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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4 - 테무진 몽골을 통일하고 쿠릴타이를 열어 칭기즈 칸에 오르다!
이번 글은 테무진이 어떤 과정(전투)을 거쳐 몽골을 통일해 칭기즈칸이 되었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승리에 있다. 적을 정복하고 추격해 재산을 빼앗는 것, 그들 가족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품는 것에 있다" 가오홍레이의 ‘절반의 중국사’
644 페이지에 나오는 말로 흉노족에서 몽골족에 이르기 까지 유목민 정복자의 생각을 짐작케 합니다.
테무진의 몽골군은 번개처럼 빠른 기습에 중점을 두었으니 몽골 기병은 물을 담을 때와 강물을
건널 때 사용할수 있는 가죽 주머니만 휴대했으니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그들은 말 위에서
잠시 잠을 자기도 했고 밤에도 행군했으며...... 여러마리 말을 끌고 바꾸어 타면서 계속
달렸으며 음식이 없어도 몇달 정도는 말의 젖과 수렵으로 얻은 고기로 연명할수 있었습니다.
농경민족의 보병군단이 외국에 장거리 원정을 할 때 수양제의 경우에서 보듯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의 보급인데, 유목민 기병대는 소를 한 마리 잡아 끓인후 햇볕에 바짝 말려 몽둥이로
두드려 가루로 만들어 가죽부대에 담아 휴대하면 적지에서도 물을 끓여서 저 고기 가루
를 넣어 마시면 한끼 식사가 되고 또 약탈에 의존할 수도 있으니 장거리 원정이 수월합니다.
또 몽골군은 여러 종대가 협력해 적을 포위하는데 능했으며 싸움이 불리하면 즉시 후퇴
했고 적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졌다 싶으면 이내 다시 기습했으며 적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승리는 적의 재물을 약탈
하는 것이었지만 농경민족의 보병 군단은 땅과 성(城) 을 지키는걸 승리로 생각했습니다.
김유신은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 중앙군이 장군 7명이 모두 전사하는 등 당군에
대패하고 후퇴한 아들 김원술을 임전무퇴 계율을 어겼다고 죽이려고 했으나
문무왕의 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절했고.... 장군 사후에 다시 찾아 온
아들을 어머니는 대문을 걸어잠그고 집에 들이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강의 지류 실루겔지트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하니.... 실루겔지트 전투 입니다.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
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했는데 그 외에 적에 의해 퇴각하면 처음
공격한 곳으로 돌아오라는 명령도 내렸으니 규율 잡힌 군대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초원의 규칙을 완전히 바꾸었으니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으로 모든
전리품은 테무진 자신의 것이며,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니 이는 그가 죽을
때 까지 이어진 규율로써 자신의 아들들이 이를 어겼을 때도 엄청난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새 제도에 불만을 품은 알탄(카마그 몽골 제3대 칸 쿠툴라의
아들)과 쿠차르(테무진 칸의 사촌) 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리타이 옷치긴이 자무카
에게 귀순하는데, 이들 세명은 테무진 칸의 약조를 어기고 관습대로 약탈물을 챙기다가
칸의 분노를 사서 바를라스 쿠빌라이와 베수드 제베에 의해 약탈물을 압수당했던 것입니다.
당시 초원의 약탈전을 보면 패자들의 게르를 성급하게 약탈하는 것이 완전한 승리에 큰 방해가
되니 이긴쪽 병사들이 게르 내의 물자를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에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은 이 기회를 틈타 달아나니.... 그럼 병사들이 전투 중에 약탈을 막는 방법은 전투 후에
약탈물이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니 테무진이 이런 점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귀족 가문들은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분노했으니... 귀족들이 부하들에게 약탈품을 나누어 주던
관행이 무시된 것으로 이제 병사들은 사령관 징기스 칸에게만 충성을 바치게 된 것이며 또 전투 도중
에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들과 똑 같은 전리품(약탈품)을 분배하는 것인데,
그럼 병사들은 자기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죽는 순간 까지 힘을 다해 죽도록 싸우게 할수 있는 것입니다.
1202년 가을에 테무진 칸에게 격파되었던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위시한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살지오드, 오이라트, 두르벤, 카타긴 등이 연합하여 테무진과 옹 칸(왕 칸)을
섬멸하기 위해 집결했으니 테무진과 옹 칸은 연합하여 금나라가 세운 알란 요새에 들어갑니다.
겨울에 알란 요새에서 출격한 테무진은 쿠이텐 들판으로 향했고, 옹 칸은 자무카를 견제하기
위해 출격했는데 부이룩 칸은 무당에게 바람을 부르라고 명령했지만, 갑자기 바람이 반대
로 불어 눈바람에 반 테무진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으니 테무진군은 이틈을 타서 돌격했고
연합군을 대파했으며 한편 옹 칸과 대치중이던 자무카는 퇴각해서는 인근의 부족을 약탈합니다.
테무진은 1202년 제2차 쿠이텐 전투에서 대승했으니《원조비사》에 이 전투가 서술
되어 있는데 자무카 연합이 주술을 일으키는 '자다' 라는 돌을 가지고 승리하려
고 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이 본인들에게 휘몰아쳐서 흩어져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후 타이치우드의 족장 앙쿠 후쿠추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되었으니 타이치우드의 지도자 '뚱보 칸' 타르고타이는 예수게이가 죽자
어린 테무진을 버리고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들을 이끌고 갔으며, 테무진이 서형 벡테르를 죽이자 버릇
을 고쳐준다는 명목하에 그를 납치해 조리돌림한 바 있었으니 테무진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 였습니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우량카이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
주는데.... 현대 의학 관점으로는 이 행동은 하등 좋을게 없는 헛짓이니 오히려 그 가공할 충성
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으며, 젤메는 또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고 하며...... 타이치우드족의 앙쿠 후쿠추는 사로잡혀 처형 되었습니다.
한편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차오르 베키,
자신의 딸 코진 베키와 옹 칸의 손자이자 셍굼의 아들인 투스 부카(토사카)를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욱 악화됩니다.
훗날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신랑이 테무진인줄 착각해서 적었으니 “ 칭기스칸
이 내 딸을 신부로 삼으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는 자기가 나의 봉신이자
노예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가서 그에게 내 딸을 그의 아내로 주느니 차라리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전해라” 그럼.... 귀족인 왕칸이 테무진을 평민으로 생각 했다는?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이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하니 결국 옹 칸
과 테무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에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는...... 1203년에 테무진을 급습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옹 칸 측에 아들 주치의 혼인면담을 하러 수행원 몇명만을 데리고 찾아오던 테무진은 케레이트
측의 두 평민, 바다이와 키실릭이 위험을 알려주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테무진의 평판이 부족을 막론하고 초원의 피지배층 전반에 호의적이었다는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때 테무진 측은 수행원 백여명에 불과한지라 전투는 불가능하니 승산이 낮을 때 초원사람들이 흔히 쓰던
방식대로 부하들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라고 말하고 자기도 수십명만 데리고는 부리나케
멀리 달아나는데..... 무리를 지어 함께 가면 추격병의 목표가 되는지라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난 것입니다.
지도자가 숨자 막 통일을 이룬 테무진의 ‘모전벽의 사람들’ 은 위기를 맞이했으니 버틸수 있을까?
다양한 부족들이 모인 잡다한 집단에 불과한데..... 어디로 달아난지도 모르는 테무진에게
계속 충성하기를 바라는게 가능한 일일까? 차라리 옹칸이나 자무카에게 의탁하는게 낫지 않을까?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계속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수에 이르렀는 데
보니 부하들은 불과 19명 뿐인지라 굶어죽을 판인데, 그때 갑자기 북쪽에서 야생마가 나타났으니 동생
카사르가 말을 달려서 잡았는데 솥이나 단지도 없고 장작도 없는지라 그들은 고래의 조립법을 사용합니다.
말 가죽을 벗겨 고기를 자른 다음 말가죽으로 큰 주머니를 만들고 안에 고기와 물을 약간 넣은 다음
마른 풀을 모아 불을 피운후 돌을 달구어 가죽 부대 자루 안에 넣으니 돌 때문에 물이 뜨거워
졌지만.... 물 때문에 가죽이 터지지 않았으니 조금후 익은 고기를 먹고는 비로소 허기를 달랬습니다.
19명중에 친척은 동생 카사르 뿐이고 나머지는 남인데.....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
라는 맹약(발주나 맹약) 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키는데 발주나 호수는 《원조
비사》를 영역한 Urgunge Onon 교수에 따르면 대략 위도 48 경도 119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이는 후룬베이얼시 남서쪽이고 또한 여기서 19명의 지휘관은 훗날 발준투로 불리는데.... 아홉
부족에서 모인 19명 중에 3분지 1은 이슬람교도 3명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명 되었습니다.
이때 옛날 예수게이의 테무진의 어머니 납치를 도왔던 숙부는 옹칸에게 가는등 친척 모두는 자무카나
옹칸에 의탁했는데.... 테무진은 하룻밤 사이에 한반도 크기에 달하는 영지 전체의 유목민들에게
총동원령을 전달하여 군대를 소집하니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이 테무진 칸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바로 이때니 즉, 테무진 칸에게 배신을 알린 두 평민이 바로 곽정과 그 어머니 이평인 셈입니다.
테무진이 발주나 호수를 나오자 삽시간에 수만명의 군대가 모여들었으니 이는 기적에 가깝다고
할 것인데.... 어머니와 처 부르테를 통해서도 친정 사람중에 옹칸의 부하들이 일부 투항해
왔는데도 옹칸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황금게르에서 큰 잔치를 열고 있었는데
테무진은 여분의 말을 대동해서 바꾸어 타면서 진격해 왔으니 “번개 진격" 이라고 불리웁니다.
또 다른 기록이 전해지니, 옹 칸 연합은 1203년 칼라 칼지드 사막(칼라진 엘레트) 전투에서 테무진의 군대
를 급습하는데《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케레이트족 군대의 배치와 전열에 관해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수적으로 불리했던 테무진 칸은 사기가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테무진 칸의 '안다'(의형제) 였던 망고드 쿠일다르가 선봉장으로 케레이트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후방에 있던 쿠이텐 산(굽타 산)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는데... 그런데 1994년 몽.일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및 “집사 부족지” 등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쿠이텐산 정상 깃발꼽기와 마우 운두르
후방에 있는 칼랄진 엘레트(칼라칼지드 사막)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서는 쿠일다르가 쿠이텐 산 정상 깃발 꼽기 때문에 부상을 입어 발주나 호수
인근에서 사망했다고 했으나, 《몽골비사》에서는 칼라칼지드 사막에서 아칙 시론에게 찔려
부상당했다가 발주나 호수 인근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으니, 테무진의 안다인 쿠일다르가 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쿠이텐 산 정상 깃발꼽기를 삽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카마그 몽골군은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는데 물론 쿠일다르는 며칠후 부상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쿠일다르와 오로오드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케레이트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테무진군의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테무진 칸은 발주나에서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
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는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무카와 알탄은 옹 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동나이만의 타양 칸에게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리타이 옷치긴을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
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데.... 이러던 중에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냅니다.
옹 칸은 이러한 기만책에 속게 되고, 테무진은 1203년 가을에 무방비 상태로 제지르 운두르('고지') 산에서
연회를 하던 옹 칸을 밤중에 급습하였고 제지르 운두르산 전투에서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3일동안 저항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으며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납니다.
후에 옹 칸은 나이만족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보초병들이 옹 칸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 당신이 어떻게
옹 칸일 수 있냐면서 내쫓았지만 옹 칸이 자꾸 우기자 화가 난 보초병이 죽여버렸으며, 아들 셍굼은
황무지로 도망쳐 마적이 됐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고.... 이 부하도 테무진 칸에게 사형
당해 죽으니 테무진 칸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했다고 하며, 군신간의 관계도 약속으로 봤습니다.
이렇게 몽골 중앙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제압한 테무진 칸은 몽골 서부 고원의 최강
세력으로 기독교도들인 동나이만의 타양 칸을 공격하여 1204년 가을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격파하고 케레이트에 이어 동나이만도 멸망시키게 되는데 몰골인들은 먼저 심리전 부터 시작합니다.
이후 나이만의 전위가 몽골족 전사 한명을 붙잡았는데 그 전사는 원시적인 안장을 얹은 여윈 말을 타고
있어 이 안장과 말은 나이만 진영에서 놀림감이 되었으니 결국 나이만인들은 몽골족이 매우 궁색한
상태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며, 그후 전투 때는 몽골군의 병사가 적었으므로 언덕위의 병사가 한명이
모닥불을 5개씩 피움으로써 “몽골군이 하늘의 별 보다도 숫자가 많다” 라고 겁을 집어 먹게 만듭니다.
몽골군은 병사가 적으니 전면전 보다는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니 동트기전 ‘움직이는
덤불’ 형태로 전진하라고 명하자.... 어둠속에서 10호 분대 단위로 흩어져서 소리없이
전진했으며 공격후에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니 몽골군의 규모를 알수도 없고
또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 올리 모르니 모든 곳을 방어하느라 나이만의 군대는 분산됩니다.
움직이는 덤불을 통해 산발적인 공격후 호수 대형으로 바꾸니 긴 줄을 이어 전진해 화살
을 쏘고는 맨 뒷줄로 물러나 다시 파도를 만드는데, 십호를 뾰족한 끝 대형으로 바꾸어
나이만 진영의 한 부분을 무섭게 돌파하는등 여러 전술을 쓰니,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라는 책에 보면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그를 위해 간다” 라....
결전의 날에 나이만군은 통신선 마저 끊어져 방향을 잃고는 혼란에 빠져 날이 밝기 전에 도주하다가
가파른 비탈과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고 날이 밝자 몽골군의 일제 공껴으로 나이만군은 무느지고
타양칸은 죽었으며 아들 쿠출룩은 카라 키타이(서 요) 로 달아났고 자무카는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카마그 몽골에 의한 통일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니 테무진 칸은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
이자 5대 부족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메르키트족도 1204년 겨울, 재차 공격하여 다이칼 코르간
(타이칼 코르가) 전투에서 톡토아 베키의 군대를 격파한후, 도망가는 잔당을 쫓아 철저히 붕괴시킵니다.
메르키트 일부 씨족들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고, 톡토아 베키와 아들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로
도망치자 수부타이에게 철제 마차를 하사해 메르키트를 섬멸할 것을 명하니 수부타이는 명령대로
조지아(그루지야)까지 쫓아가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 과정에 조지아를 포함 캅카스 지방이 박살납니다.
테무진 칸은 원한으로 얽혔던 메르키트를 초토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단행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으며 그리고 동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과거에 자신의 친구
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탄누 산맥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
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으니...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는데 몽골 초원의 전통신앙
에 따르면..... "몸에서 피가나며 죽은 영혼은 하늘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 전합니다.
케레이트의 옹 칸, 동나이만의 타양 칸, 자다란의 자무카,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을 비롯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했으니
통일 전쟁을 거의 마친 1206년 봄에, 오논 강 하류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대족장 회의)
에서 에케 몽골 울루스 Yeke Molgol Ulus (대몽골국) 를 세우고 "칭기즈 칸" 의 자리에 오릅니다.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집사》 에 따르면 뭉릭의 아들 쿠쿠추가 이 칭호를 정했다고 하는데 칸이라도
이름 외에 다른 칭호를 쓰는 건 드문 일이고, 세력이 강대한 경우나 옹 칸의 경우 처럼 금(金)
나라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경우에 제한적으로 쓰인 일종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내포된 것입니다.
같은 해인 1206년에 칭기즈 칸은 제베를 보내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수자우 강에서 사로
잡아 처형시킴으로써 마침내 몽골 초원의 난세를 완전히 종식시켰으며..... 이듬해 인
1207년 부터 칭기즈 칸은 몽골 북쪽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작업에 들어갔으니, 그
일은 장남 주치가 맡았는데 주치는 먼저 바이칼호 근처에 살던 키르기스족을 복속시킵니다.
1208년, 오이라트족도 몽골 울루스 안으로 들어왔으며 바르군, 우르수드, 캉가스, 투바스, 부리야트
등 몽골 외곽의 숲에서 살던 부족민들도 잇따라 주치를 만난 뒤 몽골에 귀순했으니 이들을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대거 귀순시킴으로써 장남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 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1209년에는 중국 서부, 오늘날의 신강에 살고 있었던 튀르크계 위구르족이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
했는데.... 위구르는 몽골 고원 외부의 세력들 중 칭기즈칸의 세력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몽골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부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
를 바로잡으며, 무엇보다도 칸의 귄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
였으며 또한 그동안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충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전에는 전쟁에서 이기면 패한 적군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지만 칭기즈 칸은 타타르 아이를 어머니
의 양자로 들이는등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으며, 타타르 귀족 예수겐과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았고 부족민에게도 혼인을 장려했으니 훗날 타타르는 서양에서 몽골의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1203년에 테무진은 9만 5천호에 달하는 기존 부족들을 해체하기로 했으니 전사들을 친족
이나 부족과 상관없이 아르반(십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편성해
분대원 끼리는 형제가 되도록 했으며, 전투에서 분대원이 적의 포로가 되면 그냥
두고 떠나서는 안된다고 엄명했으며 가장 나이 많은 병사가 분대장을 맡도록 했습니다.
분대 10이 모이면 자군(백호)이라 부르고 중대를 이루어 그 중 한 사람이 중대장을 맡았으며 중대
열이 모이면 밍간(천호) 이라고 부르는 연대를 이루었고 밍간 열이 모이면 1만명은 투멘
(만호) 이라 부르는 사단이 되었으며, 투멘의 대장은 칭기즈 칸이 직접 선발해 임명했는데
자기들을 부족 이름 대신 게르를 만드는 재료의 이름을 따서 “모전 벽의 사람들” 이라 자칭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씨족과 부족을 해체해 버린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 형제와 사촌이
함께 모여사는 것은 허락했지만 부대는 별도로 편성했으니, 자연히 종래의 귀족
들도 없어졌으며 오랜 초원 유목민의 관행도 사라진 것인데 당시 칭기즈칸에게
는 천명 단위의 밍간이 모두 95개가 있었으니.... 그럼 총병력은 10만에 가까웠습니다.
칭기즈칸은 케식이라 불리는 친위대 1만명을 편성한후 보르쿨, 보오르추, 무칼리, 칠르군
등 4명에게 맡겼으니 이 4명은 몽골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네 개의 날개다 되어
주었으며.... 말에서 내려온 후에는 위구르 포로의 힘을 비려 위구르-몽골 문제를
만들었고 몽골 법전인 “에케자사크”를 제정했으니 몽골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볼모제도를 개혁했으니 천호와 만호를 맡은 장군들에게는 아들과 그 친구들을 보내게
해서 칭기즈 칸 자신의 천호를 구성했으니.... 부모나 친척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아들을
죽이겠다며 따로 붙잡아두던 기존의 인질제도 보다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며 이들
은 정부의 한 부분이 되었으니 장군들도 모두 제국의 궁정과는 아들을 통해 연결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명령이 의도한 대상에게 신속하게 전달되는 통신체계를 갖추었으니 빠른 기병에게 “화살
전령” 역을 맡겼는데, 군에서는 기병을 제공하고 지역민은 역참을 마련했으니 역전 업무는 군사
업무와 맞먹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몽골인은 군역을 역전 업무 종사로 대체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형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역참은 30칼로미터 마다 세워졌으며 각 역참에는 25가족 정도가 달라붙어
유지와 운영을 담당했으니, 서쪽의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만리장성을 가로질러 중국 동부로 들어가는
관문까지 64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하며 또 횃불, 휘파람 소리가 나는 화살, 봉화, 깃발등을 사용했는
데.... 유목민들은 팔 신호를 사용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군대를 재조직한 칭기즈 칸은 본영을 케룰렌과 툴라강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부족의 고향을 폐쇄구역으로
설정했으니.... “아무도 세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않도록 하라” 라는 명령으로 몽골족의 고향은 왕실
외에 외부인이 접근할수 없었으며 왕실 가족들은 200년간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칭기즈 칸이 다음에 한 일은 칸 못지않은 권력을 가진 무당을 처형한 것이니 아버지 예수게이
의 충실한 부하였던 콩고탄 씨족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쿠추 텝 텡게리로, 이 칭호의
의미는 '天巫(천무)', '드높은 천신' 정도가 되는데, 텝 텡게리는 테무진이 초원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초원의 여론을 테무진 측으로 이끌어온 공신이었습니다.
텝 텡게리는 동생인 카사르의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하는데 어머니 호엘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에 대한 문책을 그만두었지만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을 하자 처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주는데,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 버립니다.
잭 웨더포트등 연구자들은 칭기즈 칸이 무당의 영적인 힘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칭기스 칸은
자신을 배신하려는 무당의 허리를 꺾어 죽인 뒤 시체를 치우고, 기원전 716년에 로마 원로원이 초대왕
로물루스를 죽이고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고 말한 것 처럼...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
으니, 영적인 것을 두려워해서 벌인 행위로 보긴 어려운데 위 텝 텡게리의 일화는《몽골비사》 에 나옵니다.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샤머니즘 신앙은 몽골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 까지 했습니다.
몽골 통일 이후 문자도 없었던 상태에서 나이만 부족의 재상이었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으니 이 몽골 문자
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이며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집니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삭” 이라
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으니...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여러나라에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납니다.
내용은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으니 《야삭》은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와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와 약탈혼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시 처형했습니다.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 않기위해 이슬람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
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아홉 마리로 배상하고,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으며 반대로 종교자유를 보장하는 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제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으니 교역로를 개발하고 이웃 나라들과 교역
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하나 서요, 호라즘 왕국 등 외국과 접촉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으니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니
강과 험준한 산맥을 넘어 수만리를 달려서 호라즘(이란 지방) 을 공격하고 서하와 여섯차례 전쟁을 치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