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018 남북정상회담 (사진: 2018 남북정상회담 홈페이지) |
봄을 맞은 한반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로 70여 년을 보냈습니다. 이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제 다시 하나가 되고자 두 손을 맞잡기 시작했습니다. 맞잡은 두 손을 통해 봄빛이 지나가는 듯합니다. 겨누고 있던 총칼을 거둬들여 그 자리에 길을 내고 나무를 심으며 서로 오갈 날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누구는 평양 ‘옥류관’에서 꿩고기로 육수를 낸 냉면을 맛보고, 누구는 중국이 아닌 우리 땅에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고, 또 다른 누구는 서쪽과 동쪽으로 연결되는 철길을 따라 중국과 유럽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이 평화를 간직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평화의 소망은 ‘평양냉면’과 ‘백두산’에만 머물러있지 않을 것입니다. 두 조각이 하나가 되는 온전한 한반도, 상처를 보듬고 함께 평화를 노래하는 우리의 모습이 온 누리에 펼쳐지길 바랄 것입니다. 이토록 간절했던 평화, 간절한 만큼이나 남과 북이 살아 온 세상은 너무나 달랐고 평화를 향한 길은 메모리칩에 담긴 회로만큼이나 복잡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북 정상이 군사분계선에서 강한 의지로 손을 잡았지만 두 사람이 느낀 체온의 차이는 분명 있었을 것이고 피부결의 거침도 달랐을 것입니다. 생중계를 통해 맞잡은 두 손을 보며 다름을 느낀 것은, 제가 경계인으로서 북한과 닮아 보이는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두 체제 속에서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경계인’으로 경험한, 평화 없는 중국 사회주의 제가 태어나고 자란 중국은 1949년 사회주의를 통한 유토피아를 선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우선인 이곳에선 모든 것을 국가가 소유했고, 또한 모든 것을 국가가 제공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자동화기계학과를 다녔지만, 졸업과 함께 농촌으로 내려가 농업 기술 연구소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월급으로는 돈이 아닌 양표(糧票, 식량배급표)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주말마다 배급소에 가서 지급받은 양표를 쌀과 콩기름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입는 옷도 신발도 모두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상점(합작소)에서 제공받았고, 의료도 교육도 모두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아래서 저는 초등학교(소학교)를 민족학교(조선족 소학교)로 다녔습니다. 학생과 교직원 전부가 재중동포(조선족)였기에 학교에서는 늘 우리말을 사용했고 중국어는 외국어를 배우듯이 중국어 수업 시간에 따로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민족보다 국가가 앞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재중동포들은 늘 자신을 중국 사람으로 소개했고, 학생들은 매일 아침 붉은 넥타이를 매고 등교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붉은 넥타이는 혁명 선열의 ‘피’이자 사상 무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 가르침 아래에서 자란 저의 고향 연변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해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지리적 사상적으로 교류가 용이했고 북한과 재중동포는 한민족으로서 언어가 통했기에 저는 어린 시절에 북한 서적이나 영상을 더빙이나 자막 없이 쉽게 접하곤 했습니다. 북한 서적과 영상을 통해 사회주의가 좋아하는 국가적 영웅들에 대해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열광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도로 만들어진 인기 만화영화 〈소년장수〉에서 왜놈을 무찌르는 고구려 소년장수 쇠매는 북한과 중국 연변 어린이들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항미원조전쟁)을 다룬 영화 〈비류강의 새 전설〉에서는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미군 폭격으로 썰매를 타다 강물에 빠진 어린이들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중국 군인인 라성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라성교 역시 북한과 중국 모두가 사랑하는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라성교 중학교’는 함경남도 성천군에 지금도 있습니다. 개인이 언제든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사회주의체제 국가에서는 이러한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그래서 중국과 북한은 ‘기념비 국가’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중국 사회주의체제의 혼란과 전환
이런 사회주의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죄성은 다함께 잘 사는 낙원을 꿈꾸던 유토피아를 비웃고 공산주의 지도부에 권력욕을 부추겼습니다. 권력을 굳건히 하는 데 방해로 여겨지는 것들을 용서 없이 처단하면서 사회에 두려움과 공포를 퍼부었습니다. 결국 중국 지도부는 전통적인 가치를 공격하고 지식인을 비판하는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켰습니다. 문화대혁명 10년의 기간 동안 피폐해진 중국 사회는 큰 슬픔과 정신적 혼란을 맞았습니다. 여기에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으로 칭송받던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은 9억에 달하는 중국인들에게 슬픔과 사상적 혼돈을 안겼습니다.
이렇게 문화대혁명으로 국가 지도부가 신뢰를 잃고, 영원한 영웅이라고 칭송받던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큰 혼란 속에 빠진 중국 사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유학을 경험한 덩샤오핑(등소평)의 등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1978년 정권을 넘겨받은 그는 바로 개혁의 칼을 뽑았고 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새로운 시작은 첫걸음부터 순조롭지는 못했습니다. 국가로부터 직장을 배정받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를 전전하며 직업을 찾아 떠돌았고, 주어진 것을 받기만 했던 배급체제가 사라지면서 시장에서 물품을 비교하고 흥정하여 구입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극심한 가치 충돌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국 정부는 부득이 종교의 자유를 복원해 종교의 힘을 빌려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재건되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체제적 경계인’으로 경험한, 평화 없는 한국 자본주의 중국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이러한 어린 시절을 겪은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 왔습니다. 민족적 경계인으로 살았던 중국에서와는 다르게 ‘체제적 경계인’으로서 또 다른 의미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한국은 저에게 반갑고도 낯선 곳입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1917년 준공한 한강대교 건설에 참여하시고 중국 만주로 가게 되셨습니다. 중국 고향에 있을 때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 앉으셨습니다. 어린 저는 그런 할아버지 옆에서 위성방송을 통해 전해 오는 김동건 아나운서의 〈가요무대〉 오프닝 멘트를 함께 들었습니다.
“전국에 계시는 가요무대 가족 여러분, 또 멀리 계시는 해외 동포 해외 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안녕하셨습니까.”
늘 같은 오프닝 멘트지만 해외 동포를 항상 언급하던 이 멘트는 할아버지의 고국에 대한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제가 한국을 가깝게 느끼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련한 기억과 함께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으로 유학 온 저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참으로 많은 것이 놀라웠습니다. 너무 달라서 감탄했고 너무 달라서 황홀했습니다. 그러나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이 그 다름으로 인해 문화적 충돌과 충격도 겪었습니다. 대학 캠퍼스 내 연인들의 공개적인 스킨십, 연구실 내 군대 문화,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제는 제가 상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들이었습니다. 가치의 충돌과 사회가 주는 극한 스트레스에 몸과 마음이 탈탈 털렸습니다. 게다가 고향에서부터 사용해온 제 언어는 함경북도 말과 비슷해 딱딱한 반면에 서울말은 부드러워 종종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사고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코리안 드림’은 어느새 사라지고 찢긴 마음과 길 잃은 영혼만이 남았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한국과 중국이라는 두 나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줬지만, 가치는 배타적이었고 경계는 더욱 선명해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경계를 재해석하다 ‘사회주의 vs. 자본주의’ ‘국가주의 vs. 개인주의’라는 중국과 한국이 가진 상반되어 보이는 체제를 경험하면서 저는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시소를 타는 것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뿌리를 두어야 할 곳을 찾지 못했고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시험 문제에는 답이 있듯이 다행히 저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습니다. 어렵고 특별한 문제에 답을 대신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저 제 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을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주고 혼란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군대 문화도 없었고 비교도 없었습니다. 다른 체제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경계와 막힌 담이 사랑으로 허물어졌습니다. 제 안에 있던 상반된 이념들이었던 국가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혼란이 잦아들면서 자연스레 복음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그동안 경험한 중국과 한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난 건강한 공동체에서 안전을 느끼고, 영혼이 자라가고 삶이 풍성해졌습니다. 혼란으로 규정된 중국과 한국에서의 삶이 값진 의미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경계인으로서의 존재와 할 수 있는 일들을 복음이 설명해주었고 소명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세상은 늘 제게 양자택일을 강요했지만, 결론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회복이고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위 출세라는 세상의 가치를 좇아 한국에 왔고 목표를 설정했지만, 제 상처를 넘어 이 땅의 아픔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한반도의 평화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이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시민단체에서 한민족 화해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탈북민을 보게 되었습니다.
경계의 끝에서 맞이한 평화, 그리고 또 다른 경계인들 주변을 둘러보면 저만 경계인은 아니었습니다. 저처럼 두 체제를 경험한, 이 땅의 탈북민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국 사회에서 어려움과 혼란 속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맞이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경계에서 길 잃은 영혼들을 하나하나 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작으로 먼저 서로 만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불편함과 어색함을 받아들이고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갈 때 그 안에서 더욱 온전해지며 작은 평화를 이루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화해와 회복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서로 다른 체제에 속해 있었기에 상대를 향해 누구도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북녘의 주민들은 지금의 체제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분단되어 걸어온 시간 속에서 그들은 국가에 자신을 바친 가슴 아픈 존재였고, 어쩌면 더 큰 혼란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냉면과 백두산을 꿈꾸고 있지만, 북녘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막막해할 수도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 더욱 가까워지면 남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우르르 올라 갈 수도 있고, 북쪽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남으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중국 사회주의가 개방하며 겪었던 혼란과 혼돈을 우리 한반도 또한 겪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으로 남과 북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발전하여 북으로 갈 수도 있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남과 북의 평화는 두 지도자가 만나고 북미 정상이 협상하여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것은 사자가 발톱이 없어서가 아니고,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되지 않는 것은 독사의 이에 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주인이신 하나님 나라이기에 가능합니다. 경계라는 단어가 더 이상 서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 양쪽을 모두 다 아우르고 품을 수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의 의미를 담는 단어로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한반도 곳곳에 하나님이 주인 되신 공동체를 세워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박영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