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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
붕괴된 삼풍백화점 A동의 전경. 1995년 6월 29일, A동의 붕괴되자 1,500여 명 대부분이 그대로 매몰되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지하 주차장의 차량과 주변을 지나가던 차량들도 콘크리트에 깔렸다. 사고 현장 주변은 파괴된 차량, 도로까지 날아간 콘크리트, 사상자들, 응급차량과 구조 기관의 인력들, 취재진 등으로 매우 혼잡했다.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부에 있던 백화점 종업원과 고객 등 1445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만 502명에 달했으며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이 발생했다. 국내에서는 단일 사건 최대 인명 피해로 기록되었으며, 세계적으로는 2013년 천여 명이 사망한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붕괴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건물 붕괴사고 사상 최다 사망사고로 꼽혔다. 재산 피해액은 2700여 억원으로 추정됐다.
조사 결과 삼풍백화점은 설계, 시공부터 부실공사로 지어졌고 유지 관리 과정에서도 무리한 증축과 확장 공사를 거듭하는 등 총체적인 부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용도 변경 등을 눈감아준 해당 구청 공무원의 부정부패도 드러났다. 경영진이 사고 두달 전부터 있었던 각종 붕괴 조짐에 응급조치로만 대응하고 사고 당일에도 대피나 건물 폐쇄 등을 지시하지 않고 안이하게 대응했던 것도 피해 규모를 키웠다. 1995년 11월 8일 서울지검은 '삼풍 붕괴 백서'를 발표했는데, 검찰은 이 사고를 설계 결함, 부실시공, 유지관리의 과오 등의 여러 부실 요인들이 5년여에 걸쳐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해서 일어난 ‘전형적인 인재’로 결론지었다. 부실설계, 부실시공에 의한 인재로 사고원인이 매우 복합적으로 설계와 시공 부실, 유지관리 부실, 건축주의 독선, 부정부패와 뇌물 관행을 기본으로 한 건설업계의 비리 등 총체적 부실의 결과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 안전 평가가 실시되었고, 긴급 구조 구난 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 부산, 광주에 설치되었으며 '재난안전법'이 제정되었다.
삼풍백화점
삼풍건설산업의 유통사업본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창업주인 고 이준 씨가 회장을, 둘째 아들 이한상 씨가 1991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삼풍백화점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 청사 맞은편의 당시 국내 최고가 아파트 중 하나인 삼풍 아파트 단지 내 부지에 자리잡았다. 수입 의류와 가구 등 고가의 제품을 판매하는 호화 백화점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4년 연 매출액은 1646억 원으로 전국 백화점 순위 7위에 올라있었다. 백화점 규모는 지상 5층 지하 4층에 연면적 2만2386평(매장 면적 9387평)의 크기로 단일 매장 규모로는 서울 소공동의 롯데백화점 본점에 이어 전국 2위였다. 백화점 건물은 중간에 구름다리로 붙은 A동(매장)과 B동(스포츠레저시설)으로 나뉘어 지어졌다. 무너진 A동 지하 4층에는 기계실 및 전기실, 지하 2~3층은 주차장, 지하 1층에는 가정용품 ・ 식품 ・ 슈퍼마켓 ・ 스택, 1층은 잡화 ・ 수입상품, 2층 여성의류, 3층 남성의류 ・ 아동 ・ 스포츠, 4층 문화 ・ 가전용품 매장으로 운영했고 5층에는 식당가가 있었다. 총 556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었으며, 직영 종업원 700여 명과 입주업체 판촉사원 300여 명 등 1천 여 명이 근무했다.
붕괴 조짐
서울시에서 발간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백서'에 따르면 삼풍백화점은 개장 직후부터 건물 곳곳에서 누수, 균열, 진동 등의 붕괴 조짐이 보였다. 특히 A동 5층 곳곳에 누수 현상이 생겨, 백화점 측은 물받이를 만드는 등의 누수방지공사를 시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사고 발생 두달 전인 4월 경에는 5층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 경에는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바닥이 내려앉는 현상이 나타났고, 6월에는 4층 조명코너 등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으로 진열된 조명기구가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발생 9일 전에는 지하 식당이 좌우로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났고, 5일 전에는 5층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3일 전에는 가스 누출 사고도 있었다.
붕괴 당일 상황
사고 전날인 1995년 6월 28일 밤 야간 경비를 서던 경비원은 백화점 5층 식당가에 있는 전주비빔밥집 '미전' 바닥에서 폭 1m, 깊이 20cm 규모의 함몰 흔적을 반결하고 다음날인 29일 아침 8시쯤 시설 관리직원에게 보고했다. 시설 직원 10여 명은 A동 5층 춘원식당의 바닥이 돌출하고 천장이 침하된 것을 확인했다. 당시 건물 천장은 내려 앉아 기둥이 천장을 뚫고 솟아오른 상태로 되어 있었으며 문짝이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또 옥상바닥의 시멘트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있고 군데군데 밑으로 처져 물이 고여 있었다. 10시부터 오후 1시 사이에 4,5층에서 '꽝'하는 파음이 들리면서 천정에 금이 가고 내려앉는 것이 목격됐다. 11시부터 정오 사이 5층 식당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고 바닥이 꺼졌다. 이에 백화점 경영진은 5층 식당 대부분과 사무실, 4층 귀금속 코너의 영업을 중단시키고 출입을 통제했다. 2시께 이준 회장 등 임원들이 참석한 중역회의가 열려 5층 균열 상황이 보고됐다. 이 자리에서 경비조장이 '5층이 무너질 것 같다'고 말하자, 임원이 힐책하며 보안 유지 교육을 시킬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오후 3시께 현장을 찾은 구조기술사는 '더이상 붕괴위험은 없다'면서 금일 폐점 후 응급조치를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오후 5시 40분 경 4층 천정이 큰 소리가 나며 움직였고 5층 에스컬레이터 쪽 천정에서 시멘트가 떨어졌다. 5시 49분 쯤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5시 52분 경부터 A동 5층 북쪽 끝부터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5층의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고객들은 영문을 모른 채 대피하기 시작했으나, 건물은 5층부터 전 층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불과 20초 만에 완전히 붕괴됐다.
피해
붕괴 당시 1층 잡화매장과 2,3층 의류매장, 4층 학용품 매장에는 고객이 많지 않았지만 5층 식당가와 지하 1층 슈퍼마켓 및 매장 등에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주부들이 많았다. 또 전 층에는 680여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붕괴와 함께 매몰됐다. 사망자를 성별로 살펴보면 여성이 396명이었고 남성이 106명이었다. 연령별로는 21~30세가 258명, 31~40세가 80명, 11~20세가 71명, 10세 미만의 아동이 14명이었다. 사고 현장은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 구조물이 수북히 쌓이고 인근의 삼풍 아파트, 서울고등법원, 우면로 등으로 파편이 튀어 주변을 지나던 행인 중에서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재산 피해는 건물 900억 원, 시설물 500억 원, 동산 300억 원, 양도세 1000억 원 등 2,700여 억으로 추정되었다으로 추산됐다. 피해보상액은 인적 피해보상비 2,971억 원, 물적 피해보상비 820억 8,500만 원이 발생했다.
건설과정
삼풍백화점은 9월에 착공, 1989년 11월 완공 후 1989년 12월 1일 개장했다. 설계와 감리는 우원종합건축이 맡았고, 공사 과정에서 건설사가 바뀌었다. 삼풍백화점의 모 회사격인 삼풍건설이 기반 다지기 공사를 한 뒤에 우성건설이 골조공사를 공정을 진행하다 삼풍건설이 이어받아 완공했다. 이 때문에 삼풍백화점 붕괴 후 두 건설사 사이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공방이 벌어졌다. 우성건설 측은 검찰조사에서 백화점 쪽에서 잦은 설계변경을 요구하는 데다 공사비도 맞지 않아 4층까지의 기둥, 슬라브, 외벽만 짓고 89년 1월 계약을 해지했다고 주장했다.
붕괴 원인부실공사
삼풍백화점 건물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는 보가 없이 설계된 무량판(플랫슬라브) 구조의 건축물이다. 이 구조는 보를 설치하는 대신 슬래브를 두껍게 시공하고 기둥 주변의 슬래브를 지판으로 보강하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이 구조는 위로부터 하중이 가해질 경우, 기둥 위에 얹힌 슬라브판이 기둥과 맞닿은 부분만을 빼고는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펀칭세어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건축계획과 구조계산을 비롯한 건축설계, 시공, 건물 완공 후의 유지 관리 등 전 과정에서 건물의 구조 안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으로는 △구조계산 미반영 구조설계도서 작성 △설계도 미완성 상태에서 공사 착공으로 시공 중 빈번한 설계 변경 △슬라브 상하부 철근 배근 간격유지 부실로 슬라브 내력 감소 △무량판 구조에서 지판설치 누락 △내력벽과 슬라브 연결 철근의 정착 부실 △과적하중 적재에 의한 설계 하중 초과 △잦은 용도 변경에 의한 구조재 손상 등이 꼽힌다.
1) 빈번한 설계 변경
삼풍백화점 건물은 설계시 '삼풍랜드'라는 명칭의 대단지 종합상가로 건설될 예정이었으며, 지하 4층에 지상 5층의 일반 상가로 건축 허가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건물은 건축 허가 때의 설계도와 다른 별도의 설계도면를 작성해 시공됐다. 그나마도 사전에 설계도면을 확정하지 않은 채 공사를 시작한 뒤 공사진행 중 층수별로 수시로 도면을 작성했다. 삼풍은 1990년 7월 27일 준공검사시까지 용도 변경 및 면적 확장 등을 위한 3차례의 설계 및 용도변경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과중한 추가 하중이 부가되었을 뿐 아니라 내력벽 등을 임의로 절단, 파손하여 구조부채에 큰 손상을 가했다. 이러한 설계변경에 대해서는 공사 완료 후 서초구청으로부터 편법으로 한꺼번에 사후 승인을 받았다.
2) 부실 시공
기둥 직경, 슬래브 철근 배근상태 등 모두 11곳에서 설계도면이 구조계산서와 달리 작성됐다. 4,5층 에스컬레이터 주위기둥의 경우 구조 계산서 상에는 직경 80cm 기둥에 직경 22mm 짜리 철근 16개를 배치토록 되어 있으나 설계도 상에는 기둥 직경 60cm에 철근 8개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또 외곽 기둥과 연결된 슬래브의 철근도 구조계산서에는 19mm짜리 철근 28개를 배근토록 되어 있으나 설계도에는 22mm 철근 12개로 되어 있다. 또 옥상과 5층 바닥 등 거의 모든 슬래브의 상부 철근이 정상적인 위치보다 4~6cm 정도 가라앉은 상태로 시공되어 슬래브의 내력이 크게 약해졌다. 또 최초로 균열이 시작된 5층 기둥 중 하나에는 상부에 시공하도록 되어 있는 지판 시공도 누락됐다. 또 기둥역할을 하는 내력벽과 슬래브를 연결해주는 슬래브 상부 철근은 지지력을 높이기 위한 후크 처리를 하지 않은 채 무려 39cm나 짧게 시공했다.
3) 과도한 하중 적재
문제가 된 5층은 애초의 설계와 전혀 다르게 지어졌다. 건축허가 신청 때 제출된 설계도에서는 백화점 5층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계획되어 외벽 철골구조이며, 지붕이 대부분 유리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5층 외벽은 비용은 싸지만 철골구조보다 약하고 더 무거운 콘크리트로, 지붕은 슬라브로 바뀌면서 초과 하중이 발생했다. 게다가 이 공간을 식당가로 변경하면서 대형 냉장고 및 주방, 온돌바닥, 칸막이벽이 신설되어 하중이 대폭 늘어났으나 별도의 보강이 없었다. 1991년 10월 슬라브 지붕에 B동에 설치하도록 설계되어 있던 냉각탑과 소음기 등 총 200여t 무게의 구조물을 옮겨 설치하며 하중을 늘렸다. 특히 냉각탑을 옮길 때 완전 분해해 옮기지 않고 바퀴를 달아 이동시키면서 슬래브를 더욱 손상시켰다. 그 결과 5층의 구조가 심각하게 변형되었다.
4) 구조재 손상
삼풍백화점은 개관 이후에도 매장 확대를 위한 구조 변경을 계속했다. 공간의 확대를 위해 벽을 헐고, 설계에 없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바닥을 뚫었기도 했다. 5층 식당가의 환기통 설치를 위해 옥상 바닥을 받치는 북측 내력벽 160cm 중 절반 이상을 잘라내 지지력을 저하시키기도 했다.
5) 형식적 감리
설계와 감리를 맡은 우원종합건축은 삼풍건설이 감리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물 골조공사가 끝날 때까지 상주감리를 하지 않았고 골조공사 후에도 무자격자에게 공사 관리감독을 맡겼다. 그러고도 중간검사나 준공검사를 성실하게 감리한 것처럼 허위 현장 조사서를 작성해 관할 구청에 제출했다.
행정기관 유착
삼풍백화점의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고 무단 설계변경을 눈감아 준 사실이 드러났다. 삼풍은 1989년 11월 원래 설계와 달리 판매시설 2천여㎡를 무단으로 증축해 서초구청으로부터 사후 승인을 받았다. 또 같은달 30일 건물에 대한 임시 사용 승인과 백화점 개설허가를 동시에 받아내 1989년 12월 1일 백화점을 개정했다. 정식 준공허가는 9개월이 지나서야 받았다. 1994년 10월 건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운동 위락시설 등 1만1천여㎡를 판매시설로 용도 변경하고 지하층 672㎡를 증축하는 공사 허가도 받아냈다. 무단 설계변경 신청을 승인해주는 등 1989년 말 삼풍백화점의 세차례 용도변경 및 가사용 승인을 내주고 뇌물을 받은 서초구청장과 서초구청 공무원 등 12명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 등으로 기소됐다. 1989년 당시 이충우 서초구청장과 주택과 직원 정모씨 등은 백화점의 세차례 용도변경 및 가사용 승인을 내주고 각각 1300백만원과 300만원 씩을 받은 혐의다. 황철민 전 서초구청장도 백화점으로부터 12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 중 직접 뇌물을 받은 두 전직 서초구청장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겉핥기 안전진단
서울시는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일선 구청에 각종 시설물에 대한 안전 점검을 지시해 삼풍백화점도 1994년 10월과 11월, 그리고 1995년 3월 등 불과 반 년 사이에 무려 세 차례나 서초구청으로부터 안전점검을 받았다. 그러나 안전점검에서는 전혀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구조 과정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벌어진 구조 과정은 긴급 구조 체계가 갖춰지지 못한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 정부는 소방본부, 군부대, 경찰, 자원봉사자 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통합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구조지휘, 현장통제, 사상자 유품관리나 유가족, 자원봉사자에 대한 처우 등에서 미숙함을 드러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삼풍백화점은 각층 슬라브가 지상 5층부터 시루떡처럼 포개지며 지하 4층까지 그대로 주저 앉아 콘크리트와 철근 더미에 눌린 부상자들이 구조를 요청하는 아비규환의 상태였다. 또 지하 3층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심한 유독가스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붕괴시 발생했던 분진과 석면가루가 자욱해 시야확보도 어려워다. 게다가 지하 구조작업의 경우 지상의 사상자 구조작업 등에 의한 진동으로 추가 붕괴위험도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구조 현장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의 구조 현장. 소방본부, 군부대, 경찰, 자원봉사자 등이 구조 작업을 벌여, 사고 7시 만에 건물 잔해 더미에 있던 생존자를 구출했다. ⓒ 최광모/wikipedia | CC BY-SA 4.0 사고 직후 현장을 지나던 행인 및 인근 주민들이 부상자들에 응급조치를 하고 지나던 승용차나 택시를 세워 가까운 시내병원으로 후송하는 등의 자발적인 인명 구조활동이 벌어졌다. 사고 소식이 알려진 후에는 소방본부 뿐 아니라 경찰, 군부대의 구조 요원 등 각급 유관 기관의 인력들과 해병전우회, 관악산 구조대 등 자생적으로 조직된 자원봉사자들이 구조에 나섰다.
그러나 구조 현장은 극도의 혼란을 보였다. 초반에 구조에 투입된 인원은 5500명에 차량 340대에 이르렀는데, 현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력이 구조작업에 투입되면서 유관기관 간 협조가 이뤄지지 못했다. 소방당국도 전문기술팀을 편성하기는커녕 사고 수습에 가장 필요한 전기드릴, 산소용접기, 절단기 등도 구비하지 못해 초기 인명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 주변은 붕괴시의 폭풍에 의해 파괴된 차량과 도로까지 날아간 콘크리트 더미와 사상자들, 응급차량과 구조구난기관의 인력들, 취재진이 모여들면서 교통이 극도로 혼잡했다. 경찰병력도 현장의 통제나 질서유지보다는 인명구조에 몰두하면서 구급차량이 현장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사상자 수송을 위한 교통로가 확보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환자 이송도 무질서하게 이뤄졌다. 환자의 인적사항과 이송 병원을 확인하지 않았고, 각 병원의 응급병상의 상황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사고 직후 사상자 후송은 대부분이 삼풍백화점 인근의 강남성모병원 등에 집중되어 응급병상이 꽉 차는 바람에 이후 중상자가 구조되도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한편 사고 이후 정부는 1995년 7월 재난관리법을 제정해 재난관리체계를 법제화하고 지방자치단체에도 재난 전담 조직을 신설하도록 했다. 대형 재난에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따로 정비한 중앙119구조대가 서울, 부산, 광주에 신설됐다.
처벌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고 책임을 물어 25명이 구속됐다. 이들의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 업무상횡령, 뇌물공여 및 뇌물수수, 허위공문서작성 등 다양했다. 1996년 8월 23일 대법원 확정 판결에서 삼풍그룹 회장 이준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적용돼 징역 7년 6월이 확정됐다. 사장 이한상은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됐다. 뇌물을 받고 삼풍백화점의 설계변경을 승인해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와 황철민은 뇌물수수죄로 각각 징역 3년에 추징금 1300만 원과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1200만 원이 선고됐다. 2003년 4월 출소한 삼풍그룹 회장 이준은 당뇨와 고혈압, 신장병으로 투병하다 출소 후 6개월만인 2003년 10월 사망했다.
사고 이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는 희생자 502명의 이름이 새겨진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이 있다. 당초 서울시는 사고 직후 유족들에게 사고 현장에 위령탑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예산 부족과 일부 주민의 반대로 무산됐다. 삼풍백화점 현장은 기업에 매각되어 2004년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 상태다.
참고자료
양재시민의 숲 군번 없는 영웅의 탑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참배
계절은 눈깜짝할 사이에 봄을 지나 녹음이 짙어지는 성하의 길목으로 들어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자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바이콜 전사 여섯 명은 뜻을 모았다. 나라를 위해 못숨 바친 순국선열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양재시민의 숲에 자리한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으로 참배 라이딩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넷을 포함해 모두의 마음속엔 유독 각별한 애국심이 차올랐다. 여정의 시작점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합수부였다. 푸른 하늘 아래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페달을 밟는 발걸음을 가볍게 거들었다.
탄천을 따라 나란히 내달리는 길, 주변으로는 2030년을 목표로 한 수변공사 조성이 한창이다. 멀지 않은 미래애 탄천과 잠실, 한강을 잇는 푸른 보행축이 완성되면 시민들의 삶도 한층 더 풍요해질 것이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싱그러운 녹색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나비와 새들이 어우러진 여름 풍경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그늘이 적은 탄천 자전거길을 한달음에 12km 달려 둔전교 쉼터에서 짦은 숨을 골랐다. 휴식은 언제나 지친 몸을 따스하게 다독여준다. 에너지를 채운 뒤 상적천 자전거길을 지나 나무데크길로 들어서니 대왕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곳이었으나, 68년만인 2026년 봄, 시민을 위한 수변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한층 더 반갑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청계산 옛골 등산로를 거쳐 여의천을 따라가니 마침내 나무가 울창한 양재시민의 숲에 도달했다. 숲의 안쪽, 정적 속에 서 있는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앞에 다다라 경건한 마음으로 거수경례를 올리고 묵념을 드렸다. 유격백마부대는 6.25 전쟁 당시 계급도 군번도,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이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일어선 26,00여 명의 반공 애국청년과 학생들이었다.
500여 회의 교전 속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으나, 그 과정에서 552명의 고귀한 생명이 이 땅에 피를 흘렸다. 그들이 남긴 호국정신과 목숨을 건 유격전의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제8240부대와 국방부 제8250부대를 거치며 정규군으로 편입된 유격대의 실전 경험은 1958년 대한민국 최초의 특수부대인 '제1전투단'을 탄생시키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 뿌리는 오늘날 '안되면 되게 하라'는 슬로건 아래 조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모태로 찬란하게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 뒤에는 군번 없는 군복을 입고 이슬처럼 사라져간 백마부대원들의 숭고한 희생 숨쉬고 있다. 이름 모를 섬의 모래사장에 새겨졌던 그들의 발자국은 지워졌을 지라도, 특전사 대원들의 절도있는 검은 베레모 속에, 그리고 이 땅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 그들의 거룩한 넋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들의 거룩한 희생 위에 자유와 번영이 있음을 새삼 깨달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과 숙연함이 가슴을 채웠다. 참배를 마친 후, 허기진 배를 달래려 '구이마마'로 향했다.
칼칼한 생고기김치찌개와 잘 익은 묵은지고등어조림을 호식하며 정겨운 웃음꽃을 피웠다. 정성 어린 집밥 한 그릇에 정과 온기가 가득했다. 식사를 마친 후, 구국활동에 열정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벗 아스트라전(인구)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양재천 귀갓길에 올랐다. 평화롭고 아늑한 오후의 양재천을 따라 달리며, 함께 했던 동료들과 차례로 작별을 고했다. 오후 2시경 청담역에 도착하여 7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으로 오늘의 여정은 정점을 찍었다. 초여름 답지 않게 종일 불어주던 바람이 고마웠던 하루,
비록 세월이 흘러 몸은 예전 같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은 길을 바라보며 함께 달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는 미래에 연연하기 보다, 서로를 보듬으며 오늘 이 순간을 감사히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2026-10-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