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34-가우리 수나라군 연파>
高句麗와 中國의 北方覇權戰
고구려와 중국의 북방패권전
☯ 수문제(隋文帝)의 조공요구에 격분한 가우리, 수군(隋軍) 공파(攻破)
서기 597년. 가우리의 영양왕(嬰陽王) 8년.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隋文帝)는 기고만장하여 역사 이래 천적인 동이족(東夷族)의 패자(霸者) 가우리에게 감히 조공을 요구해 오는 무례를 범하였다.
이에 격분한 펴라[평양(平壤)]정부는 강이식(康異植)을 대장군으로 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부장으로 하여, 3만의 기병으로 수(隋)나라의 북천성(北天城)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리하여 북방의 패자 가우리와 중원의 패자 수나라 간의 제1차 대전의 막이 열렸다.
때마침 장마철이 시작되어 매일같이 폭우가 퍼부었는데. 명장 강이식 장군은 대군으로 수군의 정면을 막고, 부장 을지문덕은 날쌘 기병을 이끌고 수군의 후방으로 돌아 그들의 수송로를 공격하여 30만의 수병을 분산시키니, 수나라 군사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신출귀몰한 특공대 작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데 성공한 을지문덕은 부장에서 부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의 신화는 전 가우리에 진동하게 되었다.
☯ 형과 문제를 죽인 양광의 난으로 왕위 오른 수양제의 위세
가우리와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참패한 수나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양광(陽光)의 난이 그것이다. 그것은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 양광이 태자인 형과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으로, 그가 바로 양제(煬帝)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였으나, 중국을 위한 대사업을 연속적으로 벌였으니, 우선 100만 명을 동원하여 대궁전을 지었다.
다시 2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黃河)에서 유주(惟州), 양쯔강[양자강(揚子江)]에 이르는 3천리의 대운하를 뚫어 지방의 세공을 걷어 들이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는 또 유림(楡林)에서 동쪽의 만리장성 보수도 철저하게 하여 북방민족의 중원(中原) 침입에 만전을 기하였다.
더 나아가 양제는 임읍(林邑), 토곡(吐谷), 유구(流求) 등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모두 수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켜 국토를 크게 넓히는 공을 세웠다.
이로써 온 천하가 다 그의 무릎 밑에 복종하는 형세가 되었으나, 유독 가우리만은 패륜아의 왕위를 승인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제 수양제는 그의 체면과 북방의 패권을 걸고 수문제에 이어 또 한 차례 가우리와 승부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당시 수(隨)이 형세》
0071
☯ 수양제, 왕위승인 거부한 가우리에 대군(大軍)으로 진공했지만
서기 611년 2월 수양제는 전국적인 대동원령을 내려 탁군(涿郡)에 집결하게 하였다. 서기 611년 4월부터는 양제 자신이 벌써 탁군에 나타나 군의 편제를 짰다. 전군의 집결이 완료된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이 때, 동원된 내용을 수서(隋書)에 따라 살펴보면...,
보병(步兵)-113만 명 / 수송인원-20만 명 / 전차(戰車)-5만 대
기병(騎兵)-30만 명 / 수군(水軍)-10만 명 / 군함(軍艦)-3천 척
육군 113만은 30 도(道)로 나누었는데. 1도는 대략 3만8천 명이었다. 좌군이 12도, 우군이 12도, 천자군(天子軍)이 6도로서, 날마다 1도씩 탁군을 출발하여 약 40일 만에 겨우 출발을 완료하였다 하며, 그 선두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천40리(416km)에 달했다 한다.
※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군이 겨우 60만 명인 것이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전 세계를 통하여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출진에만 40일이 걸린 육군에 비하여 내호아(來濩兒) 제독이 이끄는 수나라 해군은 부제독 주법상(周法尙)을 선봉에 세우고, 군함 3천척에 10만 명의 해군으로 발해만을 타고 올라와 육군보다 20일이나 먼저 패수(浿水)의 하구에 집결해 본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 수나라 수군, 가우리의 요하하구 삼각주함정에 걸려 풍비박산
전투함 2천2백 척, 수송선 8백 척, 총 3천척의 엄청난 규모의 수나라 해군함대는 발해의 요동만을 메운 듯했다. 그런데 이 무적함대 앞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듯 일단의 가우리 해군 쾌속선 함대가 돌연히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지며 수나라 함대를 공격하더니, 그대로 방향을 바꾸어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먼저 전공(戰功)을 세워 승진을 하고 싶은 욕심에 주법상 부제독은 육군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가우리 해군의 별동대(別動隊)를 공격하도록 추격 신호의 깃발을 올리고 급히 쫓아갔다.
수 해군의 대제독인 내호아(來濩兒)는 가우리 특공대의 출현과 주법상 부제독의 신속한 추격전을 바라보며 정지 신호를 보냈으나, 추격군은 제독함의 신호를 못 본 채 전속력으로 움직여 가우리 전단의 뒤를 따라 마(魔)의 삼각주(三角洲) 깊숙이 쫓아 들어가고 있었다.
♬(말풍선)
“제독! 선봉군 전단들이 일제히 가우리 수군을 추격하고 있사옵니다.” (내호아 부하 장수)
↔
“주법상이 나의 명령을 무시하고 가우리 수군을 추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본대(本隊)를 따돌리고 저 강을 따라 올라가 적의 왕성인 펴라[평양(平壤)]를 먼저 공취하여 일등 전공을 올리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하 내호아 제독)
“이러다간 안 되겠다. 모든 공은 주법상 부제독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천자 앞에 허수아비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도 공격한다! 전 전함들은 펴라 공격에 나선다. 공격!”
자, 그러면 그렇게도 말썽 많은 펴라[평양(平壤)]와 압록수(鴨綠水), 패수(浿水), 살수(薩水) 등의 위치를 살펴보자.
《당시의 지세도》
0072
지도에 나타난 대로 압록수[지금의 요하(遼河)]는 발해만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패수와 살수 등의 큰 강줄기와 하나로 합쳐졌다가 또 다시 수십 갈래의 작은 물줄기로 갈라지며, 그 강변에 광활한 늪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 침략군을 모두 이 늪지에서 허덕이게 만든 천연의 요새이다.
※ 압록(鴨綠): 중국식 발음으로 ‘야리’이고, 우리 발음으로는 ‘아리’이다. ‘아리’는 ‘크다’라는 뜻으로, 송화강, 흑룡강, 요하 등을 모두 아리수라고 불렀다.
※ 요하(遼河): 서기 1345년. 요(遼)나라의 성종(聖宗) 4년에 현재의 이름인 요하라고 이름지었다. 그 전에는 구려하[句麗河,拘柳河(구류하)),豆流河(두류하)]등으로 불렀고, 고구려 때는 아리수[阿利水,鴨綠水(압록수)]라 하였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地)]
수나라 3천척의 대선단 중 수송선단 800척을 제외한 2천여 척의 전투함들은 가우리의 특공선단을 추격하여 패수(浿水)와 살수(薩水)가 합쳐지는 대삼각주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오른편 강을 끼고 험한 산들이 있어서 그 위에 가우리군의 수비대들이 선박 공격용 석포(石砲), 화포(火砲) 등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군(隋軍)은 비로소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가우리는 이미 광개토대왕과 응신천황의 대결 때 응신의 신군[神軍;왜군(倭軍)]을 바로 이 현장에서 전멸시킨 경험이 있었다.
♬(말풍선)
“아! 강의 상류로부터 기름불 배들이 흘러내려오고 있구나. 이거 큰일이다! 배를 돌릴 수도 없고, 완전한 함정이다! 가우리에게 속았다.” (수나라 해군 선단의 내호아)
갑자기 강의 상류로부터 기름을 실은 뗏목들이 엄청나게 흘러내려오니, 무려 2천척이나 되는 전선들이 몰려 우왕좌왕하던 전함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가우리의 화공(火攻)에 차례차례 화염에 휩싸여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리수(阿利水)와 살수(薩水), 그리고 패수(浿水)가 합쳐지면서 넒은 늪지로 변하고, 그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물줄기들이 만주 벌판으로부터 실어 온 강물을 발해의 요동만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지리에 어두운 침략군들은 과연 어느 물줄기를 타고 가야 가우리의 왕도(王都)인 펴라성[평양성(平壤城)]으로 갈 수 있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마(魔)의 삼각주(三角洲)는 펴라를 수비하는 가우리의 수군(水軍)에겐 천혜의 지리적 이점이 되었으니, 물길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펼쳐 놓은 수비망은 어떠한 공격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수군[隋軍]의 해군선 3천척 중 2천여 전투함들이 모두 펴라 공격에 나서서 가우리의 역격(逆擊)에 물귀신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 뒤에 무방비 상태로 남은 800여 척의 보급선대는 남대황(南大恍)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보급선대는 육군 130만 명이 아리수까지 도달한 후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품을 선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보급선단 앞에 나타난 전선들은 펴라 공격에 나섰던 수군선(隋軍船)들이 아니라, 가우리의 쾌속 화공 전선들이었다. 비무장 보급선단은 크게 놀라 즉시 백기를 올리고 항복해 버렸다.
수나라 보급선대의 항복은 너무 뜻밖이라 오히려 가우리 해군은 어리둥절하였다. 가우리는 엄청난 양의 수군 보급품을 노획하였고, 이것은 수나라 본군을 굶주리게 만들어 가우리의 일방적인 승리로 장식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2020.6.6.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