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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註 : 아래 소개하는 소설 '북위 38도선'의 작가 鄭源石은 의사출신으로 화동 47회 선배임>
한국논단 6월호
<읽을 만한 책>
이념과 삶 모두를 잃어버린 어느 지식인의 비극
의사 작가 정원석의 장편 소설 ‘북위 38도선’
6월은, 적어도 지하철의 ‘경로석’ 이용 세대’에게는 각별한 달이다. 6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6·25가 상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통해서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6·25 남침은 말 그대로 ‘잊힌 전쟁’이나 다름없다. 그런 세대인식 때문일까. 6월을 맞으면서 6·25야말로 아직도 완치되지 않은 현대사의 가장 큰 상처임을 새삼 강하게 일깨우는 소설 한편을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의사이면서 아동문학가인 鄭源石정원석의 ‘북위 38도선’이다.
‘북위 38도선’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虛構: 허구)이 아님을 독자가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실명이고 스토리는, 묘사가 거의 배제된 서술위주로 이어진다. 책 표지의 띠종이에 적힌 안내문도 소설 내용이 實錄실록임을 압축해서 전한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빨치산이 되어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해 남부 빨치산 유격대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성일기의 파란만장한 삶의 생생한 증언”- 말하자면 ‘북위 38도선’은 소설이라기보다도 표지 띠종이에 적시된 문구 그대로 주인공의 증언을 토대로 한 史實사실의 기록으로 읽어 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묘사 배제하고 서술 위주로 전개되는 ‘빨치산 實錄’
때마침 북한에 3대 세습정권이 들어선 마당임으로 주인공 成壹基성일기와 김일성의 자손인 김정일·김정남· 김정은과의 관계부터 먼저 알고 읽어야 소설 내용을 한결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을 듯싶다.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과, 15년 전 서울에서 피살된 이한영의 어머니 성혜랑 두 자매는 성일기의 누이들이다. 그러니 성일기는 김정일·성혜림 사이의 장남인 김정남에게는 외백부이며 김정은에게도 아버지 전처의 오빠임으로 어쨌든 혈족인 셈이다.
소설은 17세의 성일기가 1949년 2월 16일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경의선 기차에 올라 월북하는 얘기로 시작된다. 성일기는 월북 후 함경북도 회령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화천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빨치산 유격대 생활에 들어간다. 강원도 사창리에서 빨치산 제200지대가 창설 될 때 분대장이었던 성일기는, 같은 남한 출신의 南道富남도부가 지휘하는 빨치산 유격대 사령부가 신설되자 거기에 배속된다.
남도부 유격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때맞추어 바닷길로 임원진에 상륙한다. 그들은 동해안을 종주, 경상남도 언양에 이르러 극렬하게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다가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참패하자 神佛山신불산(1,209m) 일원에 고립된다. 인민군의 再재남침을 믿은 그들은 고립 상태에서도 신불산에 빨치산 사령부 숙영소를 설치하고, 예하 3개 전투 부대를 관할 지구로 파견하여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1953년 9월 휴전협정이 성립되자 남도부의 빨치산도 그들의 ‘혁명 조국’ 북한으로 부터 철저히 버림 받은 채 해산된다.
빨치산 생활 4년, 휴전과 함께 김창용의 선처로 자유의 몸
그 동안의 탁월한 유격 활동으로 부대 참모장의 지위까지 올랐던 성일기는 부대가 해산되자 사령관 남도부와 함께 경남 창녕의 宗家종가에 숨어 들어온다. 은신해 있던 그는 남도부가 대구로 떠난 직후 결국 특무대에 체포된다. 특무대의 심문과정에서 사령관의 거처를 밝히라는 요구에 고민하던 그는 남도부가 도망갔을 것으로 믿고 그와의 연락처를 자백하게 된다. 남도부는 곧 잡혀온다. 이를 본 성일기는 남도부가 아끼던 부하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피하지 않고 체포된 것임을 뒤늦게 알아챈다. 성일기는 결과적으로 빨치산 동지이면서 상사인 사령관을 배신한 꼴이 된 셈이다. 성일기는 특무대 사령관 김창룡의 선처로 풀려난다. 소설은 사실상 거기서 끝난다. (남도부는 사형 언도를 받고 몇 해 후 처형되었다)
소설은, 월북-빨치산 활동- 체포-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4년에 걸친 성인기의 軌跡궤적을 기둥 줄기로 이어가면서 그 중간 중간에 그의 출생배경· 성장환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해방 전후의 시대상을 서술해 간다. “그의 소년 시절은 온통 밝고 화려한 무지갯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석꾼 집안의 4대 독자 종손으로 태어나 신분은 어느 공화국의 황태자도 부럽지 않았다.”는 소설 전반부의 표현은 성일기의 근본 출신성향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소년 성일기는 경성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시절에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통학했다. 그 당시 인력거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은 성일기뿐이었다. “기억력을 타고나서 한번 읽은 글은 잊지 않아 복습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 만큼 총명했던 성일기는 6년 내내 일등을 했다.
만석꾼 집안 4대 독자로 총명했던 소년의 불행한 선택
사회주의가 지식인 사회에서 이념으로 유행이던 시대였다. 오늘의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도 ‘강남좌파’로 상징되는, ‘배부른 從北종북 좌파 지식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만석꾼 집안의 귀한 ‘도련님’으로 자란 성일기가 이념적 혼란기였던 ‘해방공간’에서 빨치산이 되어 사회주의 조국 건설을 꿈꾼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기만적 理想이상은 자칫 有閑유한지식계층에게 도덕적 허위의식과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는 이념적 ’아편‘이 될 수 있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성일기의 부친 成有慶성유경은 경남 창녕 成성씨 종손으로 만석꾼인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다. 14세에 조혼하고, 일본 동경외국어대학을 다니다가 김원주와 연애 끝에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重婚중혼했다. 두 사람 사이의 장남이 성일기다.김원주는 평남 진남포 인근 농촌의 빈곤가정태생으로 술꾼인 아버지의 상습적인 처자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 혼자 힘으로 평양여고를 거쳐 이왕직 장학생으로 2년제 일본 동경 蠶事잠사학교를 마치고 잡지 '開闢개벽' 에서 기자로 일했던 당대의 ‘신여성’이었다.
아버지는 남노당 재정부장, 어머니는 여성동맹 문화부장
성유경은 해방 후에 제2대 남로당 재정부장을 하면서 당에 자금을 댔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다가, 6.25 남침때 잠시 경기도 인민위원회 서무계통의 한직을 맡다가 월북했다. 김원주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이른바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남조선 여성동맹 문화부장 자격으로 참관했다가 그해 강동 정치학원에 입교하여 1기생으로 졸업한 후 그대로 평양에 주저앉았다.
성일기는 성장과정에서 이들 ‘좌익 부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빠져 결국 빨치산으로 청춘의 한 시절을 허비했다. 그러나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유난히 영민했던 그는 상당한 수준의 인문적 문화적 소양을 지닌 청년이었다. 소설은, 빨치산 생활에서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로 그가 젊은 교양인이었음을 例證예증한다. 가령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상대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당대의 지식인으로 남도부 휘하의 부사령관급 정치위원이 된 안철(본명 안병열)과의 교감이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안철은 파랗게 젊은 성일기와 唐詩당시를 일본어로 풀어 주고받는 과정에서 성일기의 실력에 감탄하고 놀란다.
소설 북위38도선이 빨치산 얘기로 시종했다면 그 작품가치는 반감했을 터이다. 그러나 북위 38도선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사실적 서술로서도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도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기라성 같은 지도층 인사들(조병옥 장택상 여운형 유진오, 이강국, 고유섭, 이효석, 이의식, 정순택, 최용달, 현준혁, 한기준, 조헌영 등)과 그들의 상호관계, 그리고 소소한 일상이 서술되는 데 그 점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명륜동 3가 134-1번지(당시)의 성일기 집에는 어머니의 손님으로 주로 문인들이 많았다. 소설가 최정희, 시인 모윤숙, 시인 김일엽 등이 드나들었다. 언론인 김을한,영문학자 장봉익,소설가 채만식도 출입했다. 성일기의 아버지 성유경이 경영했던 종로 YMCA 근처의 서양 요리집 白合園백합원 2층은 당대 부유층·지도층의 아지트였다. 매일같이 마작 판이 벌어지곤 했다. 소설에는 그곳을 출입한 ‘명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기록돼 있다.
작가는, 실명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과 이런 저런 사건에 대해 脚註각주를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 스토리가 허구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알린다. 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삽입된 이 각주들로서 서술된 내용의 事實性사실성이 한결 분명하게 뒷받침되는데 그것이 또한 이 소설을 실록으로서 신뢰 할 수 있게 한다.
참담한 후일담- 버림받은 성혜림· 성혜랑의 말년
소설의 끝에 이르면 ‘후일담-‘잃어버린 세월’이라는 제목의 설명문이 부연돼 있다. 소설형식으로는 일종의 파격인 그 후일담을 통해 작가가 개략적으로 알려주는 성일기 일가의 삶은 그 결말이 대체로 기구하다.
아버지 성유경은 6·25의 와중에 혜림과 혜랑 두 자매를 데리고 월북했지만, 대지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박해 받았다. 어머니 김원주도 중앙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남편의 출신성분을 이유로 지방 신문으로 좌천됐고 결국에는 그 일마저 잃는다.
큰 여동생 혜랑은 김일성 대학 물리수학과를 졸업한 후 결혼하여 아들 이일남과 딸 이일옥을 두었으나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월북 작가 이기영의 큰아들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던 작은 누이 혜림은 영화배우로 인기를 모으다가 영화광인 김정일의 여자가 되어 전 남편과 이혼하고 앞서 기술한대로 아들 김정남을 낳았으나 차츰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심한 우울증에 빠져 1974년 이후 모스크바에서 외롭게 요양하다가 2002년 운명했다.
남편과 사별 후에 김정일 집에서 김정남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혜랑은 1982년 김정남이 쥬네브로 유학 갈 때 아들 이일남과 함께 따라 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행방불명되는 참변을 당한 후 14년 만에야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이일남은 이름도 이한영으로 바꾸고 얼굴도 성형한 후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전화로 알린다.
혜랑은 아들과의 전화통화를 계기로 모자상봉을 기대하며 1996년 탈북했지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한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던 아들 이일남은 1997년 2월, 이직도 정체가 오리무중인 괴한에게 분당의 아파트에서 피살됐다는 비보만 듣게 된다. 그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혜랑은 유럽 어디엔가 숨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김원주는 1994년에 88세로 타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잃어버린 세대'의 불행-'속절 없는 늙음'에 숙연
의사이면서 아동문학가로 창작활동을 해 온 정원석은 성일기와 동년배다. 휴전 후 대학(서울대 의대)시절, 성균관 대학에 다니던 친구로부터 같은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성일기를 소개받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우의를 지속해 왔다. 성일기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해서 10여 년 만에 소설을 탈고했다고 한다.
소설은 상하권 합해 총 628쪽에 이르는 장편이다. 2006년에 출간되었지만 ‘ 북위 38도선’이라는 소설제목 자체가 출판시장의 주된 소비층인 젊은 세대에게는 어쩌면 냉전시대의 낡은 얘기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주었기 때문인지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오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소설로서 보다 해방공간-6·25 전후를 시간적 무대로 삼아 서술된 ‘실록 현대사’라는 점에서 기록문학으로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고백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언론계 대선배인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의 권유로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 성일기·작가 정원석· 언론인 이도형은 모두 1933년생으로 올해 8순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자주 떠올린 것은 그들 세대의 ‘속절 없는 늙음’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反共반공이 정치사회· 문화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禁忌語 금기어로 취급되는 이 시대에 지극한 슬픔이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도형 선배에게 전화로 물었다. “성일기와 동년배로서 북위 38도선의 내용을 한말로 요약한다면 어떤 표현이 되겠습니까? 그의 정리되지 않은 口語體구어체 답변은 “불쌍하지, 불쌍해... 헤밍웨이의 그 ‘잃어버린 세대’ 있잖아? 그런 불쌍한, 불행한...”으로 끝났다. 나의 긴 文語體문어체 書評서평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소설 북위 38도선은 “해방공간에서 이념과 삶 모두를 잃어버린 한 지식인의 비극에 대한 치밀한 진술이다” 조 규 석 /언론인
첫댓글 참 슬프고도 불쌍한 이야기.......
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_ 그래도 이념이라는 걸 가지고 그들 삶의 길을 선택 했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특히 "진보"들은 어떤 정치나 찰학적 이념을 가졌을가 ? 하는 의아함 . . .
어제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라는 탈북시인의 시집을 사 읽었는데.........
이념과 삶이 불가분하고 그 선택이 불가피하던 시절이 있었네. 아직도 그럴수도 있는거고.
근데 저쪽의 과오는 그 집단의 폐쇄성일세. 지식인들의 더 이상 성장을 막아 버린거지.
대원군때보다 더 고약해 보이네. 제발들 좀 더 깨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