은 대상의 내용보다도 그 대상이 어떤 환경 속에서의 대상인지에 달렸다. 들국화가 어떤 환경에서의 들국화인지에 따라 들국화가 피어내는 아름다움은 전연 다른 일이 된다. 배경은 그 본질에서 전체를 가리킨다. 시침에게는 그 시침이 놓이는 시계판이 배경이겠으나, 결국 그 시계판의 배경은 또 시계가 놓여 있는 공간일 것이며,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참 배경은 무한의 전체다. 함석헌은 사회나 역사까지도 온 우주라는 무한 배경에 비하면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배경 중에 가장 큰 것은 사회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큰 배경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온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야 정말 아름다운 살림이다.”
무한의 전체에는 바깥이 없다. 사람은 무한을 잡을 수는 없으면서도, 무한과 영원을 찾는 존재다. 바로 이런 전체의 자리가 함석헌에게는 내 속의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내 속의 사랑은 오직 역사라는 배경을 통해서만 그러난다는 것이다. 전체를 뺀 개체는 없으며, 개체는 오직 전체 속에서만 자신을 온전히 발견한다. 사람에 있어서는 개체가 인간 삶이고, 배경이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인데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은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식물 생활의 근본이 되는 땅이 흙과 물의 합한 것이듯이, 인간 생활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인생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의 둘로 되어 있다. 물 없는 흙 없고 흙을 떠난 물 없듯이,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을 내논 역사도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두 대립하는 면으로 되어 있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여기서부터 우리 살림의 두 원칙인 개인적 생활 체험과 세계적 역사 이해가 나온다. 생활 체험이란 것은 개인이 자기의 존재를 한 개 저만으로, 값을 가지는 인격적인 것으로 알고 파 들어가고, 붙잡고, 나타내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요, 역사 이해라는 것은 자기를 뜻있는 발전으로 보는 세계의 체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보고 들여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그 숲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하나는 영․육을 갖추고 지․정․의의 활동을 하는 한 개 사람으로, 나서 자라고 죽는 누구나 다 같이 걷는 인생로를 걷는, 일생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현실의 인간으로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기 존재의 배경이 되고, 생활의 근원이 되고 활동의 터전이 되고, 정신의 교섭자가 되는 이 세계를 영원에서 흘러나와 영원으로 흘러드는 이 생명 행렬을 의미적으로 파악하는 정신으로서 하는 일이다. 먼저 것은 나를 나대로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들여다보고 깊이 파자는 것이요. 뒤의 것은 세계를 그 광대무변하고 유구무한한 변천에서 붙잡고 하나를 얻자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라면, 저것은 나 속에서 전체를 봄이다.
하나를 주관적 이라면 하나는 객관적이다. 주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고서야 살림에 심각미가 있고 열정력이 있고 자유가 있다. 객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고서야 호대성(浩大性)을 띠고 엄숙미를 갖고 권위가 선다. 이들이 합하여서 산 믿음이 생긴다. 자아에 철저하지 못한 믿음은 돌짝 밭에 떨어진 씨요, 역사의 이해 없는 믿음은 가시덤불에 난 곡식이다.”
하지만 전체를 배경으로 갖는다고 해서, 전체를 배경으로 드러나는 개체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함석헌은 배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개체 자체 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장엄한 배경을 드러내려거든 장엄한 배경이 있어야 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보려면 그윽한 배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도덕정신, 그보다도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이 없다면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들국이 아름답고 기러기가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도덕성 종교성 때문이다. 하나란 그것이다. 남들이 무슨 옷을 입었나, 무슨 양산을 들고 무슨 가방을 팔에 걸었나 그것에만 정신을 쓰는 이 사람들아, 그렇지 않은가? 너희는 거울 앞이나 쇼윈도우 앞에만 서려 하지만 말고 천지 앞에 하나님 앞에 서보려 하면 어떠냐?”
그런데 왜 배경보다 요구되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도덕정신”과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인 것인가? 플라톤의 측정과 비율의 조화, 키케로의 어울림(decorum), 칸트의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적절한 대상과 같이 조화로움이 문제가 아니라, 왜 도덕성 종교성이 아름다움의 본질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미루고서는 우리는 함석헌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함석헌은 여기에 자세한 부연설명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하나란 그것이다.”
3. 개체와 하나
하나란 그것, 곧 도덕성·종교성이다. 이때의 도덕과 종교는 흔한 의미에서의 규범이나 제도 위에 형성된 종교가 아닌, “우리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도덕성 종교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함석헌은 도덕성·종교성에서 인간이 전체와의 하나됨을 추구할 가능성을 찾는다.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두고 “은총의 하나님”이라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우주 과정의 뒤에 있어서, 그 흐름의 밑에 있어서, 그 생명의 속에 있어서, 자기 몸속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하여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 이”로 설명한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그저 주는 이, 자기를 한없이 주는 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함석헌은 하나님의 원리를 두고 사랑의 원리로 본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다. 우주 과정의 뒤에 있어서, 그 흐름의 밑에 있어서, 그 생명의 속에 있어서, 자기 몸소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하여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 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외아들을 주셨다”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저 주는 이, 자기를 한없이 주는 이란 말이다. 이 역사를 낳는 이는, 즉 역사의 근원이 되고, 그 원동력이 되고, 그 원리가 되는 이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 사랑이라는 성격의 원어는 ‘아가페’다. 사랑이라 번역하기는 좀 부족한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인도교에서 말하는 ‘희생’이라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근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원체 넓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 쓰는 사랑이라는 말에는 많이 ‘애욕’ ‘정욕’하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나 ‘아가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의 ‘아가페’는 거의 종교적인 의미에 국한되어 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한마디로 ‘아가페’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관은 ‘아가페’ 사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무어라 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지만, 그저 주는 하나님은 사랑의 원리에 가깝다. 함석헌에게 사랑이란 이점에서 종교적인 사랑이었으며, 나아가 그것이 그저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사랑이었다. 이점에서 함석헌은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속의 인(仁)을 깨닫는 일이다. 하나님의 씨를 보는 일이다.”라고 하나님의 씨를 사랑이라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참을 하는 것은 제 속의 인을 발견하여 자신이 곧 사랑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의 원리에 따르는 자기로 혁명해내야 한다고 그가 말할 때, 이는 보편적 생의 명령이지만 또 동시에 구체적 명령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원리에 따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은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이 생명 활동이요,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종교도 구체적인 것이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추상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는 없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3 종교적 사관 中)
아울러 함석헌은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러한 개성적인 하나가 되자”라고 하는데 이는 아름다움의 성격과 같이 ‘내용의 하나’가 아닌, 조화를 이루는 ‘방법의 하나’를 가리킨다.
“여러분 무조건 뭉쳐라, 복종해라 하는 독재자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돼야하지만 그 하나는 분통에 들어가서 눌려서 꼭 같은 국수발로 나오는 밀가루 반죽같은 하나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는 개성으로 하는 하나입니다. 삼천만에서 29,999,999가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은 한 알 속에서 다시 전체를 찾고 살려낼 수 있는,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러한 개성적인 하나입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어도, 우리 하는 일의 뜻은 다만 하나로, 성격건설(性格建設)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
<< 자아에게 들리는 말씀은 서로 제각각이나, 본질에서 그 뜻은 하나다. 결국 자유하고 저항하자, 사랑하자는 것인데, 이를 깨닫는 일은 자기를 크게 한 번 버려 내 안의 모순을 깨닫고, 그 모순을 정면으로 사유해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전체와 하나되어가는 과정에 자기를 기투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하나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함은 곧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이란 말인데,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있는 사실이다. 믿음은 나와 전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철학과 종교에서 문제되는 믿음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믿음이다. 예컨대 “내가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이 나으리라고 믿는다거나 혹은 파산했을 때 부자가 되리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거기서 내게 문제되는 것은 오직 나의 돈과 건강이다. 내가 아무리 나의 돈과 건강을 하나님과 관계시킨다 하더라도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존재 전체가 아니다. 오직 나의 관심이 세계 전체에 있을 때, 그런 믿음이 깊은 생각, 곧 철학의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믿음은, 바로 믿음으로만 믿어지는 믿음 곧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다.” 이를 두고 함석헌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이라 말한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의 근원적 일치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사랑으로 사는 존재로서 제 속에 하나님을 품고 있는 나이기도 하기에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다. 곧, 존재의 원리를 사랑이라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이는 어떤 특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존재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곧 “우주의 통일성”(살림살이)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이라, 부처라, 브라만이라, 진리라, 생명이라, 이름은 가지가지로 불러져도 사실은 하나다.”(살림살이)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우주는 한 뜻의 나타난 것이다.”(살림살이) 그러나 그 하나는 다시 내 안에 있다. “그 전체는 실지로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내게, 곧 자아에 있다.”(살림살이) 그런즉 함석헌에게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만큼 또한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곧 “내 속에 무한을 믿음”(통곡! 삼일절)이다.
“나는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 듯 하지만 저 영원 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작지만, 그 나타내는 전체, 그 밑, 그 뜻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긴 것이다.”(살림살이)
여기서 함석헌은 두 차원을 말하는데, 하나는 영원성과 무한성(전체)이요, 다른 하나는 개체성(부분)이다. 나는 본질에서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으로, “사람의 혼은 우주의 근본 되는 절대의 정신과 그 바탈이 하나”(들사람 얼)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그로부터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본질에서 하나로 있는, 나와 하나님은 현실에서는 이 끝과 저 끝으로 마주 서 있다. “하나님의 잡을 수 있는 이 끝이 ‘나’란 것이고, 나의 알 수 없는 저 끝이 하나님”(민족-하나의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가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알의 설움)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은 자아의 그 두 차원이 근본의 자리에서는 하나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본질에서, 함석헌의 말로 하자면 참의 자리에서만 그렇다는 것이지 이러한 절대적 근원적 일치는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믿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제약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가 되어감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를 한 마디로 “하나님이 되잠”(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이라고 표현한다. 나와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이란 주어진 것이 아닌 실현되어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자는 것이요, 종교적 믿음의 본질이란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완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역사는 한편에서는 내가 하나님에까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요, 동시에 하나님이 나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자기 속에 품은 씨앗이 씨ᄋᆞᆯ이라면, 반대로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은 다 된 하나님이 아니요 영원히 자라는 영원한 미완성”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점에서 역사는 인간이 자기를 신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거꾸로 신이 인간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은 마지막으로 이 두 겹의 역사가 하나라는 것을 믿음이다. 이것이 함석헌의 믿음이었다. >> (김상봉, “함석헌과 씨ᄋᆞᆯ철학의 이념”에서 발췌하여 약간 수정함)
4. 함석헌이 의미하는 아름다움이란 곧, 개체가 전체를 조화롭게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배경만에 있는 것도 아니요 개체 그 자체에만 있는 것도 아님을 안다. 아름다움이란 오히려 그 사이에 있다고 해야 옳다. 인간은 하나님과 근원적 거리를 가지지만 또 한편에서는 근원적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 모순 속에서 종교적 믿음이, “하나님 되잠”이 드러나는데, 아름다움이란 곧 하나님 되잠에 있다. 개체가 끊임없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려는 바로 그 과정에 있다. 이를 두고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사랑하는 벗들아, 옷만 아니라 인생 그것이 곧 한 개 예술 아니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조각을 새기는 동안에 그것들이 도리어 우리 혼의 얼굴을 그려내고 써내고 아로새겨 내고 있지 않느냐? 그것들도 아름다워야지만 이것도, 이것도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지 않느냐? 그렇기에 우리 혼도 아름답기 위하여 위대한 배경을 요구한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만 보아서는 그 참 값을 알 수 없고, 반드시 그 사회적 역사적 우주적 배경 속에 놓고 보아야 한다. 사실 전체를 내놓고 저만이라는 개체는 없다. 개체는 전체의 한 예술적 표현이다. 사람을 그 가정에 놓고, 그 사회에 놓고, 그 시대에 놓고, 영원 무한에 놓고 봄을 따라 그 값이 점점 더 커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그가 드는 사례가 고려 역사라는 큰 배경에 자신을 투사한 정몽주의 사례다. 하지만 함석헌은 사회나 역사보다도 더 큰 배경이 우주임을 말한다. 온 우주는 곧 무한, 끝이 없는 전체다. 그리고 그 전체와 하나되는 일을 “녹아버림”, “잊어버림”으로 표현한다. 여담이지만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주체를 두고 녹아내림, 용해라는 표현을 채택하는데, 이때 그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이었다. 함석헌도 이처럼 나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와 일치의 공존에서 오는 끊임없는 하나됨의 과정 자체를 녹아버림으로 표현한다. 어디에 녹아버리는가? 전체이다. 전체에 자기를 비춰내는 것이다. 녹아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지만 이때 녹아지고 잊어지는 것은 ‘작은 나’이지 나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전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새로이 발견한다. 나는 끊임없이 용해되고 생성하는 주체다. 이런 점에서 전체라는 배경 속에 나를 조화시키는 아름다움이란, “둘을 한 개 산 전체로 살려내어 그 산 하나 속에 자기를 다시 발견함”의 과정과 같다. 이리하여 함석헌은 말한다.
“사람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 위대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고 아름다울 수도 없다.”
함석헌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라는 예수의 말에서, 들을 우주로, 백합을 역사의 주체인 민중으로 비유한다. 대상 자체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들이라는 무한한 배경 앞에서 조화를 이루려 하는 백합이야말로 함석헌에게는 아름다움의 전형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기 위해서는 “현실의 평지를 높이 떠나 이상의 높은 봉에” 서야 한다. 전체라는 배경을 가지기 위해서다.
“네가 위대하고 싶거든 위대한 배경을 가져라. 모든 가까운 경치를 무시하라. 무한을 배경으로 하여라.”
그러나 배경을 강조하면서도 함석헌은 개체성을 도외시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전체는 오직 개체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전체가 개체를 통해 표현됨이란 결국 개체 안에 전체가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아름다움이란 사실 우리 안에 이미 있음을 지적한다. 배경과의 조화를 드러낸다 했지만, 그 조화란 결국 내 안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벗들아, 아름다움은 또 너희 마음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배경을 밖에 찾는 한은 너희는 헤매고 헤매다가 거친 들에 보기 싫은 구걸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실은 너희 안에 있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너희 맘씨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했지만 나타내는 것은 결국 너희 마음밖에 되는 것 없다. 너희 혼의 자기실현이다. … 나타나는 것은 물건이 아니요 너희 맘씨, 너희 혼이다. 위대한 혼, 그것은 자기를 위해 위대한 우주를 찾아내고, 알므다운 혼, 그것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아름다운 배경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심정을 가지고 전체와 하나됨은 개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짝이 필요하다. 나는 나만으로는 역사의 배경에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사회적 나를 자각하고 역사적 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또 심정은 감응하는 것이라, 아름다운 혼과 짝할 때 나 또한 힘을 받는다.
“혼은 그 짝하는 것에 따라 자란다. 너희는 그럼 누구를 짝하느냐?”
이 물음에 함석헌은 [그이]의 짝이 되어 보라고 말한다. // “너희가 정말 아름답고 위대한 혼이 되고자 하거든 짝할 이는 오직 한 분 [그이] 뿐이니라.”//
[그이]는 참 사람,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낸 이로 예수를 말한다.
“얼마나 많은 심령이 이 예수라는 놀라운 혼의 광채에 접하여 그 흙같이 흐렸던 것이 수정처럼 뚫려 비치게 되었는지 너희는 아느냐? 저는 그 자신이 아름다움 자체기 때문에 남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너희가 아름답고자 하느냐? 옷에 맘을 썩이고 화장에 정신을 쓰기보다는 이 영원의 젊은이에게 약혼을 청하여라. 너희가 너희 몸 걱정, 마음 걱정을 말고 빛나신 그이에게만 맘이 홀려 너희 혼을 들어 그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는 그 순간부터 전에 없던 허다한 아름다움이 너희 자신에게서 방사선처럼 쏟아져나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자연 속에서 명상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경을 가까이 했다. 함석헌은 성경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면 그 뜻의 계시오, 사람 편에서 하면 아름다운 혼들의 하나님 뜻의 체험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 뜻의 계시인데, 함석헌에게 계시란 “인간의 사유범역을 뛰어난, 거기서는 지어낼 수 없는 생명적인 진리가 사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것”(무교회)으로, 성경이란 곧 생명의 진리가 구체적으로, 또 역사적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결과물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생명적 진리를 사실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마주하며 자기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도정에 참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함석헌은 ‘너희’를 두고 보다 구체적으로 “한”이라고 부른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이 말했듯, “한”은 세계사의 찌꺼기를 온몸에 뒤집어 쓴 고난의 역사를 짊어진 자, 업신여김 받는 갈보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제 사명을 찾아낸다.
“이것은 세계의 하수구요, 공창(公娼)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저들이 너무 부하고 귀해 졌다는 것은 저들은 채무자라는 말이다. 물질적으로 채권자인 저들은 정신적으로는 채무자다. 저는 우리에게 빚진 자다. 그러므로 빚 청장(淸帳)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지난날에 있어서도 새 역사의 싹은 언제나 쓰레기통에서 나왔지만 이제 오는 역사에서는 더구나도 그렇다. 그러므로 한국ㆍ인도ㆍ유대ㆍ흑인 이들이 그 덮어누르는 불의의 고난에서 이기고 나와서, 제 노릇을 하면 인류는 구원을 얻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이 세계는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닌 것, 종내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우리가 증거하여야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 36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도 함석헌은 가엾어만 보이는 “한”이지만 그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찾을 것을 말한다.
“내 사랑아, 그러나 네가 늙은 것을 어찌하느냐? 더러움이 묻은 것이 아니라 네 살 속에 박힌 것을 어찌하느냐? …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갈 곳은 오직 한곳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쓰레기와 찌꺼기를 다 받는 바다보다도 넓은 가슴. 모든 더러움, 모든 죄악을 다 태우고 녹여버리는 땅 속보다 더 뜨거운 마음 속. 버릴 생각도 씻을 생각도 다 내버리고, 그대로를 안고, 두 눈을 딱 감고, 감는다기보다는 차라리 번히 뜬 채로 저 영원한 님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내가 뭐라더냐? 영원의 젊은이에게 약혼을 하라 했지. 그만이 네 잃어진 젊음을 회복해 줄 수 있고, 네 없어진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해 줄 수 있다. 씻어도 씻어도 희게 할 수는 없는 타고난 까마귀가 저녁 영광 속으로 사뭇 날아들면 그 그대로가 영광의 사자 아니더냐? 너도 그렇다. 영광의 님 품 속으로 사뭇 날아들어! 너를 보지 말고 그만보고, 너를 생각말고 다만 그만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공경하고 그를 위해 애타는 마음을 가져! 그 속에 죽어버려, 녹아버려, 타버릴 생각을 해! 그러면 그가 너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 녹여버리지, 자기 영광의 성명 속에 녹여버리지. 그 성명의 불도가니에 녹아버린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움을 너는 이미 보지 않았느냐?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적고 추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대통령의 짝이냐? 어리석은 사람, 대통령의 짝보다도 그 어머니가 더 위대하지 않느냐? 네 속에서 세상을 다스릴 임금이 나온다면 어떠냐? 너는 마리아 될 생각은 없고 클레오파트라가 될 생각만이냐? 이 가엾은, 스스로 업신여길 여왕!
너는 영원의 젊은이, 영광의 님을 사랑하여 하늘가에 서라. 서서 바라라. 그러면 새 시대의 주인이 네 허리에서 번개처럼 방사되어 나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