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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의 내용은,
㉠ “역대상”은 사무엘하의 내용, 즉 사울 왕이 죽은 후에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언약궤를 운반하여 안치하고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다윗의 일대기를 담고 있고,
㉡ “역대하”는 열왕기상하의 내용, 즉 솔로몬 왕으로 시작하여, 아들 대에서 분열왕국이 되고, 종내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다가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귀환하는 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대기가 단순한 중복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관점(觀點)이 다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선지자(先知者)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제사장(祭司長)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적인 관점은 인간의 배은망덕한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제사장적인 관점으로 기록한 역대기에서는 인간의 죄악을 덮어주고 있습니다. 그 예로 다윗이 범한 죄와, 솔로몬의 타락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중단함이 없이 이루어 오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역대기입니다.
① 그러면 역대기의 1차 독자(讀者)는 누구들이었으며 기록(記錄)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역대상은 족보(族譜)로 시작이 됩니다. 족보의 분량이 전체 분량의 ⅓에 해당이 되는 아홉 장이나 됩니다.
㉠ 그리고 족보의 범위를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으로부터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 데까지 펼쳐집니다. 이는 역대기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기록(記錄)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그리하여 전통적인 입장은 역대기의 저자를 “에스라”로 보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 지어다”(대하 36:22-23) 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는데, 에스라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시작(스 1:1)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같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② 에스라서에 의하면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인” 제사장 신분으로,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고”(스 7:5, 10)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 역대기를 기록한 것이 됩니다.
㉠ 여기에 역대기의 기록(記錄)목적과 특징이 나타납니다. 바벨론으로부터 70년 만에 귀환한 “남은 자”들은 대부분이 포로 중에 태어난 2세들이었고, 귀환한 후의 상황은 선지자들의 약속과는 달리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성전 재건은 완강한 반대세력에 부딪치게 되어 중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의와 낙망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역대기는 마치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한 자들을 위해서 모세가 창세기(創世記)를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출애굽의 감격은 잠시뿐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사가 추격해오는 등,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르는 노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난관의 중첩이었던 것입니다.
㉢ 모세는 그들에게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거듭 거듭 언약을 세워주신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일깨워줌으로 용기와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 그러면 역대기 저자는 무엇에 근거하여 용기와 소망을 주고 있는가? 역대상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주제(主題)를 말씀하고 있는데,
㉮ 족보(1-9장)와,
㉯ 다윗의 왕위(10-16장)와,
㉰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17장)과,
㉱ 성전건축 준비(18-19장)로 되어 있습니다.
③ 첫째는, 족보를 통해서 자신이 누군가 하는 정체성(正體性)을 확고하게 세워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역대기가 족보(族譜)를 위해서 1-9장까지 장장 아홉 장이나 할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에게 족보를 찾아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는 정체(正體)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아주는 족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스 2:26)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④ 둘째는 족보를 찾아줌으로 자신이 언약(言約) 백성임을 확신시켜주는 일입니다. 기록하고 있는 족보내용을 보면,
㉠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를 진술한 후에,
㉡ 야곱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에 초점을 맞추어 다윗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2:15)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다윗”으로 이어지는 구속사(救贖史)의 정통성을 깨닫게 함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백성(言約百姓)임을 확고하게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⑤ 셋째는 다윗의 “왕위”(王位)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지라,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堅固)하리라”(17:10, 14) 하신 언약(言約)을 상기시킴으로 이제도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과 왕위는 폐하여짐이 없이 영원히 견고하다는 점을 들어서 용기와 소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⑥ 넷째는 “성전”(聖殿) 건축을 위한 준비가 강조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금 600세겔을 주고 사서 성전 터를 마련하고 다윗이 솔선하여 예물을 드린 후에,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29:5) 합니다.
㉠ 이 말씀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제2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큰 격려와 용기를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역대기의 기록목적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속사역을 증거 하려는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곁가지와 같은 “사울 왕”의 행적이나, 다윗 언약에서 떨어져 나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등은 제외(除外)시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⑦ 17:4-15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메시아언약을 세워주시는 내용인데,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7:14) 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나”라는 인칭이 24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점은 아브라함에게 메시아언약을 세워주시는 창세기 17장에도 나타납니다. 구원계획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나가시는 역사입니다.
㉠ 메시아언약을 들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 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합니다.
㉡ 즉 목동인 자신을 왕위에 세우신 이것만도 감사한데, 자신의 자손으로 메사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언약까지 세워주셨다는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일을 알게 하셨나이다”(17:16-17, 19) 하고 감격해 합니다.
⑧ 법궤를 운반하여 예루살렘에 안치한 후에도,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 지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이는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16:15-17),
㉠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 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 지어다”(16:23-24) 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을 높이고 있습니다.
⑨ 이상에서 역대기를 기록한 1차적인 목적, 즉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역대기를 통해서 후대에 계시하시려는 궁극적인 목적(目的)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 첫째로 “족보”를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역대기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아브라함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다윗까지, 다윗으로부터→포로귀환까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요” 한 후에 이어지기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마 1:17) 하고 “그리스도”로 귀결(歸結)을 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족보는 “예수로부터--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데 만일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족보를 밝혀주지 않았다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할 자료를 갖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보를 통해서 증거 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 둘째로 다윗의 왕위가,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하고 언약하신 대로 그리스도로 성취가 되었음을 증거 해주고,
㉢ 셋째로 “언약”(言約)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은 구속사를 지탱해주고 있는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성을 신약성경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하고,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언약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에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언약이 없다면 믿음도 구원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 넷째로 “성전”이라는 주제인데,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하신 것입니다.
⑩ 이런 맥락에서 역대기에서는 성전을 건축할 “터와, 식양”이 중요하게 강조되어 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성전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정(定)해준 오르난의 타작마당 “거기”(21:18, 26)에 세워야만 했고, 그 터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指示)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고 정해주신 바로 모리아 산이니(대하 3:1), 이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에만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성전 식양(式樣)은 인간이 좋을 대로 지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이 가르치신 모든 식양이요,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28:12, 19) 한대로 지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 왜냐하면 “번제단, 물두멍, 휘장, 떡상, 등대, 향단, 속죄소” 등 모든 식양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실 구속사역의 일면을 계시하는 모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변개(變改)한다는 것은 복음을 변개하는 “다른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⑪ 그러므로 역대기에는 열왕기에는 없는 구원계획에 대한 해설적인 말씀들이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이유를,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10:13-14) 하고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면 사울은 왕이 되지 말았어야할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질 왕위는 유다 지파를 통해서 계승될 것이 이미 창세기에서 작정이 되어 있는데(창 49:10), 사울은 베냐민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 법궤를 운반함에 있어서 첫 번 실패하게 된 원인도 사무엘하에는 언급이 없는데,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15:13) 하고 설명을 합니다. 이를 설명해주고 있는 의도는 그리스도는 소들을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구속함을 얻은 자기 백성들에 의하여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 성전건축도 어찌하여 다윗이 세울 수 없는지 사무엘하에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상에서는,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22:8) 하고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누가 성전을 건축한다 하시는가?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22:9, 10) 하십니다.
이 “한 아들”이 1차적으로는 솔로몬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고 성취될 것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⑫ 끝으로 구속사(救贖史)는 바벨론 포로귀환이 끝이 아니요, 제2 성전도 모형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마지막 책, 마지막 부분에서,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하고 말씀합니다. 이 한 절 안에는 “함께” 라는 말이 세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나라건설인 것입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하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한 것이 끝이 아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0:15, 21:27)에서 끝이 난다는 점입니다. 즉 형제의 이름도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있다는 말씀입니다.
㉢ 또한 성전도 교회 구성원인,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거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6: 19) 하신, 형제의 몸이 “성전”이라는 각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역대기는 신약 성도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믿음을 견고히 세워주는데도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