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의 역사와 문화
룩셈부르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로마의 케사르가 B.C. 57년께에 이 지역을 점령하고 성채를 건설한 때이다. 그후 5세기께에는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고, 963년에 룩셈부르크가의 창시자인 아르덴의 지그프리트 백작이 오늘날 수도의 초석이 되는 성을 건설하였다. 이 요새화된 도시는 중세 시대 말까지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이 곳을 장악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고 400년 동안 20차례 이상 파괴되었다가 재건설되곤 하여 스페인의 지브롤터 해협(Gibraltar)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한 요새라는 명성을 얻었고 `북쪽의 지브롤터 또는 육지의 지브롤터"라는 애칭도 갖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 룩셈부르크가는 네 명의 신성 로마 황제,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들을 배출하면서 14~15세기에 황금기를 맞았고, 나폴레옹의 지배를 겪은 후 1814년에 벨기에와 함께 네덜란드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 것은 독립에 대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열망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되어 1839년에 네덜란드 영토의 일부분이 오늘날의 룩셈부르크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1867년 런던 조약에서 중립국임이 선언될 때까지 독일 연방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1차 세계 대전(1914~1918) 이후 룩셈부르크는 독일 관세 동맹에서 탈퇴하여 벨기에를 경제 통합의 파트너로 삼았다. 그러나 1차,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게 점령되어 심한 피해를 보았다. 1944년에는 네덜란드, 벨기에의 수뇌와 함께 런던에서 관세에 관한 회의를 연 것이 시초가 되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합쳐 베네룩스 3국이라는 호칭이 쓰이게 되었다. 194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중립국임을 삭제했으며 그후 룩셈부르크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풍부하게 매장된 철광석 개발로 세계의 20세기 역사에 뛰어들었고 1970년대 철강 산업이 불황을 겪자 형평에 알맞는 금융법과 세제(稅制)법을 도입함으로써 어려움을 타개하였고 현재는 국제적인 금융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II. 자연 환경
룩셈부르크는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명을 지도상에 표시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Lux"라는 생략형 문자로 나타내기도 한다. 면적은 2586km2에 이르며 벨기에, 독일, 프랑스 사이에 놓여 있다. 북쪽은 산악 지대이고, 남쪽은 농경 및 광산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베네룩스의 다른 두 나라(네덜란드, 벨기에)가 낮은 지대에 위치한 반면 룩셈부르크는 평균 고도가 400~540m 정도로 지대가 낮지 않다.
기후는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추운 온대성 기후를 보이고 있다. 특히 아르덴 산악 지대가 추운 편이며 종종 눈이 내리기도 한다. 봄철의 룩셈부르크에는 야생꽃들이 만발하게 피어난다.
III. 정치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헌법상 하원이 입법권을, 군주가 행정권을 가지도록 되어 있는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하원은 60명으로 구성되며 5년마다 선출된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주권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1964년 그의 어머니의 퇴위로 왕위를 물려받은 진(Jean) 대공이 영도하고 있다.
1974년 5월 선거에서 55년 동안 정국을 주도해 왔던 보수적인 PSC(사회 기독교당)가 패하고, 중도 좌파인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이 이전의 PSC 자유 정부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1994년 하원 선거에서 PSC는 21석을 차지했고 사회주의자 연합은 17석을 차지하였다.
IV. 경제
룩셈부르크는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 1인당 국민 소득은 유럽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1994년의 경우 GDP(국내 총생산)의 88.5%를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이 담당할 정도로 해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이다. 전통적으로 철강 산업은 1970년대 이후 하강 국면을 맞이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중요한 수출 분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의 경제 성장은 국제적인 금융 기관들과 지주 회사, 건설과 무역업이 주도하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민족
국명이 `작은 성"을 의미하는 레체부르크에서 유래한 룩셈부르크는 벨기에와 같이 게르만·라틴 두 민족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게르만 문화와 라틴 문화의 영향을 두루 받았다. 룩셈부르크인들의 민족성은 돌담에 요약되어 새겨져 있는데, 즉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존하기 원한다”라는 말이 그들의 특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오랜 외세 통치의 역사 속에서도 룩셈부르크의 40만 주민들은 꾸준히, 고유한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해 왔다.
“룩셈부르크인은 혼자 있을 때는 장미밭을 가꾸고, 둘이 모이면 커피를 마시고, 셋이 모이면 악단을 만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유 있고 명랑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40만 900명(1993년 기준)인데 노동력의 50%이상이 룩셈부르크 국적이 아니다. 1992년에 총노동력은 20만 1100명이지만 4만 3300명이 프랑스, 벨기에, 독일로부터 온 비거주자들이었다.
2. 종교
인구의 95% 이상이 카톨릭을 신봉하고 있으며, 교회는 정치, 미디어, 교육, 일상 생활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 언어
룩셈부르크에는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 독일어와 룩셈부르크의 모국어이며 독일어의 방언 가운데 하나인 레체뷔르게쉬(Letzeburgesch)어가 있다. 독일어가 1985년에 공식 언어로 선언되었으나 룩셈부르크인들은 그들의 집이나 거리에서 주로 레체뷔르게쉬어로 말한다.
4. 예술
소수의 룩셈부르크인이 예술에 있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미국 사진 촬영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에드워드 스타이첸(Edward Steichen)이다. 그는 1955년에 `인류의 단합"이란 주제로 세계 도처에서 모은 503편의 사진 작품을 전시하였다.
또한 표현주의 화가인 요셉 쿠터(Joseph Kutter)는 현대 예술을 룩셈부르크에 소개했고, 로져 만더쉐이드(Roger Manderscheid)도 현대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5. 음식
룩셈부르크의 요리는 돼지고기, 신선한 물고기 그리고 사냥한 새고기를 많이 사용하는 벨기에의 왈로니아(Wallonia) 지역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역 특산 음식에 있어서는 독일 음식의 영향도 상당히 많이 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와인은 톡 쏘는 맛으로 유명하며, 가을에 열리는 그레헨마헤르의 와인과 포도제 때에는 많은 유럽인들이 와서 즐겨 마시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