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
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황제가 카파도키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 카이사리아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역주. 율리아누스 황제는 361-363년 재위했으며, 한때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36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공연히 이교 행위를 하여 배교자가 되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군량 부족으로 후퇴하였으며,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하여 사망한다.)
당신 카이사리아의 주교는 우리 교회의 위대한 교부인 大 바실리우스 성인(329-379년, 축일 1월 2일)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의 관습과 예절을 잘 알고 있었던 바실리우스 주교는, 황제가 도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말을 타고 성 밖으로 황제를 맞이하러 나갔다. 바실리우스 주교는 정성스럽게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하며, 보리로 빻은 빵을 선물로 바쳤다.
하지만 오만한 황제 율리아누스는 눈을 내리깔고서 주교의 예물을 매우 하찮게 여겼다. 맛도 없는 그런 천한 음식을 먹는 것은 황제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주교가 자기에게 귀하고 값진 선물을 바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게 실망한 황제는 바실리우스 주교에게 건초더미를 답례로 하사했다.
“주교님이 가축 여물을 선물로 주셨으니, 저 또한 주교님
께 같은 것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현명한 바실리우스 주교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공손 하게 다음과 같이 황제에게 대답했다.
“폐하, 저는 그저 저희들이 매일 먹는 것을 폐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제 저는 폐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짐승이나 먹는 것을 저에게 먹으라고 주셨는데, 폐하께서 이러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세상 그 누가 폐하를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에 황제는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한때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황제가 배교의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주교는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까지 했다. 황제는 크게 노여워하며 주교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내 말 잘들으시오. 나는 지금 내 원수인 페르시아를 치러가는 길이오.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내 꼭 카이사리아에 다시 들러 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놓을 것이오. 내가 맹세컨대 그날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오.”
이것은 주교와 도시 주민 모두를 몰살시키겠다는 무서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 말을 내뱉은 다음 황제는 말에 올라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도시를 파괴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하겠다고 한 황제의 말에 주교는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교는 성당으로 가서 성모 마리아께 이 도시를 구해 주시라고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바실리우스 주교는 밤을 새워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하느님께서 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에게 황홀경의 은총을 내려주셨다고 한다. 황홀경 중에 주교는 카이사리아의 성당에 휘황찬란한 천사들의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천사들의 무리 한가운데에는 천사들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여인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메르쿠리우스를 내 앞에 불러오너라. 그가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내 아들과 나의 영광을 위해 저 괘씸한 율리아누스에게 보복할 임무를 그에게 내릴 것이다. 저 배교자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당장 메르쿠리우스가 가서 저 간악한 황제를 잡아다가 무릎을 꿇게 하라!”
거룩한 동정녀께서 호명한 메르쿠리우스는 누구일까? 그는 율리아누스와 바실리우스보다 한 시대나 앞서(225-251년경) 살았다. 고결한 성품을 갖추고 죽음까지 무릎쓸 정도로 용감한 로마군 장교였다. 데키우스 황제와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세 때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참수당하여 “군인 성인”으로 불렸다. 하느님께서는 메르쿠리우스의 영혼은 하늘 나라에 들어올리시고, 그의 육신은 군인의 갑옷과 창과 방패로 무장한 그대로 카이사리아의 성당에 두셨다.
성모님께서 명령을 내리자, 정말로 그 자리에 완전무장을 한 병사가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들었는데, 그의 갑옷과 무기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메리쿠리우스가 동정 마리아 앞에 나와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자. 성모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당장 가서, 성자이신 내 아들과 나를 모욕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하려는 가공할 계획을 꾸미는 무법자를 가만두지 마라!”
성모 마리아의 기사는 분부를 받고 즉시 밖으로 나갔고, 바실리우스가 본 환시는 여기서 그쳤다. 환시를 보고 나서 바실리우스는 크게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에, 메르쿠리우스가 정말로 율리아누스 황제를 잡으러 떠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메르쿠리우스의 시신이 담긴 관이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실리우스가 저 거룩한 순교 성인의 관을 열어보니 관은 정말 텅 비어있었다!
즉시 바실리우스는 메르쿠리우스 성인이 썼던 창과 방패를 보관해둔 곳으로 달려갔다. 성물을 보관한 함을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주교는 관리인들에게 성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물었지만, 그들이 행방을 알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정말 어젯밤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말입니다. 주교님.”
그제야 바실리우스 주교는 환시에서 본 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깨닫고 안심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기적은 그다음 날에 일어났다. 그다음 날 아침이 밝자, 관에 메르쿠리우스의 유해가 있었고, 성인의 창과 방패도 다시 제자리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성당 관리인들은 ㅇ;번에도 성인의 유물이 어쩧게 언제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바실리우스 주교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창에는 붉은 피가 축축하게 젖어있어 마치 방금 막 누군가를 찌른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황제의 군단에서 한 사자(使者)가 와서,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일어난 일을 카이사리아 주님들에게 전해주었다.
“우리 군대는 매우 용감하게 전투를 치렀고 승리하고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처럼 우리 군의 맨 뒤에서 겹겹이 호위를 받으며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멀리 적군 진영에서 날쌘 준마를 탄 기병 하나가 이쪽으로 돌진해왔던 것이다. 더욱이 그 기병은 달려오면서 이상하게도 우리 병사를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황제 하나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병은 곧장 달려와서 황제에게만 큰 상처를 입혔다. 그는 말도 잘 다루고 창술도 매우 뛰어났다. 그는 홀로 우리 군의 진영을 뚫고 정말로 날쌔게 돌격하여 번개처럼 단번에 황제를 창으로 찔렀다. 창은 황제의 몸을 미끄러지듯 관통해서 창의 절반이나 뚫고 나갈 정도였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공포에 질렸지만, 그 기병은 말을 몰아 전장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적군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용맹한 병사가 대체 어디서 왔으며 또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배에서는 피가 샘물처럼 솟구쳐 나왔는데, 곁에 있던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숨을 거둘 때 매우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황제는 쏟아지는 피를 무모하게도 자기 손으로 한 웅큼 받아서 허공에 뿌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갈릴래아 사람 예수야! 어째서 이 마지막 순간에 네가 내게 이런 짓을 하느냐!’
이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알게 된 것은, 저 배교자 황제 율리아누스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자기 죄를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비참한 황제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전장에서 병사들은 황제가 가진 것을 다 약탈했다고 한다. 아군 중에서 황제의 시신을 챙기는 이가 한 명도 없었고, 땅에 묻어주는 이도 없어 완전히 벌거벗겨진 그의 시신을 덩그러니 내버려 두었다. 결국 황제의 시신은 그가 정복하려고 했던 원수들인 페르시아인의 손에 넘어갔다. 온 땅을 호령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그가 가장 불행한 노예보다도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은 푸줏간에서 고기를 바를 때처럼 로마 제국 황제의 살가죽을 온통 벗겨냈다. 그리고 벗겨낸 살가죽에 무두질을 하고 색을 칠해서 왕실 바닥 양탄자로 썼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페르시아인들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율리아누스에게 모욕을 주었다.”
로마 제국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죽은 다음 이렇게 페르시아 왕에게서 엄청난 모욕과 수치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거부했을뿐더러 신자들을 몰살하려는 계획까지 꾸몄으므로, 자기가 그토록 미워했던 원수에게서 거꾸로 수치를 당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니 세상 모든 언어로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도록 합시다!
박규희 옮김
마리아 2023년 3·4월 통권 2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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