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3. 불법 계엄에 의한 국헌 문란 행위가 벌어진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며 공수처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하는 것을 경호처가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 날이다. 인간은 자신이 한 행위에 도덕적, 법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구차하고 자기 배반적인 책임 회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말끝마다 공정과 정의를 밥먹듯이 외친 자에게서 확인하고 있다.
자라나는 이 땅의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목사라는 자가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법률가라는 자가 극단적인 유튜버들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한 배를 타고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들을 중인 환시리에 얼굴 두껍게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체화된 방식으로 공연하듯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하늘의 그물이 성근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무엇도 새어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사필귀정이고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미래는 눈 뜨고 생각하며 맞이하는 자의 것이다. 맹목의 욕망과 탐욕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이다.
하여,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중학교 3학년 때쯤일 거다. 제천에서 다니던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태백에서 전학을 갔을 무렵이겠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 3명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이런 질문을 하시곤 막스 베버,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칼 맑스일 것이라고 스스로 답하셨다. 40년도 더 넘은 그 기억이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다니고 세상을 살면서도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기하기 좋게 몇 가지, 몇 명, 이런 식으로 규정한 때문일까.
그때는 잘 몰랐지만 한 인간의 전기적 요소와 학문적 산출물과 그 사회적 영향력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인간의 삶의 흔적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할 일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열어젖힌 인물이다. 도식적으로 많이 활용되는 이항(에로스와 타나토스), 삼항 요소(이드 에고 슈퍼에고), 리비도, 승화,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들. 라캉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평가들. 융과 아들러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다양한 영역을 가능하게 한 원조격인 인물. 솔직히 말하거니와 나는 프로이트를 잘 모른다. <정신분석입문>, <문명과 그의 불만> 등 몇 가지를 읽었지만 단편적인 앎일 뿐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적인 관점에는 많이 공감하기도 한다.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인간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유물론적 관점에는 다소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는 관점들을 검토할 마음을 갖고 있다.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구별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죽고 싶다. 우리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자 노력하고 싶다. 메멘토 모리! 우리모두에겐 죽음을 생각하고 삶의 자리를 잘 정돈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