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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츠노 카즈오
문장을 닦는 법
이와나미서점, 2007
Ⅰ 기본적인 것들 몇 가지
1 매일, 쓴다
여행을 가서 열흘 정도 쓰지 않는 날이 있는데, 그러면 열흘 분 실력이 줄었다 생각합니다. 피아노와 한가지이지요. 쓴다는 기본적인 연습은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열흘 분 실력이 줄었다는 것은 곧 처음으로 돌아가는 데 열흘은 걸린다는 말일까요. “작가가 되기 한참 전부터 쓰는 일이 일상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기에, “열흘 분 실력이 줄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알아챘던 것일까요. ‘안다’는 것은 이 또한 대단한 연습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네 살 무렵의 일입니다. 아버지 요시모토 다카아키라를 만나러 온 편집자가 어린 딸을 보고 “크면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묻습니다. 어린 딸은 그 자리에서 ‘작가’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2학년부터 벌써 소설을 썼는데, 그때 썼던 것은 “뭔가 인간이 많이 나왔던, 생각보다는 음침한 공포물 같은 느낌이 드는 대작”이었다, 본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부터 줄곧 문장을 써온 터이므로, 솜씨가 숙달될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 작가에게 『날마다의 일』이라는 일상의 기록을 엮은 작품이 있습니다. 그 후기에, “그러나 나의 에세이는 하찮다.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미안하다, 산 사람”이라는 기분 좋은 자조 섞인 문장이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 하찮을까”를 점검하는 흥미가 입니다만, 읽어나가다 보니, 소학생 무렵부터 써 온 세월이 겹쳐 쌓여있음을 바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겹쳐 쌓여있음이 자못 평명(平明)한, 가볍고 사뿐하다는 느낌의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문장 연습을 하겠다는 사람으로서, 참고가 될 점이 잔뜩 있습니다. 시험 삼아 각 장의 청 문장을 읽어 봅시다.
“나는 지금 고베에 있다.”
“내가 이상하리만치 목욕을 좋아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토나이 데키초우 씨를 뵈었다.”
“친구가 결혼하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연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파스타가 먹고 싶었다.”
“올 태풍은 엄청나다.”
“NㆍY에 갔다 왔다.”
각 장은 이런 느낌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짧게, 구체적으로, 일상적으로, 일견 무간하게 쓰고 있는 듯이 보이는 글뿐입니다. 연습을 위해서는 먼저 이런 형태로, 힘을 뺀 채 최초의 한 행을 써보면 되겠다는 느낌을 주는, 지극히 단순한 문장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2001년 이후 홈 페이지에 쓰는 일기를 묶어 『요시모토 바나나 닷 컴 보세요!』『아기가 있는 날들』『미녀와 함께』라는 제목의 문고본을 차례차례 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만들 생각은 전연 없었습니다만, 내가 기분 나는 대로 너무 많이 써서, 과거를 정리해서 보는 것이 어렵다고 모두 말해, 그렇다면 정리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본인이 쓴 것처럼, 기분 나서 너무 많이 쓸 정도로, 쓰는 일이 생활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지요.(작가는 많이들 그렇구나 생각합니다만.) 일기는 이런 투인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면 비―짱 때문에 고등어 통조림의 속이 마루에 흩어져 있고, 티슈도 모두 너덜너덜 마루에 떨어져 있다. 집안은 오줌 냄새. 뭐랄까, 쓸쓸하다……”(2001)
“오롯이 교정지를 고친다. 고치며 고치며 넘긴다. 자지 않고 고친다. 그리고 저녁에는 치비와 함께 물건을 사러 간다. 둘이서 외출, 드디어 여기까지 왔는가, 감개무량하다. 유니크로에 들어가자 ‘우와, 여기는 있지 않아’라고 큰소리로 말해, 이상하고 창피하고 슬펐다.”(2005)
각각의 문고본 권말에 「Q&A」가 있습니다. 요시모토는 인터넷으로 일기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을 읽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질문이 오고 그 질문에 답합니다. 그 모습이 문고본에 거둬져있습니다. 작가와 독자의 거리가 대단한 기세로 가까워져있는 것에 놀라고, 장문의 질문에 답하는 서비스 정신에도 놀랍니다. ‘쓰는 일이 일상’이라 잘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이 같은 형태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일기를 공개하고 Q&A도 고루 살피고, 이런 일상 속에서 곧 나날, 자신의 생활을 드러내는 것으로, 요시모토 바나나는 새로운 형태의 문장 새로운 형태의 에세이의 창조를 즐기고 있는 듯합니다.
요시모토의 작품의 내용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의 취지가 아니므로 피하겠습니다만, 작품을 읽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요시모토가 배우 히로쓰에 요코에 관한 일을 쓰는 대목이 있습니다. 히로쓰에의 담임이었던 선생이 “요코에 대한 차별을 보고 화가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코를 차별한 것은 괘씸합니다. 스무 살이 되어 외박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요코는 천진난만함 그대로 비방중상이 소용돌이치는 연예계에 뛰어들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쓰라린 일이 있으면 함께 노래한 오- 샹제리제를 흥얼거리며 힘을 냅니다.’ 어쩜, 시원스럽고 힘 있고 심플하고 게다가 교사다운 훌륭한 코멘트네요.”
요시모토는 이렇게 씁니다. 히로쓰에를 북돋는 교사를 무조건 응원하고 있습니다. 헤아리는 마음이 문장에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요시모토의 문장을 읽고서 때로 상대를 헤아리는 문장의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일기라 하면 나 자신은 메모 정도의 일기를 쓸 뿐이지만, 매일 대학노트 등에 극명한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을 여러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은 다분히 그 날 그 날을 정녕히 지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부러운 느낌이 듭니다.
작가 후루이 유기치가, 사람의 일기는 “읽어서 무척 재미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제각각 사정에 따라서, 장년의 일기 가운데서야 말로 문장의 극치에 담담하게 걸어 들어간다, 라고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는 말마저 쓰고 있습니다. 후루이 유기치처럼, 훌륭한 안력(眼力)을 가진 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일기에는 확실히 사람의 필력을 높이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읽은 범위에서 말할 뿐이지만, 나가이 가후의 『단장정일승(斷腸亭日乘)』, 야마다 후타로의 『전중파(戰中派) 벌레 일기』, 「쿠시다 손이치의 일기」가 나에게는 ‘3대일기문학’입니다. 조금 읽었을 뿐이지만, 히구치 이치요의 일기도 좋습니다. 전쟁중에 쓴 다케우치 코산의 일기도 꽤 괜찮은 것입니다.
이 장의 정리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매일 무엇인가를 쓴다”라는 말입니다. 날마다 꾸준히 쓴다. 그런 가운데 분명 당신 자신의 문장이 모습을 만들어 나갈 터입니다.
날마다 휘두르지 않고, 얼마간 야구 해설서를 읽는다 해서, 야구 실력이 늘 턱이 없습니다. 일기는 야구에서 말하는 휘두름이지요.
2 뽑아 쓰다
나에게는 어떤 문장을 쓰면 좋을까라는 규격품의 이미지가 없으므로, 이것은 훌륭한 문장이라 생각하는 것을 노트에 뽑아 쓴다.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 온 그런 노트가 100권 이상 되는 듯하다. (쓰루미 슌스케)
좋다 싶은 문장을 뽑아 쓴다. 베껴 쓴다. 이것은 충분히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전후 가장 매력 있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어린 싹을 키우는 명인이었습니다.
패전 후, 내가 아직 대학생이던 무렵, 사회심리학자인 내 은사 미나미 히로시(南博) 교수의 지도로 친구들과 <전후 일본의 유행가>라는 것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요란스레 조사연구를 거듭, 미나미 교수가 그것을 꼴을 갖추어 발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유행가론을 읽은 쓰루미 슌스케가 “그거 재미있었다”라고 우리들을 북돋워준 적이 있었습니다. 오십 수년 전의 일이지만 그 일이 지금도 내 기억에 있는 것은 그만큼 기뻤기 때문이지요.
슌스케는 열두 살 때부터 뽑아 쓰기를 시작해, 예를 들어 도연초(徒然草)의 “존명(存命)의 기쁨, 날마다 즐겁지 않으랴”라든가, 작가 다케다 타이쥰(武田泰淳)의 “나는 인간의 치사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사랑해야할 인류의 성격이라 생각하고 있다”라든가, 그런 문장을 노트에 베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문장이 지금 더욱 사람의 마음에 울리는 신선함을 가지고 있는 비밀의 하나는 이 방대한 뽑아 쓰기장에 있는 것은 아닌지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에 내건 문장을 쓰루미가 쓴 것은 이십 수년 전입니다. 지금 대학노트는 백 수십 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뽑아 쓰기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하나는, 자신의 문장은 서툴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쓰루미는 말합니다. 뽑아 쓴 문장과 자신의 문장과의 차이를 압니다. 거기에 더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가지가지 문장은 자신이 빠지기 쉬운 틀에 박힌 문장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쓰루미는 “틀에 박힌 문장의 언어를 부려 휙휙 사물을 말하지 않는 일. 곧 타인의 소리를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육성으로 보통 말하듯이 문장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나는) 매일 문장을 쓰며 살림을 꾸려나가는 터이지만, 뭔가, 진흙탕 속에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틀에 박힌 문장의 말과 격투하며 여러 차례 지고, 어떤 때에는 깔아 눕힐 수 있었으며, 어떤 때에는 달아난다 말하듯이, 틀에 박힌 문장과의 싸움에 종시(終始)하는, 그 문제를 서로 자신의 앞에 두어 보세요.”
틀에 박힌 문장의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틀에 박힌 문장의 발상을 경계하고, 이것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기본중의 기본이라 말해 좋지요.
쓰루미가 좋다고 생각한 문장의 뽑아 쓰기를 하는 것은 그 문장과 쏙 빼닮게 쓰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는, 그 문장이 “틀에 박힌 문장의 말을 쓰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그 문장과 자신의 문장을 대비시키는 일로, 자신의 문장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떠오르게 하여 자신의 문장의 미흡함, 거침을 생각해 본다. 쓰루미 슌스케 정도 독자적인 언어를 가진 사람이 그런데도 더욱 자신의 문장을 살피는 수업을 날마다 계속하고 있다는 것에, 내 마음은 흔들립니다.
무척 많은 사람이 뽑아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모리 안지(花森安治)의 일』의 저자 사케이 히로시(酒井寬)는, 하나모리 안지가 무척 많은 사람의 문장을 대학노트에 베끼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森鷗外),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거기에 조루리(淨瑠璃)에 이르기까지 베끼고, 게다가 같은 사람의 문장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뽑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모리 안지는 『생활의 수첩』편집장을 하고 있던 때 혼자서 꽤 많은 페이지를 맡고 있었습니다. 될 수 있다면 무척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게 하려고, 여러 가지 문체로 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사람의 문장을 베껴서 그 사람의 문체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끼기가 좋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도 있겠지요. 베껴 쓰기로 인해 배우는 것이 무척 많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작가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에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문장이 있다. 골동품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나의 수집이므로 나에게만 그 가치와 아름다움이 알려지고, 타인에게는 통용되지 않을는지 모른다.”
사람은 제각각 ‘마음을 흔들어대는 문장’을 생애의 보물로서 마음의 문갑에 소중히 간직할 터입니다. 노트에 기록된 베낀 문장은 ‘마음의 자기 역사’입니다. 자신이 더듬어 온 길을 분명히 해 줍니다.
패전 때 나는 구제 중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십대 무렵의 일로 기억이 애매합니다만, 당시 많은 소년의 예처럼,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타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책을 뒤져서 읽어, 마음에 드는 대목은 자주 노트에 베껴 두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나는 계속해서 저속해지고,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쓰리라. 신이여. 내 청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그라지지 않기를”이라는 안고의 문장인가를 종이에 뽑아 쓰고, 책상 옆 벽에 붙여서 “나는 계속해서 쓸 테다” 중얼거리거나 했습니다. 그저 정말 만화 같은 풍경이었습니다만, ‘자기사(自己史)’를 더듬는 데는 뽑아 쓰기장은 실로 재미있는 문헌입니다.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뽑아 쓰는 일은 당신의 문장을 닦는 일이 됩니다.
뽑아 쓰기장의 이점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①뽑아 쓰기로 그 저자로부터 깊은 공부가 가능하다.
②자기 문장의 떨어지는 점, 예를 들어 너무 틀에 박힌 문장을 쓰고 있다는 점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③자신이 어떤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 생각해 왔는가. 이어서 자기 마음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 가능하다.
3 되풀이 읽는다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텍스트를 읽는 일. 세부까지 암기할 만큼 읽기에 빠지는 일. 한 가지 더는, 텍스트를 좋아하게 되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일(곧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애쓰는 일).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머리에 떠오른 의문점을 아무리 사소한 것, 볼품없는 것이라도 좋으니(어쩌면 사소한 것, 볼품없는 것 쪽이 바람직스럽다), 바지런히 리스트 업 해가는 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이 말은 본인이 미국의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던 때,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말입니다. 일본 작가의 몇 권인가 책의 합평회를 계획하고, 학생들에게 ‘세부까지 암기할 만큼 읽기에 빠지는 일’을 주문했던 것입니다.
하루키는, ①되풀이해서 읽는 일 ②그 책을 좋아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 ③의문점을 정리하는 일의 세 가지 점은 “신중하게 책을 읽자고 내 자신이 늘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고 쓰고, 학생에게 그 세 가지의 일을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나뭇잎의 표리(表裏)와 같은 것으로, 본래 일체인 것이지요. 당신은 무언가를 쓰면서 때때로 쓴 것을 묵독하지 않습니까? 또는 소리를 내서 읽은 적도 있지요? 누군가의 문장을 읽으면서, “이건 이상하다. 나라면 이렇게 쓸 텐데”라든지, “이건 훌륭하다.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요? 읽으면서 실은 쓰는 일을 의식합니다. 그런 적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이 책은 문장 닦는 방법을 생각하는 책입니다만, 굳이 ‘읽는다’는 항목을 만든 것은, “좋은 문장을 읽는 일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중요한 영양원(營養源)이다”라는 생각이 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암기할 만큼 읽기에 빠진다”라고 말합니다. 한 권의 책을 암기할 만큼 되풀이해서 읽는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본디 기억력이 약한데다 나이마저 먹어, ‘암기한다’는 일이 지극히 서툴러졌지만, 그래도 되풀이해서 읽고 있는 작품의 총수는 십분 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만나서 행복했다고 생각되는 책이 몇 권 몇 십 권, 아니 그 이상이라도 있을 터입니다. 그런 책은 당신에게 살아가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문장을 쓸 때의 저력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1909~1988, 소설가ㆍ불문학자)는 스탕달의 『팜의 사원』을 20번 이상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도련님』은 “아마 그 배 정도 읽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는 것으로 그 책은 읽는 이의 피와 살이 되어갈 터입니다.
여기서 조금 이야기가 그렇습니다만, 어린아이 적에 읽은 책, 또는 읽어주어 들은 책이 기적을 낳는다는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어릴 때에 ‘좋은 책’과 만나는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우리들은 잘 알아야만 하지요. 뉴질랜드의 도로시 바트라가 쓴 작품에 『쿠슈라의 기적』이라는 명저가 있습니다.
쿠슈라는 심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시각에다 청각 기능도 불충분하고, 몇 번인가 위독해질 만큼의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 쿠슈라에게 할머니 바트라나 부모는 열심히 그림책을 읽어주었던 것입니다. 숙면에 들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칭얼대는 어린 딸은 그때만큼은 전신을 귀 삼아 그림책을 읽는 소리에 귀 기울였던 것입니다.
입원과 수술을 되풀이하는 나날이었지만, 그 읽어서 들려주는 소리 때문인지, 쿠슈라는 3세 8개월 때의 검사에서 지력(知力)이 ‘수준 이상’이라고 판정되었습니다. 쿠슈라의 장애 정도로 보면 이것은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고통과 욕구불만의 생활 속에서도 책 속의 등장인물――왕이나 고양이나 호랑이가 늘 여자아이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쿠슈라가 끊임없는 고통과 욕구불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 책 속의 등장인물과 따스하고 아름다운 색이 쿠슈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쿠슈라 밖에 알지 못하는 어둡고 쓸쓸한 장소로 동무가 되었던 것은 책 속에 사는 사람밖에 없었다”라고 도로시 바트라는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책 속의 등장인물과의 만남이 얼마만큼 쿠슈라를 북돋우고 달래주었던 것일까? 이 책은 그것을 상세히 말하고,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릴 때에 수많은 좋은 그림책을 들려주었던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할 때, 이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게 강조했다 할 일이 아니지요.
이 장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책을 읽는 일, 그리고 이것이다 싶은 책이 있으면 정독하라”는 것입니다. 뽑아 적는다. 밑줄을 긋는다. 감상을 쓴다. 요약을 쓴다. 모든 형태로 그 책과 대화를 하고, 격투(格鬪)하고, 감사하고, 자리 옆에 두고 다시 되풀이해서 읽는다.
그 책속에서 “괜찮네……” 싶은 문장이 있으면 되풀이해서 읽는다. 음독(音讀)한다. 그런 책을 당신은, 몇 권, 가지고 있습니까?
“문장에 대한 감각을 닦는 데에는, ……되풀이 되풀이해서 음독하고, 또는 암독(暗讀)하는 방법은 정말로 오래 걸리는, 몹시 느린 일 처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 무엇보다 유효한 것입니다”라고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도 쓰고 있습니다.
나아가 한 가지 더, 앞서 말한 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책을 좋아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실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까. 욕도 좋고, 혹평도 좋고,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쓴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려 노력한다”는 것이지요. “비평이란 사람을 칭찬하는 기술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상이 되는 작품 대상이 되는 문장을 칭찬하기에는 무엇보다도 ‘좋아지게 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지요. 얼마만큼 칭찬하려 마음먹어도 칭찬할 데가 결코 없는, 그런 작품은 뜻밖에 적은 것입니다.
4 난독을 즐기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긴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것을 세상에서는 ‘난독(亂讀)’이라 하는 듯합니다. ‘난독’의 폐――그러나 그런 것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난독’은 내 인생의 일부로, 인생의 일부는 기계의 부품처럼 맞지 않아서 바꾸는 것과 같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난독’의 폐해가 어떻다는 둥 말할 것 없이, 다만 그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토 슈이치)
전후를 대표하는 사상가 가토 슈이치의 ‘난독은 즐거워’라는 말에 무조건 찬성합니다. 『독서술』의 「책 끝에, 또는 30년 후」에서 가토는 독서의 즐거움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든 책은 특정한 언어로 쓰였습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책의 경우에는 일본어입니다. 책을 잔뜩 읽는다는 것은 일본어를 잔뜩 읽는다는 것이고, 일본어에 의한 표현의 다양성, 그 아름다움과 매력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책을 읽으며 일본어의 문장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독서의 즐거움의 하나입니다.”
‘일본어에 의한 표현의 다양성’ ‘그 아름다움과 매력’을 알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잔뜩 일본어 책을 읽는 것이 절실하다고 가토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부’라는 점잖은 일이 아니고, 다만 독서를 즐거움이라는 큰길을 걷는 일로, 우리들은 저절로 일본어의 힘을 닦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정독과 난독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난독했던 것 가운데서 정독할 책이 나타나는 일도 있고, 많은 책을 적은 시간에 읽은 덕분에 한 책을 정독할 시간이 생기는 일도 있지요. 정독도 즐겁고 난독도 즐겁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난독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천천히 한 권의 책을 정독하는 즐거움도 조금은 알고 있는 셈입니다.
독서에는 ‘이질(異質)의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수염 진료담』등을 쓴 작가 야마모토 슈고로오는 이질의 책을 읽는 일에 즐거워 한 사람 같은데, 한때는 전문적인 의학 잡지를 세 종류, 2년 이상이나 구독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의대생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였지만, 그 잡지를 읽고 있으면 재미있어서 전철 정류장을 지나쳐버릴 만큼 열중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슈고로오의 표현에 따르면 “학술적 능력이 제로이므로 정확한 이해 같은 것은 도저히 미덥지 못하지만, 읽고 있자면 터무니없이 재미있다”라는 것입니다. “책상에 마주하고 있을 때와는 머리를 쓰는 것이 정히 다르므로, 곧 머리의 레크리에이션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자신은 쓰고 있지만, 꽤나 머리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지요.
문과계의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이과계의 책에도 손을 대고, 이과계의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문과계의 책에도 친숙해 지는 것, 긴 일생을 생각하면, 이 일은 무척 절실한 것이지요.
『매미 울음』같은 역사소설을 쓴 후지사와 슈헤이도 또한 난독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에게 ‘이질의 책’이라 해서 좋을지 모르지만, 후지사와는 ‘해외의 추리소설’을 쭉 읽었습니다. 그 독서일기를 읽자면, 클라이브 카츠라 『맨하탄 특급을 찾아라』, 리처드 니리 『오이디푸스의 보수』, 로버트 트레이버 『재판』, 미키 스피레인 『심판하는 것은 나다』, 루스 렌델 『손가락에 상처 난 여자』, 프리맨틀 『쫓기는 남자』 등, 작품이 잔뜩 등장합니다.
후지사와 자신 글레이엄 그린의 『휴먼 팩터』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추리소설부터 스파이 소설, 또는 이것들을 통틀어 서스펜스 소설류를 틈만 나면 읽어댔기 때문에, 『휴먼 팩터』도 스파이 소설로 읽었다. 그런데 이것이 대단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수년 사이에 읽은 엄청난 이런 종류의 소설 가운데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면 『휴먼 팩터』 한 권이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찬의 말을 보낼 수 있을 만큼 후지사와는 해외의 추리물에 친근해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후지사와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질의 책을 읽는 일로 우리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세계를 넓힐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미지의 세계를 만남으로 뇌의 움직임에 자극을 줄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체험으로 말한다면, 날마다 신문의 칼럼을 쓰는 일에서, 충분히 이득을 보았다 싶은 것이 얼마만큼 있었습니다. 날마다 바뀌는 주제를 따라서 다른 분야의 사람과 만나고, 또는 이질의 분야의 책이나 잡지를 읽는, 그런 기회를 얻는 일도 그 하나입니다. 이질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 속 미개의 땅을 진정 조금씩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책상 바로 옆 서가를 보면, 여러 가지 분야의 책이 빛을 내며 나란히 있습니다. 작곡가 호소가와 슌부의 『혼의 랜드스케이프』가 있고, 생명과학자 야나기사와 게이코의 『의식의 변화와 DNA』가 있습니다. 자연인류학자 긴토 시로의 『발 이야기』가 있고, 이마니시 긴시의 『자연학의 제창』이 있습니다. 내가 배워 온 세계와는 다른 분야의 책입니다만, 새로운 세계의 사실을 가르쳐주는 모두 귀중한 책으로, 우두커니 있을 때에 손에 들고 편 곳을 고쳐 읽다보면, 실로 즐거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원고를 쓰고 나서 머리가 극도로 피곤해졌을 때는 신문, 주간지, 사진집 등, 주변에 있는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것이 의외로 즐겁습니다. 뭐라 할 것도 없이 고갱의 화집을 보고, 마르키즈의 섬들을 생각하고, 저 남태평양 섬의 야자림을 지나는 바람을 생각하고, 짙은 감색으로 펼쳐진 바다를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마음을 덮고 있던 구름이 개고, 푸른 하늘이 보이는 기분이 됩니다. 난독이란 좀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욱한 안개를 뚫는 하나의 방법으로서는 유효하다고, 저로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5 걷는다
“틈이 있으면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걷고 걸으며 생각하고, 나는 터벅터벅 어슬렁어슬렁 그밖에 여러 군데 돌아다니는 것이다.” “뒷골목을 가자. 옆길을 걷자.” (나가이 가후)
도쿄의 ‘시중산보(市中散步)’를 계속했던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1959)는 명작 『왜나막신』(1915년)을 써서 남겼습니다.
가후가 그렸던 일찍이 도쿄의 ‘감자 가게’ ‘뒷골목의 막과자’ ‘길가의 샘터’ ‘한 줄기의 도부강’ ‘소녀가 타는 샤미센’ ‘영묘(靈廟)를 둘러싼 울창한 숲’ ‘한없이 이어지는 기와지붕’ 등은 그 대부분이 벌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라지고 만 것을 찾는 기분이 되어, 때때로 가후의 『왜나막신』을 펴 읽습니다.
가후는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걸을 리가 없습니다. 뭐라 할 것 없이 걷습니다. 걸으면서 절이 많은 야마노테 골목의 나무들을 우러르고, 또는 수로 위에 걸려 있는 작은 다리를 보고, “그 스러져 가는 주위의 광경이 내 감정에 조화되어 잠시 내게도 아닌 떠나기 어려운 마음을 갖게 한다”라는 체험을 합니다. “그런 무용한 감개(感慨)에 빠지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숨겨진 기쁨을 위하여 가후는 터벅터벅 그 외출, 걷는 데서밖에 얻을 수 없는 ‘무용한 감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어슬렁어슬렁 걷기는 무용하지 않았습니다. 메이지ㆍ다이쇼 시대 도쿄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니다이라(鬼平)』의 작가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郞, 1923~1990)도 산보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케나미는 프랑스의 배우 장 가방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방은 “인간은요, 오늘 스프의 맛이 어땠다든지, 오늘은 3시간만 혼자가 되어 어슬렁어슬렁 걸어 보자든지…… 그런 분별없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장사해서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다니까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케나미는 이 말이 무척 좋아서, “산보의 참맛은 이것이 다다”라고까지 쓰고 있습니다.
이케나미는 깊은 밤부터 아침까지 일을 하고, 정오 가까이에 일어나서부터 산보를 합니다. 이것이 일과의 산보입니다. 이때는 일이 머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걷는 가운데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단편적으로 떠오릅니다. 걷고 있기 때문에야 말로 번뜩이는 것도 있습니다. 산보를 하는 가운데 다음에서 다음으로 쓸거리가 떠오르고, 집으로 돌아오면 펜을 잡고 한낮부터 다음날 아침에 걸쳐 6~70매를 써버린다, 그런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즐거운 것은, 장 가방이 말한, 일에서 벗어난 ‘어슬렁어슬렁 산보’란 것입니다. 그런 때는 다리 가운데쯤에서 스미다강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가운데 2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고 말합니다. “일도 가족도 뭐든지 잊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산보시간은 이같은 불가사의함을 가득 채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산보 뒤에는 기분도 맑아지고 컨디션도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즐기면서 걸으면 불가사의하게 원기가 용솟음칩니다.
일을 끊어버리지 못할 산보도 있는가하면, 일을 버리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산보도 있습니다.
우리들 일상의 산보는 크게 이 두 가지 형태의 혼합형태가 아니겠습니까.
내 경우도 다만 어쨌건 어슬렁거리는 걷기가 있는가 하면, 머리 어딘가에 원고 쓸 일이 걸려있는 걷기도 있는, 또는 원고의 가물거림을 털어버리려는 걷기도 있습니다.
원고 잘 써지지 않고, 머리가 혼란스러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때는 책상을 떠나 원고 쓰는 일을 깨끗이 잊고 걷는 데에 바칩니다. 나무들의 우듬지를 바라보면서 넉넉히 심호흡을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넓은 공원에 가서, 자동차 걱정도 없는 데를 걷습니다.
이것은 신문사에 있을 때 일입니다만, 도저히 펜이 나가지 않고, 쓰면 쓸수록 머리가 헝클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내 역량 이상의 일을 하려할 때에 일어나는 반응이겠지요. 웬만큼 고쳐 써도 잘 나가지 않습니다. 마감시각도 신경 쓰여, 재촉하면 재촉할수록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자주 신문사 빌딩의 지하 2층에 갔었습니다. 꽤 넓은 ‘체육실’이 있었습니다. 그 방 안에서 빙빙 돕니다. 스트레칭을 합니다. 3~40분 땀을 뺍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면 자신으로서도 자신이 놀라버릴 만큼 가볍게 펜이 움직입니다. 헝클어져 있던 것이 풀리고 좋은 컨디션으로 써낼 수가 있습니다. 전신운동에 의해 몸 가운데 막힘이 풀리고, 뇌의 세포에 원기가 돌아왔기 때문일까요.
걷는 일입니다.
산보도 좋고 쇼핑도 좋습니다. 교외의 산길을 걷습니다. 복잡한 거리를 걷습니다. 도심의 지하도를 걷습니다. 집집마다 뜰에 계절을 따라 피는 백목련이나 만납니다. 어쨌든 생활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걷는 시간을 갖는 일입니다.
걸으면서 본 것 들은 것, 냄새 맡은 물건 맛본 물건 갖가지가 마음에 남아 있으면, 그것은 언젠가 문장으로 나타나올 터입니다.
걷는다는 일과 ‘착상’을 낳는 뇌의 움직임에는 상관관계가 있겠지요. 걸으면서 ‘쓸거리의 힌트가 불쑥 떠오른’ 일이 몇 차례 있습니다.
나도 도리라는 이름의 애견과 함께 산보를 하면서 문득 어떤 발상이 번득인 적이 있습니다. 책상을 마주하고 있어서는 좀체 떠오르지 않는 재미있는 발상(그리고 자신으로서 생각뿐이었던 것)이 솟구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써서 간직해 둘 종이도 펜도 없습니다. 급히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볼펜을 사고, 거기서 받은 영수증의 뒷면에 서둘러 써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겨우 떠오른 발상이 녹아서 없어져버리는 노인의 강박관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필기구를 가지고 걸으면 좋았을 것 하겠지만, 개와 산보하면서 일부러?, 그렇게 망설여져서, 다음에도 가지지 않고 걷고, 또 번득이고 또 편의점에서 볼펜을 사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합니다.
“밖에 나가서 거리를 보든지, 사람과 만나든지 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차 안이었든, 병원의 대합실이었든, 아무런 장소에서 언뜻 귀담아 들은 대화로부터 술술 단편소설이 떠오른 적도 있었지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이 말은 소설을 쓰는 경우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에세이, 자서전, 레포트 등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미야베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은행(日本銀行)의 홍보지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을 견학시켜 주었는데, 일은(日銀)이라 하더라도 안에는 급탕실도 있다면 청소도구를 넣어둔 곳마저 있을 터이지요. 거기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든지. ……경찰이라면 마찬가지로 따뜻한 물을 두는 순번은 있을까, 라든지.”
청소도구를 두는 곳이야 건물 안을 걸어서 둘러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습니다.
미스테리의 경우, 사건은 비일상이지만, 관련된 사람은 일상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하고 생활감 있게 묘사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미야베에게는 있었던 듯합니다.
걸으면 일상의 삶의 세밀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 묘사가 가공의 세계에 생생함을 날라다 준다, 그런 일도 있지요.
에세이나 기록문을 쓰는 경우에도 ‘생활감 있는 사물의 세밀한 묘사’는 문장에 현실감을 가져다줍니다. 걸으면 확실히 다리 역할을 해 주는 봉(棒)이 있는 것입니다.
걷는 일은 대지라는 서적을 읽는 것입니다. 대지는 도회의 모퉁이에 피는 냉이나 별꽃의 억셈을 가르쳐 줍니다. 콘크리트 도로를 소리도 없이 적셔가는 단비가 찾아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걷는 일의 효용을 정리해 둡시다.
①걷는 일은 세상의 새로운 냄새, 시대의 공기를 가르쳐 줍니다. 걷는 일로 생생한 현실의 모습을 눈에 넣고 귀에 들이고, 문장을 쓰는 소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②쓰는 일로 괴로워 할 때, 걷는 일로 머리가 맑아지고, 책상 앞에 돌아왔을 때 펜이 거침없이 움직인 적이 있습니다.
③머리를 텅 비우고 걷자면, 이것은, 하고 착상이 문득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 착상을 중요하게 여기세요.
④다만 오로지 걷는 일을 즐긴다, 그런 기회를 많이 갖고 싶습니다. 그런 걷기야말로 우리들의 심신에 정기(精氣)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6 현장 감각을 닦는다
“어쩔 셈으로 글을 쓴다든지 하는가, 힐문 받자면, 아무래도 거기에 스스로 가고 싶어서, 라고 대답할 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 걷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만져본 것만을 쓰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이 장의 제목에 ‘현장 감각’이라 썼습니다만, 이 말에는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도 꽤 적지 않겠지요. 현장이라 하면 보통 큰 사건ㆍ사고가 난 곳, 건설작업 중의 장소라는 느낌을 가질 터입니다. 그래도 여기서는 현장을 조금 더 넓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산보의 도중에 다다른 공원도 현장이고, 처음으로 찾은 북국(北國)의 거리도 현장입니다. 전차 안도, 백화점의 지하 식품매장도, 들꽃이 다투어 피는 산길도 현장입니다. 현장은 문장의 무진장한 곡창입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의 귀로 듣고, 스스로의 몸으로 닿아서, 스스로 냄새를 느끼고, 스스로 맛보고……그런 오감의 꾸림을 이어나가기가 가능한 곳은 모두 현장입니다.
다만 책상 위에서 상상하면서 써진 묘사라도, 훌륭한 것이 있는 점은 받아들입니다. 작가 나카시마 마고토(中島敦)는 남태평양의 서사모아를 찾은 적이 없는데도, 서사모아를 무대로 한 불후의 작품 『빛과 바람과 꿈』을 썼습니다. 작가 다미야 토라히코(田宮虎彦)는 아시즈리미사키(足摺岬) 주변을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도, 명작 『아시즈리미사키』를 써냈습니다. 천부의 재능이라 할 밖에 없지요.
현장의 공기가 감도는 문장을 현장감 있는 문장이라 나는 내멋대로 말합니다.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의 문장에는 현장감이 있습니다. 무척 담담한 필치로 날카롭고 잘게 현장의 개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욕에 대해서 에쿠니는 씁니다.
“한여름의 어느 거리, 넘치는 햇빛, 짙은 푸르름. 공기 낱알 하나하나가 놀라울 만큼 생생히 살아있다. 큰 거리에서는 과일을 믹서에 갈아서 그대로 얼린 듯한 아이스캔디를 팔고 있고, 수박의 거기에는 부서진 씨마저 들어 있다.”
“한여름의 어느 거리, 목마른 공기, 행복한 바쁜 걸음. 잔뜩 걸린 빛, 코트, 선물 꾸러미, 크리스마스 송. 뜨겁게 가득 찬 밤. 사랑이라는 말이 어쩐지 미심쩍지 않게 되는 것이 한겨울의 어느 거리의 저력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한 단면이 있습니다.
“과일을 믹서에 갈아서 그대로 얼린 듯한 아이스캔디”의 존재는 정녕 현장입니다. “수박의 거기에는 부서진 씨마저 들어 있다”라는 데에서는 현장감이 있습니다.
“행복한 바쁜 걸음”이라는 것도 현장입니다. 뉴욕은 “피부로 좋아지는 거리”라고 에쿠니는 쓰고 있습니다만, 거리의 소리, 거리의 냄새, 거리의 배치, 거리의 흐름이라 말할 것이 섞여 만들어져 있는 화면에서, 어떤 구체적인 사물을 끌어낼까, 그것이 현장감각의 승부처입니다.
예를 들어 또 에쿠니의 작품에 주인공이 밀라노의 4층짜리 아파트를 찾는 묘사가 있습니다.
“건물에 한 발자국 들어서자 온도가 3도 가량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그늘 같은, 땅 속 같은 파낸 야채 같은 독특한 냄새. 완강한 이중문이 달려 있고, 오르내릴 때마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만큼 큰 소리를 내는 느린 엘리베이터.
훼데리카를 만난 것은 지난 크리스마스 이래이다.
금속의 도어가 열리자 동시에 마른 과일의 냄새가 흘러 나왔다. 벽 가득 달려 있는 것이다. 레몬에다 오렌지의 껍질, 시나몬, 정향(丁香).”
이런 자그마한 묘사 가운데서 에쿠니는 냄새에 대해서 쓰고, 온도에 대해서 쓰고, 엘리베이터의 두려운 듯한 소리를 쓰고 있습니다. 감각이 해방되고 있습니다.
현장감 있는 문장을 더 소개해 보지요.
저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은 그 저서 『센스 오브 원더』 가운데 아메리카 메인주의 별장에서 본 「밤바다」의 일을 쓰고 있습니다.
“깊은 밤에 불을 끈 깜깜한 거실의 커다란 전망 창에서 로져(어린 조카)와 함께 만월이 잠겨 가는 것을 바라본 일도 있었습니다.
달은 천천히 만(灣)의 저쪽으로 기울어 가고, 바다는 온통 은색의 불꽃으로 싸여있었습니다. 그 불꽃이 해안의 바위에 파묻혀 있는 운모(雲母)의 조각을 비추자, 무수한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듯한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해마다,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 가는 훌륭한 광경의 기억은, 그가 잃었던 수면시간을 채워주었던 나머지 훨씬 중요한 영향을 그의 인간성에 주었던 터라고 우리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밤바다’라는 현장에 몸을 두는 일은 잴 수 없이 중요한 것을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주는 것입니다.
만월이 잠긴다. 무한대의 저쪽에서 한 줄기 은빛 띠가 밀려옵니다. ‘온통 은색의 불꽃’입니다. 문장을 읽고 읽은 이의 마음은 현장, 곧 메인주의 깜깜한 해변의 별장지에 세차게 빨아 당겨지고 있습니다.
카슨은 어린 조카를 데리고 비 오는 숲에도 갔습니다.
“스펀지 같이 비를 충분히 빨아들인 외짝 순록(馴鹿)은 두께가 있는 탄력으로 두툼해져 있습니다. 로져는 크게 기뻐하며, 토실토실해 진 무릎을 꿇고 그 감촉을 즐기며, 이쪽저쪽으로 빙빙 달리고, 푹신푹신한 이끼의 융단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카슨은 어린 아이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연의 신비에 놀랐다는 소리를 지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의 놀라움이 어린 아이의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른에게 놀라운 마음이 없이는 아이에게 놀람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전(一轉)해서, 다음은 전시하의 베트남을 무대로 한 문장입니다.
작가 히라다카 켄(開高健)은 『빛나는 어둠』에서 공개사형의 정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형된 것은 흙에 더럽혀진 맨발로 선 베트남의 소년입니다. 베트콩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총살형 되는 것입니다.
“헌병 열 명의 열 정의 카빈총이 어린이를 쏘았다. 어린이는 무릎을 무너뜨렸다. 배, 가슴, 허벅지에 몇 군데 작은, 검은 구멍이 뚫렸다. 각각 구멍에서 천천히 선혈이 흐르고, 가는 실 같은 냇물이 되어 허벅지를 적시고, 보도블록에 맺혔다.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소리 없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천천히 흔들었다. 장교가 가까이 가서 회전식 권총을 빼 관자놀이에 한 발을 쐈다. 피가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솟구쳤다. 소년은 무너져 내리고, 기둥에서 밧줄로 매달려 움직이지 않았다. 뺨과 머리가 새빨간 피로 적시고, 피는 긴 실을 끌어서 콧등에서 추처럼 보도블록으로 떨어졌다.”
‘나’의 눈은 처형의 한 부분을 시종 냉정히 쳐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경 나온 소녀들의 일견 들떠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리고, 나아가 처형 전 우동을 먹는다든지 주스를 마신다든지 하면서 기다리는 군중의 모습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작품 가운데 ‘나’는 처형을 본 다음, 무릎이 떨리고 위가 뒤틀리며 괴로워 구토기가 솟아오릅니다. 다음 날 또 소년의 처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처형을 본 ‘나’는 “땀도 나지 않고, 떨리지도 않고, 구토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흔한 것인지 어쩐지. 이런 변화는 두 차례 처형 현장에 서 있고서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인지.
히라다카 켄은 베트남의 현장에서 석회산의 냄새를 쓰고, 어쩐지 참모습의 알려지지 않은 것의 썩은 냄새를 쓰고, 처형 종료 나팔의 신음을 쓰고, 자신의 손발이 떨림을 극명히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두려움, 인간의 약함, 인간의 엉성함, 인간의 비참함, 인간의 업,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 그런 것을 히라다카는 한결같이 응시하고 있습니다. 자신 또한 그 어리석은 인간의 한 사람이라는 초조한 생각을 가지면서 전쟁의 현장을 쓰고 있습니다.
현장을 쓴다, 이상의 중요한 점.
① 시각만이 아니라 취각, 청각, 촉각, 미각 등 전감각을 날카롭게 부려서 쓴다.
② 현장에서의 '놀라움'이 전해지는 듯한 문장을 쓰고 싶다. 다만 그 생각이 너무 세서, 과대한 표현이 되어서는 안 된다.
③ 세밀한 묘사에 마음을 쓴다. 히라다카 켄의 처형 묘사는 너무나 세밀해서 눈을 돌리고 싶어지지만, 그것이야말로 전쟁의 현장인 것입니다.
④ 현장에서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노력을 할 일.
7 작은 발견을 거듭한다
어떤 작은 일이라도 좋다. 매일 뭔가 발견하고, “아하, 그렇군”하고 감동을 하여 즐거워서 일하면, 노력도 즐거운 쪽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무카타 쿠니코)
이 무카타 쿠니코(向田邦子)의 말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문장의 일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경우, 의무감만으로 일한다면 얼굴빛이 가팔라집니다. 즐겁지 않으면 태도에 뭔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쪽이 좋다, 무카타는 생각하였습니다. 모두(冒頭)의 말은 이른바 일하는 여성에의 충고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좋다. “아하, 그렇군”하고 감동하고, 그것을 즐거워서 일하는 쪽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러므로 하루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진정 반쯤 재미 반쯤으로 일하자. 이 말은 무카타가 자기 자신에게도 들려주고 있는 마디 지움입니다.
직접 문장에 관련한 말은 아닐지라도 이 “날마다 작은 발견을 한다”라는 것은 문장을 쓰는 데에도 중요한 마음가짐이라 생각하는 것인데, 어떻습니까?
무카타는 “신은 세부(細部)에 머물러 계신다”라는 말을 자신도 에세이에 인용하고 잇습니다만, 세밀한 일에 눈을 멈추고 그것을 그리는 일로, 인생 그 자체 세상 그 자체를 그려버리는 수법에 뛰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삶 속에서 무언가 작은 일을 발견하고, “아하, 그렇군”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하며 그 일을 문장으로 쓴다.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들어 있는 사람 같습니다. 예를 들어, 스키장의 작은 산장에서 만난 개의 눈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극적인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 개가 식사중인 투숙객의 곁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고기 조각을 졸라댔다는 이야기일 뿐인데, 무카타의 펜이 닿자 이런 일이 훌륭한 정경묘사와 함께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잡종견은 돼지고기 국물 접시를 손에 든 무카타의 곁에 와서, 목을 꿀꺽거리며 말하듯이 다가섭니다.
“그만 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참으면서 조금 더 이를 물었습니다. 그는 몸을 부드럽게 내 무릎에 기댈 듯이 하면서 한 번 더 꾸욱 목을 울렸습니다. 그 새까만 눈은 필사적으로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드디어 지고 고기를 꺼냈습니다. 이래서 나는 세 점뿐인 고기를 모두 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맺음은 이렇게 됩니다.
“살기 위해서 전신전력을 다해서 한 조각 고기를 노리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을 텐데, 전신으로 명연기를 보이는 저 개의 눈을 나는 때때로 생각해 내곤, 지금 나는 저만큼 간절히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작은 산장에서 개의 눈을 보았을 때 ‘이건 쓸만하다’라고 생각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개의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새까만 눈을 보고 있는 가운데, 번뜩이는 것이 있었겠지요. ‘작은 발견’입니다. 그 눈이 말을 거는 것을 찬찬히 관찰하고, 그 모양을 가슴의 포켓에 꼭 담아둔 것은 분명합니다.
<삶은 달걀>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400자 원고지로 4매쯤 되는 짧은 것인데, 이 소품에서 무카타 쿠니코는 ‘사랑의 형식’을 아름답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소학교 동급생으로 외발의 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한쪽 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풍 때, 반장이었던 소녀 쿠니코가 있는 곳에 그 아이의 어머니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거 다들”이라고 작은 소리로 되풀이하면서 내밀며 말했습니다. 쥐색의 때 묻은 보자기였습니다. 안에 헌 신문으로 싼 많은 양의 삶은 달걀이 있었습니다. 발이 안 좋은 내 아이는 소풍을 가면서 아마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되겠지. “폐가 많습니다”라는 마음이 담긴 삶은 달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소학생 쿠니코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같은 아이가 운동회에서 달렸습니다. 유감스럽게 한 사람만 남겨졌습니다. 그 아이가 달리는 것을 그만두려 했을 때, 여선생이 뛰어 나와 함께 달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골인한 아이를 안아 들듯이 해서 교장이 있는 천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상품으로 연필이 건네졌습니다. 그 광경을 소녀 쿠니코는 역시 그렇게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재능으로 넘치는 시나리오 라이터는 날마다 마음의 포켓에 그날의 ‘작은 발견’을 챙겨 넣고, 그것을 중요하게 모아두는 것이지요. 생활의 쇄사(?事)1)에 강한 호기심을 갖고, 쇄사 속에서 인생의 보물을 찾는 일의 천재였습니다.
그 밑에 있는 것은 본질을 보는 눈의 깊이입니다. 멀리 보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야구선수 이치로처럼 동체시력(動體視力)에 뛰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무카타 쿠니코처럼 사물의 본질을 깊은 곳에서 잡아내는 시력에 대해 뭐라 말하면 좋을까, 작가나 시인에게는 그런 깊은 통찰시력을 가진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문장 쓰기 이상으로 이 통찰시력은 실로 중요하다 생각하고, 이 시력은 닦으면 닦을수록 강해져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Ⅱ 자, 쓰자
1 사전을 손 안에 둔다
『작문교실』에 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으시는 것은, 대담불적(大膽不敵)이라고나 할까, 세키가하라(關ヶ原)의 합전(合戰)에 창이나 칼을 전부 두고서 맨몸으로 달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노우에 히사시)
이와테현(岩手縣) 히도제키시(一關市)에서 열린 작문교실에서의 발언입니다.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는 교실에 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사전 없이 문장을 쓰려 하는 것은 차도 없는데 운전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도 충고합니다.
사전에는 실로 좋은 말이 쓰여 있다는 예로서 이노우에 히사시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토우토(うとうと)’와 ‘우츠라우츠라(うつらうつら)’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반쯤 잔다든지 반쯤 깨었다든지, 반각반수(半覺半睡)의 상태일 것 같음은 압니다. 그러나 문장을 쓸 때에 어떻게 달리 써야 할까.
거기서 사전을 폅니다.(이 경우의 사전은 오노 스스무[大野晋]ㆍ다나카쇼오[田中章夫]의 『카도가와[角川] 필휴 국어사전』입니다.) '우토우토'는 잠자는 쪽에 중점이 있고, 얕더라도 짧더라도 기분이 좋다, 라고 나옵니다. '우츠라우츠라'는 그 반대로 깨어 있는 쪽에 중점이 있습니다. 자고는 싶은데 깨어 있습니다. 열이 난다든가 걱정이 있다든가 해서, 좀체 잠들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를 '우츠라우츠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노우에 히사시의 설명, 아니 국어사전의 설명입니다. 과연, 그렇군, 한 가지 요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쓰면서 헤매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저 사람의 특징은? 이럴 때의 한자는 特徵일까 特長일까?” “범인을 추급한다, 이럴 때는 追及일까 追求일까?” “이윤 추구의 경우는 어느 쪽일까?” 이럴 때는 국어사전이나 용어사전도 있지만, 신문사가 출판한 ‘용어수첩’도 편리합니다. 나는 『아사히신문 용어길잡이』을 쓰고 있습니다. 『길잡이』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특장=특별한 장점. 특징=특히 눈에 띄는 점.
“찬스에 강한 것이 저 선수의 특장이다”와 같이 특장은 장점, 좋은 점을 들 때에 씁니다. 특징의 경우는, “술집이 많다는 것이 이 거리의 특징”과 같이 좋고 나쁨과는 별도의 기준으로 ‘눈에 띄는 점’을 들 때에 씁니다. ‘추급(追及)’은 바싹 몰아넣는 것으로, 범인추급, 책임추급이라 씁니다. 이윤의 추구는 추구(追求)라고 씁니다. ‘추구’는 따라가서 얻어내는 것으로, 목적을 추구라 할 때도 씁니다. 진리의 추구가 되면 이것은 추구(追究)로, 일본어의 이것저것을 추구(追究)하는 것은 꽤나 어렵다, 라는 말로 납득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책상 위에는 『거꾸로 찾는 광사원(廣辭苑)』이라는 편리한 사전도 있습니다.
말씀 드리자면 이것은 ‘단어를 찾기 위한 사전’입니다. 어떻게 단어를 찾는 것일까?
날씨가 안정되지 않고 맑아지나 싶으면 비가 내리고, 내리나 싶으면 다시 맑아지는, 이런 때가 있습니다. 이런 비를 무엇이라 말할까?
보통 사전에서 ‘아메(雨, 비)’를 펼쳐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메(비)를 단어의 끝에 나오는 경우의 단어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거꾸로 찾는 사전이 활약합니다. 먼저 ‘아메
(雨, 비)’를 거꾸로 해서
1) 일본어에서 特徵이나 特長은 발음이 똑같은 ‘토쿠죠우’이므로 발생한 현상이다.
2) 일본어에서 追及이나 追求는 발음이 똑같은 ‘츠이큐우’이므로 발생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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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에게는너무나유익한글인것같습니다~잘읽고실천해보렵니다..^^
최경아님 반갑습니다^^* 유익한 정보가 많으니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시면 번거로우시더라도 닉은 실명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알겠습니다...빠른시일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