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영웅 카이사르의 죽음
카이사느는 그해 봄, 약 반년 간 이집트에 머물렀고 그동안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일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사랑놀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위정자로서 속주의 시찰은 큰 임무였으며, 특히 대국인 이집트는 국정을 두루 살폈다는 설도 있으나 과연 사실이었는지 의문이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러들여 그의 별장에서 지내게 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한 해 전 1월에 태어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일명 카이사리온)를 함께 데리고 갔다. 이에 로마인들은 반발했다. 뿐만 아니라 옛 동료와 카이사르가 은혜를 베풀었던 정적들마저 등을 돌려, 훗날 암살의 빌미를 제공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함으로써 독재관이 됐다. 그리고 기원전 46년, 독재관은 10년으로 임기가 연장됐고, 기원전 44년 2월에는 종신독재관에 임명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공화정의 존속에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여기에 카이사르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가 더해져 카이사르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됐다. 이들은 6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반대하는 것 외에는 저마다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연대감이 크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불길한 징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고 전기작가들은 전한다. 점술사는 점을 본 후에 카이사르에게 “15일에 있을 위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진언을 했다. 14일에는 폼페이우스 가당에 월계수를 물고 날아온 굴뚝새가 다른 새들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있었다. 또 14일 밤에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프니아가 집의 지붕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몸에 박혀 남편이 죽는 꿈을 꾸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섰을 때 앞서 말한 점술사에게 “3월 15일이 되었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았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공모자들은 카이사르를 둘러쌌고, 그중 한 사람이 카이사르에게 진정을 할 것처럼 다가가 그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이것을 신호로 사방팔방에서 카이사르를 향해 칼끝이 겨누어졌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나 칼에 짤렸다고 한다. 이 중에는 세르빌리아의 아들 브루투스도 있었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이것이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었다. 브루투스는 20년간 자신의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카이사르 자신도 친아들처럼 대했다. 실제로 카이사르가 죽기 전해 했던 말은 “아들아, 너마저도”였다고 주장하는 전기 작가도 있다. 카이사르와의 인간적인 관계로 번민했겠지만 브루투스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으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군에 가담했었다. 생전에 카이사르는 이런 브루투스를 용서했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배포가 컸고 공화주의자들까지도 규합할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공모자들이 예상하던 공화정 지지자들의 찬성은 고사하고 그들은 반역자로 몰리게 됐다. 그리고 통솔자를 잃은 로마는 이후 14년간 내란을 겪었다. 로마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카이사르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됐다.
한편 유언장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유언장이 대단히 중시됐으며, 유언장은 해마다 새로 쓰여졌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 유언장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기 1년 전(기원전 45년) 9월 15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유언장에는 카이사르의 여동생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재산의 4분의 3을 상속하고, 카이사르 누나의 자녀인 조카 2명이 나머지 4분의 1을 절반씩 나누어 갖도록 명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대를 잇게 된다. 또 티베리스 강가의 저택을 공원으로 꾸미고, 시민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유언을 전해 듣자 로마 시민들은 경악했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청년으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 나누어 주고 나면 그에게 돌아갈 유산은 거의 남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 유언은 유산 상속이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대를 잇는다”는 이른바 정치적 유언이었다. 이 유언을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였을 것이다.
카이사르에겐 자식이 없었다. 유일한 딸이었던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딸의 죽음은 폼페이우스와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낳은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가 얻은 유일한 친아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친아들에게 왜 이런 대접을 했던 것일까.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카이사르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속주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미래가 있었고, 거기에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갈 큼이 없었다. 그것이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역전의 용사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애송이’ 옥타비아누스와 충돌했다. 두 사람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총독 레피두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이에 옥타비아누스가 타협하면서 5년간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됐다. 이 삼두정치는 기원전 37년에 다시 5년간 연장했다.
그동안 공화주의자에 대한 탄압과 마케도니아로 도망친 카이사르 암살의 공모자들에 대한 척결이 이뤄졌다. 주모자였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군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세계,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포함한 서방세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각각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소아시아 원정을 떠난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타르수스로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냈다.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계획을 세웠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운명을 안토니우스에게 걸었던 것이다.
황금으로 치장한 배, 비색의 돛과 은으로 만든 노, 하프와 피리 소리, 황금으로 장식한 천막과 그 아래 마치 아프로디테처럼 꾸미고 앉아 있는 클레오파트라. 그 옆에 서 있는 에로스 복장의 아이들과 아름다운 시녀들. 달콤한 향기…..플루타르코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단숨에 틀레오파트라에게 빠져버렸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식사에 초대하려고 시종을 보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기를 청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클레오파트라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준비가 돼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등불이 많았던 것에 놀랐다. 수많은 등불들이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빛을 발했는데, 위치와 각도에 따라 사각형,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42세, 클레오파트라는 28세였다.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후 수개월간 두 사람은 정치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랑에 빠져 지냈다. 안토니우스가 떠난 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쌍둥이를 낳았다.
기원전 40년 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곁을 떠나 옥타비아누스와의 과녜를 회복한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그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화해 무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기원전 3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를 잊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안티오키아로 떠나 그곳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는 키레네와 키프로스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새롭게 페니키아, 시리아, 실리시아, 크레타 등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원전 34년 동방 제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모든 왕의 여왕, 왕중의 여왕”으로 불렀다.
이 말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며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자에 정신이 나가서 돌았다”고 수군거렸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의 막이 올랐다. 악티움은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북단이며 타르라스의 북쪽 암브라키아 만의 출구에 해당한다. 안토니우스군은 보병 10만, 기병 1반 2000, 군선 500척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군은 보병 8만, 기병 1만 2000, 군선 250척이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이 전투는 옥타비아누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패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으로 유리한 육상전을 포기하고 해상전을 선택한 것이다. 안토니우스군은 이미 수적으로 옥타비아누스군보다 많았을 뿐 아니라 육상전의 경험도 훨씬 풍부했다.
둘째, 해군의 함선 수만 보면 안토니우스군이 옥타비아누스군을 압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승무원이 부족해 대부분의 배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셋째,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그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클레오파트라의 군선 60척이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가 동요해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전선을 이탈했다.
이상이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전투의 과정이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기록한 전기 작가도 있다. 에디트 플라마리온의 <클레오파트라>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군은 이미 육상에서 보급로가 끊겨 있었으며, 해상에서도 주변 섬들이 이미 점령됐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암브라키아 만에 포위된 상태였다.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건 대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었고, 이미 뒤집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듬해 8월 옥타비아누스의 알렉산드리아 점령과 동시에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클레오파트라도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로마의 역사에 크게 관여한 ‘경국지색’의 미녀 클레오파트라는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250년간 이어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3센티미터만 낮았더라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파스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과연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미녀였을까. 이 점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클레오파트라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적 증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말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 클레오파트라의 용모는 사람들이 빠져들 만큼 미녀는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의 용모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힘으로 작용했다.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혀는 마치 화려한 연주를 하는 현악기 같았다.”
그 시대 여성의 매력은 용모뿐 아니라 목소리, 대화의 기교, 교양을 판단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