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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36분에 광주역을 떠나 예술회관 후문으로 가서 4사람을 더 싣고 상무지구 금호지구 송암공단을 지나 서광주역 앞에서 2사람을 실었다. 동창생 모두 34명(강공수 강종원 김부웅 김재일 나성군 나종만 노승남 노양환 류상의 백종팔 송하문 신철남 심원두 양수랑 이만호 이승정 이용환 이원형 이정학 이호창 임병태 임철호 장덕균 장휘부 전종일 정병남 정송연 정영기 정원길 정자룡 조영모 조학 최기동 최성연 등)이 남평 금천과 혁신도시를 지나 영암으로 빠져 나갔다.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달리다가 강진군 성전면 쯤에서 월출산 동쪽 기슭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태평양화학 소유의 녹차 밭 사이를 달렸다. 어느 만큼에선가 백운동 안운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대숲 길을 따라 깊숙이 250m쯤 들어갔더니 우리가 가고자 했던 ‘백운동 별서 정원’이 나왔다. 이곳은 문화유산 답사기(남도답사 1번지)에 소개된 3대 정원(소쇄원, 세연정, 백운동별서) 중의 하나인 곳인데 이번에 내가 산행이사인 강종원에게 강력히 추천하여 오게 된 곳이다.
백운동 별서 정원은 조선시대 원주이씨 이담로(1627~?)가 중년에 지은 별장으로 속설에는 말 한 필 값으로 이곳을 사서 정원으로 꾸며 놓았는데, 내가 <古文眞寶(下)>에 나오는 ‘난정기’(蘭亭記-王羲之가 지음)를 읽다가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매우 서정적인 말이 나왔다. 그 때 마침 인터넷에서 이 말을 검색하다가 정민, 김춘호가 지은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이라는 책 소개에서 이 말이 언급되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다음은 古文眞寶에 나오는 ‘蘭亭記’ 속의 한 대목이다.
원문 - 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역문 - 맑은 물과 격류 하는 여울물이 좌우에 비추며 띠처럼 둘러 있으므로, 이것을 끌어다 유상곡수를 만들고 차례대로 벌려 앉으니, 비록 실과 대통으로 만든 관악기와 현악기의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을 들고 시 한 수를 읊는 것이 또한 그윽한 정을 펴기에 충분하였다.
참고 - 流觴曲水-인공적으로 정원에 물길이 이리저리 구비지면서 흐르게 하여,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선비들이 차례로 앉아 시를 지어 읊으며 술을 마셨다는데, 옛날 중국에서는 3월 上巳日(첫 번째 뱀날)에 냇가에 가서 몸을 씻고 노는 것으로 그 해의 액땜을 한 풍습이 있었다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것을 본 따서 유상곡수를 만들어 즐겼다 한다.
조선시대 이담로라는 분은 ‘白雲洞’이라는 규모가 큰 정원에 流觴曲水를 만들어 놓고 지인들을 초청하여 난정에서 계회를 열고 즐겼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여 곳곳이 퇴락하였는데 강진군청이 복원할 계획이라 한다.
다음은 정민교수가 지은 책에 소개된 대목이다.
전남 강진 백운동에 가본 적이 있는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가 가득한 숲을 따라 걷다가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겨진 바위를 지나면 정원 하나가 나온다. 별서(別墅) 정원. 조선 시대 전통 원림이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강진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의 정원이다.
저자인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고문헌의 기록을 통해 백운동 별서를 더듬는다.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546번지.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기슭을 끼고서 동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강진 지방 양반이었던 이담로가 지은 별장으로, 그가 말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을 데리고 들어온 이래 12대가 살아온 원주 이씨의 생활공간이다.
2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고문헌과 시문을 통해 백운동별서의 조성 내력, 경치를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백운동이 우리나라 차(茶)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신선이 살 것만 같은 유려한 풍경을 자랑한다. 조선 시대 유수한 문장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곳 경치를 예찬한 백운동 12경 연작시를 썼다.
다산은 1812년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 유람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그는 다산초당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곳 풍광을 잊지 못해 <백운첩>을 짓고 백운동별서의 모습을 노래했다. 또 제자인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시를 함께 적어 <백운첩>을 남겼다.
다산은 백운첩에서 백운동의 아름다운 12가지 풍광을 묘사했다. 백운동 뒤의 옥판봉부터 별서로 접어드는 길의 동백나무 숲과 오솔길, 100그루의 매화 숲 등 모두가 절경이다. 조선시대에는 별서를 둘러싼 매화가 장관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부분 유실되고 두 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산은 이 외에도 단풍나무가 비치는 폭포, 별서 마당을 돌아나가는 계곡 등을 백운동의 비경으로 꼽았다.
담헌 이하곤(1677~1724)과 인계 송익휘(1701~?) 역시 백운동 별서를 아낀 조선시대 문장가들이다. 이하곤은 강진 유람기인 ‘남유록(南遊錄)’에 한겨울에 붉게 핀 별서의 동백꽃밭을 인상 깊다고 기록했다. 송익휘는 강진으로 귀양와 있던 중 백운동에 들러 백운동의 풍광을 노래한 시 10편을 지었다.
백운동이 우리나라 차(茶) 문화사에 미친 영향도 주목할 만하다. 백운동 별서 근처에는 운당원 왕대나무 숲이 있다. 이 왕대나무 숲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다산은 백운동의 주인이었던 이시헌을 통해 백운동 대밭에서 채취한 차를 구해 마셨다.
이시헌은 이를 계기로 차에 흥미를 갖게 됐고, 주변의 차 관련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동다기(東茶記)’가 포함된 이덕리의 ‘강심(江心)’이란 문집을 필사해 동다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다기는 당시의 차에 대한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기록이 담겨 있어 조선 차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저술로 꼽힌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담로의 10세손인 이한영이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우리 차문화의 명맥을 잇기도 했다.
영랑생가로 가서 구경을 하였다. 문화해설사(문아무개)의 해설을 들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광복 후, 영랑이 강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낙선하였고,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능에 재질이 있어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성악에 자질이 뛰어나서 우리 무용계의 개척자 최승희와 사귀었고, 결혼까지 하려다가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여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태식당으로 가서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1인당 2만 5천 원짜리 식사를 2만원에 먹었다.
강진읍내의 동문밖에 있는 四宜齋(사의재)로 가서 구경하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백련사로 갔다. 일행들이 산길을 넘어 다산초당으로 갔는데 나는 무릎이 안 좋아 버스에서 기다리다가 일행들이 돌아 올 때까지 쉬었다.
고금도로 갔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 忠武祠로 가서 둘러보고 난 뒤, 뒷풀이를 하였다. 점심을 너무 잘 먹어서 들어갈 것 같지 않았는데 준비한 분들의 성의를 생각하여 술좌석 가까이 갔다가 돼지 수육과 회 무침을 안주로 맥주를 한 캔 마셨다. 돌아오다가 강진 칠량면의 출렁다리를 건너 駕牛島(가우도)를 다녀왔는데 역시 나 혼자 차에서 기다렸다.
이번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상념에 잠겼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내가 존경하는 세 사람(오늘 날 우리 나라의 문화발전과 특히 IT산업의 밑바탕이 된 한글을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중국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유지에 가장 적합한 대군(자신의 아들들)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필생의 업으로 삼아 창제하여 활용하신 세종대왕, 한 인간으로서 극한상황 속에서도 백행의 근본인 효도를 실천한 하늘이 낸 효자였으며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살신성인으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장군,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교육이념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훈육하고 군왕에게 복종하도록 하였던 조선 후기에, 군왕 정조로부터 극진한 총애를 받다가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궁벽한 적소로 완전 격리되어서 사는 동안,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밑바닥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목민관의 사명을 낱낱이 적시하고 비현실적이고 가혹한 율령을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등의 수 많은 저작을 출판하여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 다산 정약용) 중에서 두 분의 유적들을 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다산은 합하여 18년의 귀양살이 중에서,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강진의 땅과 물 그리고 강진의 풍광에 젖어 강진사람들과 함께 숨 쉬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고 나타내었으니 그분의 저작은 모두 그분의 것이면서 또한 강진의 것이라 생각하니, 같은 남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그리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양이 풀린 뒤에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고향 마현의 두 물머리에 살면서, 강진에서 보다 훨씬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리도 못잊어 했던 가족들과 함께 사는 동안, 두 개의 한강을 주유(周遊)하는 한 편, 유유자적하면서도 느긋하게 저술활동을 하다가 역시 여기에서 18년을 살다가 갔으니, 어찌 그리 두 번의 18이라는 숫자와 함께 나라와 백성들에게 온 몸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오늘 따라 왠지 내가 직접 뵙지도 못한 분이지만 그 분이 그리워질까?
다음으로 이순신이다. 당시에 백성들은 수군에 징집되기를 정말 싫어했단다. 육군은 싸움에 나가더라도 지치고 힘들면 도망은 아닐지라도 잠시 피해서 숨어 있다가 복귀할 수도 있었지만, 수군은 한 번 배에 오르면 뭍으로 올라 올 수 없었고, 배가 뭍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어서 수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수군을 피하여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토굴을 파고 들어가서 도둑 같은 삶을 살기도 하였다한다. 그런데 이순신부대의 수군은 달랐으니 주둔한 인근의 백성들과 함께 둔전을 일구어 충분한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힘을 가장 많이 쓰는 노꾼들을 배불리 먹여주었고,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전투에는 출전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기다려서 충분한 준비를 마쳤을때 즉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만 참전하였으며, 엄한 군율과 끊임없는 전술 훈련으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전사자가 거의 없는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의 수군들은 오로지 자기 목숨을 장군에게 맡길 정도로 장군을 신뢰하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명량해전 같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도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참고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50여척의 적선과 대치하여 3시간의 전투를 벌이고 나서 피해상황을 확인했더니 전사자 2명에 부상자 3명이었다고 어느 기록에서 본 기억이 난다.)
우리가 가 보았던 고금도의 충무사(忠武祠)는 1597년 일본이 정유재침으로 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실각되고, 신임 통제사 원균의 조선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된 후, 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의 기적을 이룬 뒤에, 빈약한 수군을 이끌고 목포 앞에 있는 고하도나 서해의 안면도 등으로 떠돌아다니다가, 1598년 본진을 고금도로 옮겨 정착하면서 어느 정도 수군의 면모를 갖추어서 다시 한 번 본격적인 수군 조련을 하였던 곳이다. 여기서 조련한 함대로 마침내 퇴각하는 일본 정벌군을 박살내었던 노량해전에서 장군은 전사하여 시신을 고금진으로 모셔와 가매장하였던 무덤의 터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충무사를 지어 오늘날까지 충무공을 기리고 있었다.
첫댓글 고생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