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
몇 달 전에는 예천의 강형제 부부와 청송의 조형제 부부가 방문하여 과거 부산과 대구 및 성주에서의 추억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강형제는 원래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하다가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그곳에서 훈련도 받고 복음을 전하다 다시 브라질로 7년간 봉사를 하다가 예천으로 정착하여 아로니아 농사를 짓고 있다. 조형제는 부산에서 제화점을 운영하다 부산교회서 집사실에 13년 봉사하고 8체질 병원에서도 근무하다 2011년에 청송에 정착하여 품질 좋은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어제는 다시 조형제 부부와 동생이 다시 방문하였다. 저녁을 사겠다는데 굳이 사양하고 오히려 식사대접을 받았다. 성서침례교회 시절부터 40년 이상 주 안에서 신실하다. 교회 안에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어렵고 힘든 형제들을 아비의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돌본다.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않는 보기 드문 귀한 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청송의 절경인 주왕산 후문에 형제의 집이 있다며 꼭 방문하기를 수 차례 권한다. 특히 달기 약수로 끓인 백숙이 별미라며 자매님까지 권하니 주님이 허락하시면 2-3일은 기도하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형제가 이주하면서 청송교회가 시작되어 지체들을 양육하며 섬기고 있다. 고추농사가 4월 말부터 11월까지 이뤄지고 그 후에는 주로 교회방문을 한다고 하였다. 작년에는 대만 교회들을 방문하였고 올해는 일본 교회들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최근 고교시절 절친인 이창호 형제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신앙을 회복하여 김해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갓 거듭나서 복음의 영이 불탈 때,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주님을 영접하게 했고, 대연성서침례교회로 인도했다. 그 당시 내가 전도한 정형제, 김형제도 김해, 거제도 등지에서 잘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창호 형제가 요즘 그들을 만나 옛 추억을 회고하며 뜨거웠던 처음 사랑에 대해 교통하였다고 한다. 이번 여름에 거제도에 팬션을 얻어 1박2일로 배를 타고 낚시를 하자고 한다. 세상에서의 인연은 허망하게 끝나지만 주 안에서 맺어진 영적인 형제관계는 영원하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비록 이 땅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천년왕국에서, 또 새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만나는 영원한 동반자들이다. 당시 대연성서침례교회의 전도사였던 임홍욱 형제도 이제 70중반이 되었겠지만, 주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그가 사역하는 창녕 교회도 수 년 내로 부흥이 임하기를!
서울에서 판교로 다시 포항으로 인도함을 받아 정중동 하는 가운데, ‘그 교회(호 에클레시아)’에 대한 하늘의 이상을 보게 되었는데, [성령침례]와 [가정에 있는 교회]에 대한 빛이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매우 분명해졌다. 사역에 대한 재고와 교회의 길이 또렷해 진 것이다. 이에 대해 형제들과 교통하면서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러나 주님 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여 잠잠히 기도만 하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발목을 잡아 여행에 제한이 있었다.
요즘 주님의 뚜렷한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평소 교통을 유지하고 있는 형제들 외에 최근 교통을 시작하게 된 형제들이 많다. 주요한 특징은 주님께서 나에게 보이신 이상을 교통하면 화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동일한 부담을 갖도록 인도받아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주의 강형제와 ,동탄의 이형제, 인천의 최형제등과 같은 부담을 나누고 있다. 또 강원도의 소금인형 자매를 소개받았다. 꼭 방문하여 교통하고자 한다.
이번 주일에는 진주의 가정교회에서 떡을 뗐다. 김성진 형제댁에서다. 푸른 잔디와 텃밭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팬션에서 찬양과 기도와 경배를 드리고, 풍성한 애찬을 누리니 기쁨이 한량없다. 진주는 참 아름다운 도시이다. 경남에서 지명에 ‘고을 주(州)’자가 붙은 곳은 진주뿐이다. 예부터 큰 고을이라는 뜻이. 진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도 무려 80개이다. 경주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도청소재지를 창원에 뺏기면서 큰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성진 형제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으나 결국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가정에 있는 교회로 안착하게 되었다. 자매님의 간증 또한 울림이 있었다. 기소선에서 수십 년간 생활하면서 즐거운 신앙생활을 영위하다가, 박옥수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제가 강화되면서 수많은 비리가 도출되어 견딜 수가 없어 나왔다고 한다. 그 후 지방교회와 형제회에서도 생활을 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했다. 올해 초 결혼한 아들 내외도 함께 살고 있었는데 순박하고 사랑스런 부부였다. 그들의 교통도 무척 신선했고 달콤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은 어느 공동체에 있든 간에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본능이자 특권이다(고후13:13).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교통하심에 간격이 생긴다면 분명 특정 교단의 독특한 교리에 세뇌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자유롭기는커녕 오히려 교단의 종이 되어 그들의 소모품이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교통을 방해하는 자들은 각 교단의 기득권층이다. 교단의 양떼들을 앵벌이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특수 교리로 세뇌시켜 울타리 밖으로 가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교통을 금지시킨다. 우리는 교주나 지도자들의 양들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세뇌되지 않은 양들은 오직 주 예수의 음성만을 따른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살펴보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도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 또 계시록 14장 4절의 말씀을 보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이 마지막 시대에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따라가는 자들은 얼마나 축복된 자들인지! 각 교단의 출판사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책자들로 세뇌된 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린 양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없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교단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교리와 이론을 배설물로 여기고 기도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므로 이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이기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성도들을 갈갈이 찢어지게 하고 서로를 원수 되게 하고 교통을 단절시키는 사역자들의 심판은 참으로 엄중하리라. 사도 바울도 사역자들의 엄중함에 대해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언급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심지어 주님께서도 엄히 경고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사역자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역자들을 선호하는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 미성숙함이 문제이지만, 그들의 마음을 훔치고자 하는 사역자들의 문제도 더욱 큰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에게 큰 은사를 주셨다. 말씀을 전하는 은사와 병고치는 은사를 주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이러한 은사로 인해 성숙하지 못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사역자들을 존경하고 심지어 숭배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할 때 사역자들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적이 있다. 베드로가 그를 걷게 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베드로를 숭배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할 때, 베드로의 반응과 자세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본이 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할 때,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우리를 존경하고 따르라. 또한 우리에게 헌금해라.”고 일반 교주들의 행보와 같지 않고 즉시 자신들의 무익함을 선언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였다. 베드로가 연이어 선포했다. “…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사도행전3:16) 자신들은 철저히 낮추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 사역자들의 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바울의 경우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인 자를 걷게 하였다(사도행전14장).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고 하였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대문 앞에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교주였으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고자 하는 교인들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하며 은근슬쩍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이라.”(사도행전 14:14~15) 자신의 사역의 결과로 큰 역사가 이뤄졌을 때, 스스로 낮아지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바울은 신의 위치에서 사람의 위치로 내려와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역자들이 초심을 잃고 숭배 받는 위치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분열과 혼돈의 원인이 사역자들로 말미암는다. 실로 ‘사역자들의 난(亂)’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뛰어나고 영적인 바울까지도 교만하지 않도록 사탄의 가시를 주셨다. 조금의 성공에도 우쭐하는 사역자들은 자신의 은사로 주님의 양들을 자기의 제자로 만든다.
사역자들의 본이라 할 수 있는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였다(사도행전 20:19-38).
1.모든 겸손과 눈물
사역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고 또한 눈물이다. 능력있는 사역자들에게 겸손과 눈물을 찾는 것이 쓰레기통에 장미를 구하는 것처럼 어렵다.
2.시험과 주를 섬기는 것
시험은 주로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기득권층의 간계와 유사하다. 우리는 교주나 교단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
3.전하고 가르침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 특히 각 집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하고 가르치는 장소가 각 집이라는 것은 친밀한 가운데 각 사람을 온전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날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도 기억 할 수 없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전하는 메시지와는 사뭇 다르다.
4.회개와 믿음을 증언함
유대인과 헬라인, 곧 모든 인종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함.
5.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
사역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이다.
6.피에 대하여 깨끗함
성도들을 이간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없는 사역을 해야 함.
7.성령께서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음
장로들을 감독으로 삼은 이는 성령님이시다. 사도들이 이를 확인하고 안수 할 수 있으나 사도들이 세우는 것이 아님. 오늘날 사역자들이 자신들에게 인사권이 있는 줄 착각하고 성령님이 세우지 않는 장로 및 감독자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세워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가장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 질 것이다.
8.장로 및 감독들의 위임
성령께서 장로와 감독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시기 위함이다.
9.사나운 이리가 올 것을 예언
참된 사역자들이 떠난 후에는 양을 탈을 쓴 사나운 이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 함. 자신의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해서 성도들을 추방하는 사나운 이리들이 있음을 체험하였음.
10.장로들을 향한 엄한 경고
심지어 성령이 세운 장로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영으로 시작하여 겸손하고 섬기는 자들이 교만하게 되어 어그러진 말과 교묘한 말로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경험하였다.
11.사도의 당부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당부함. 각 사람에게 훈계한 사도의 사역은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공과이다.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30명 이상의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안부를 묻고 격려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각 집에서, 각 사람을 훈계하고 온전케 하면서 그들의 마음과 약함을 알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역자였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매년 말씀을 전하러 오는 사역자에게 묻고 싶다. 그들은 과연 한국에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는가? 그들은 각 집에서 각 사람에게 훈계하면서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한 적이 있는가? 과연 그들은 한국의 성도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가? 바울은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이 많은 반면, 매년 한 두 번 메시지나 전하고 오성급 호텔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거만한 사역자들은 아비가 아니라 일만 스승 중 하나이리라.
12.성도들을 은혜의 말씀에 부탁함
교단이나 사람에게 성도들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에 성도들을 부탁하였다. 그 말씀이 성도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신다.
13.사도 바울의 자세
아무의 은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심지어 손으로 일을 하여 바울의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하였고 범사에 성도들에게 모본을 보여주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실천하였다. 오늘날 사역자들은 손으로 일을 하여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하기는커녕, 항공료, 숙박료와 고급 식당까지 다 제공 받으며, 심지어 두둑한 사례비까지 받아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니 니골라당의 끝판왕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형제사랑으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부에서 온 사역자들에게 아부하여야 하는 한국의 니골라당의 행위이리라. 물론 자기의 경비로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피 같은 헌금이다. 신약에서는 주로 구제하는 데 거의 대부분의 헌금이 쓰여졌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성경의 핵심이고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새예루살렘까지 다루는 하나님의 경륜을 열어 주는 교단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주님의 안배로 WL와 Titus와 DYR 같은 큰 사역자들과 제법 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는데 초기에는 그런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이상하게 느낀 점은 거의 대다수 나라에서 책임을 맡은 인도자는 다 중국인이라는 점이었다. 원래 한국도 중국인 같은 Wang형제가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으나 나중에 한국인으로 밝혀졌다. 대만에서도 중국인으로 알려졌기에 대만의 성도들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의 황 형제나 필리핀의 유치성 형제나 태국의 조지벽 형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뿐 아니라 독일의 John So까지 중국 사람이 인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8-9명의 중국인이 전세계를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의 교황이 주로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으로 선출되는 것과 같이 이 교단은 중국인이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 새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옛 창조의 인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대전교회 생활을 하다가 동두천으로 후에는 고양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회 초기 멤버인 80세가 넘은 고령의 정해득 형제가 있다. 어느 날 어떤 형제가 그 분에게 WN가 중국 감옥에서 순교한 것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그것은 WN를 향한 주님의 큰 긍휼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재차 질문하자, “중국인은 천하사상이 있어. 만약 WN가 중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서방으로 왔다면 분명 교만하여 말로가 비참해졌을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다. 성령침례로 인해 인종과 계급과 남녀의 차별이 없는 신인류가 되기 전에는 모두 옛 창조 안에서 인종의 특징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중국인의 특징은 천하사상으로 천자나 황제로 군림하는 DNA가 있고 전체주의적 전제군주제가 피에 녹아있다. 중국역사와 최근의 시진핑의 일대일로와 중국몽에 의해 확인된다. 중국인이 인도자가 된 교단은 분명 전체주의적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조성되리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리라. 각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도행전의 성도처럼 오직 성령의 인도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적인 헌법기관이지만, 전체주의적 시스템에서는 사역자들에 의해 피동적이며 하찮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WN가 본 진리의 빛에 의하면 모든 교회는 동등하며 각각의 행정은 독립되어 있고 땅에서는 본부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교통만이 우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WL는 이러한 빛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서서히 아나하임을 본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각 교회의 독립성도 한 몸이라는 명분으로 무력화시켰다. ‘각 지역교회는 과정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목적이다’라는 교언영색으로 성도들을 세뇌시켰다. 이러한 변질된 교리를 전하던 아나하임에서의 어느 날에 DYR의 큰 아들인 David Dong이 벌떡 일어나서 WL의 말이 WN와는 많이 다르다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라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WL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낮아진 마음이었던 것 같다. Mid-West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던 Titus와도 매우 친밀했는데, 가끔 Titus를 만나러 왔는데, 손에 뭔가 한 움큼 쥐고 있다가 Titus에게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손을 펴보면 꼬깃꼬깃한 5달러 10달러짜리 지폐가 가득했다고 한다. 초기에 재정이 어려웠던 시절에 동역자인 Titus를 위한 사랑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꼬인 것은 한국 때문이었다. Wang 형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후계자로 지목된 Lee와 이를 인정하지 않던 세력간에 갈등으로 분열이 있자 WL가 Titus를 한국으로 보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말씀이 힘있고, 체험이 풍부한 Titus가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했다. Titus가 한국에 와서 오래 시간을 지내보니 한국 땅이 옥토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복음에 열정적인 성도들, 아낌없이 물질을 드리는 성정, 외국에서 온 사역자들에게 절대적인 순종과 헌신이 한국사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몇 넌 전에 브라질에서 온 Miguel Ma도 한국에 와서 동일한 것을 느끼고 강한 부담을 가졌지만 예상치 못한 반대로 좌절을 맛보았다. 그 후폭풍은 언젠가 일어나리라고 본다. 결국 Titus도 한국의 반대세력이 지속적으로 WL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한국행을 좌절시켰다.
WL와 Titus와의 긴밀한 관계도 한국이라는 옥토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나하임과 클리블랜드 두 사역의 중심지에 제법 오랜 세월을 보낸 후 느낀 결론은 WL와 그의 직속 동역자들은 Titus의 사역을 상당히 두려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 느낀 Titus는 매우 영적인 사람이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WL와는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대만의 Livigstone Lee는 Titus의 추종자였는데 항상 그의 메시지를 듣는다고 나에게 직접 이야기 한 적도 있다. 이봉명 형제도 대만에서 클리블랜드로 이주한 동역자였다. Titus는 눈물도 많고 감성적이며 찬송을 매우 잘 부르고 또 찬송시도 짓곤 했다. 청년훈련에 대해서는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가장 뛰어난 역량이 아닐까 생각한다. Cleveland의 10months Labor는 정평이 나있다. 나도 그 훈련에 참여하였기에 심층적인 진리추구와 청년들의 인격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마 WN의 고령산 훈련을 모티브로 삼은 듯 하였다. 개인적인 매력으로 말한다면 Titus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그러나 Titus의 야심, 좋게 말하면 웅지는 대단하였다. WL이후에 신탁의 말씀이 거의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중국 역사책을 탐독하였다. 거대한 대륙에서 펼쳐지는 대서사시에 몰입되는 듯 하였고 역사의 거인과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당시에는 이러한 것에 큰 문제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의 빛에 의해 인종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아직 한 새사람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인의 DNA는 천하사상이 있고 전제적인 전체주의라는 것이며, 그들이 사역하는 교회들에서는 그 성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경향에 반기를 든 백인 사역자들이 10년 간격으로 WL를 대항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Titus도 영적인 중국몽을 꾼 것이 아닐까? 중국문화의 자긍심과 중화사상(中華思想), 곧 자신이 중심이며 주변 오랑캐들을 복속하여 다스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천하사상에서 벗어난 중국인 사역자들을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공맹사상과 노장자의 사상을 표출시킨 한족들의 사변적 추구는 타 민족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기에 성경의 해석도 깊이가 있고 심오하다. 최근 한국에서 신천지 이상으로 기독교에 파고드는 동방번개(전능자)도 WL를 추종하던 중국인이 교주이다. 그들이 전하는 교리도 심오하고 깊이가 있기에 미혹되는 자들이 많다. 교묘한 그들의 교리는 결국 성경을 대체하기에 매우 심각한 사탄의 함정이다. 그들의 교리가 정경이 되고 성경이 외경이나 참고서가 되는 대적의 궤계에 넘어가는 것이다. 멋진 교리와 심오한 사상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할지라도 결코 생명을 얻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여 얻는 유익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Titus가 만약 생명의 흐름 안에서 변화를 받아 중국인의 높은 자긍심과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겸손과 눈물로 한국에서 사역했다면 그의 탁월한 은사로 특히 한국의 대학생들은 큰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화사상이 문제라면 동방의 오랑캐(東夷)로 자처하며 사대주의 DNA가 각인된 비굴한 한국인들이 더 큰 문제이다. 신성한 영의 사역을 옛 창조 안에서 하락시킨 그들로 인해 그 교단은 한국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분열된 상황에서 하나를 이루어낸 Titus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중국인이 유창한 영어로 하나님의 경륜을 전파하는 것이 매우 놀라왔고, 주 안에서의 풍성한 영적 체험과 적절한 비유와 위트가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탁월한 설교자였다. 당시 한국 분열의 리더였던 Lee와 Seo는 Titus를 자신에게 더 우호적이 되도록 온갖 아부를 다했다. Titus는 한국에서도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Cleveland에서 실행하는 10months labor를 한국에서도 이뤄지기를 원했다. 당시 WL 중심의 사역의 통일, 곧 LSM외에 어떤 출판도 허용하지 않고 FTTA와 FTTT 혹은 FTTA가 인정하는 훈련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성경에 나와 있는 한사역에서 찾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에, 한국에서는 Anaheim이 아닌 Cleveland의 훈련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회주의와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Lee와 Seo가 있었기 때문이다.
Titus는 Seo를 훈련교장으로, Lee를 총무로 임명하여 정식으로 훈련을 실행하였다. 그 둘이 전국을 다니면서 훈련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부산에서도 그 둘은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Anaheim의 훈련보다 Cleveland에서의 훈련이 더욱 탁월하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서울에서 Cleveland의 10months labor 방식의 훈련이 이뤄지면서 Titus의 한국 사역은 고착되는 듯했다. 그러나 Titus는 Seo를 리더로 앞세웠지만, 내심 Lee를 더 지지하고 후원하였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Seo는 위기감을 느끼고 Cleveland로 간다고 하면서 실상은 Anaheim으로 갔고, Titus가 한국에서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고, 한사역을 따르지 않는다고 참소를 하게 된다.
그 이후로 Titus는 한국에 올 수가 없었다. WL가 그의 한국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배신적인 행위로 WL의 신뢰를 얻은 Seo는 WL로부터 FTTS의 설립을 허락 받고 초대 원장이 된다. 또 Titus의 진정한 후원을 받은 Lee도 후에 WL가 주님께로 간 후 Anaheim에 의해 주도된 Titus 축출 집회에서 앞장서 자신을 사랑하고 지원해준 Titus를 비판하여 축출의 명분을 주는 역할을 하여 Seo와 다를 바 없는 배신의 행위로 시저의 가슴에 칼을 꽂은 부르투스와 같이 Titus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후에 Titus를 만났을 때, 한국인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여전히 잠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브라질 사역에 깊이 연결되어 6-7년간 DYR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남미는 미국이나 대만 그리고 한국보다는 순수하고 복음의 영이 불타올랐다. DYR은 원래 사역을 위해 브라질에 온 것이 아니라 사업적으로 이민을 왔지만 주님의 인도로 사역자가 되었다. 그의 성실하고 인내하는 성품과 그의 아들들과 Ma씨 형제들의 좋은 동역으로 인해 상당히 견고한 사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중국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DYR 또한 한국 성도들의 활용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한국 성도들 사이에 불화가 있게 한 원인이 되었다. 안과진료를 위해 한국에 삼사 개월 머물다가 돌아간 브라질의 김형제가 DYR이 브라질의 KIM과 HAN에게 충성경쟁을 시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브라질 현지에서 자세히 관찰하였기에 일견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사람의 깊은 속을 판단할 수 없기에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진 않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병언의 구원파에서 회의를 느끼고 이 교단에 입문하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방문한 적이 있는 어떤 형제가 대만과 미국 교회들을 둘러보고는 실망하여 결단을 유보하였는데, 브라질에 다녀온 뒤 확신을 가지고 합류를 결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마다 관점과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구원파에서 영향력 있었던 형제의 말이기에 가볍지 않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내가 체험하고 느낀 것에 대해 함구한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회(호 에클레시아)에 대한 계시가 분명하지 않았기에 대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교회에 대한 이상이 분명하다. 또한 성령침례와 가정에 있는 그 교회도 성경의 근거가 확실하다. 때가 되었기에 오류에 대해서도 밝히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하지도 않았다. 다만 여전히 속임을 당하고 세뇌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성령의 인도로 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로 인도되기 위해 한 무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해 그간 경험했던 오류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이제 사역자의 본인 바울의 선포로 결론을 내리고 싶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린도후서 4:5)
사역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성도들의 종인가, 왕인가?”
사역자들의 난은 지금 기독교 전반에 걸쳐 주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눈 계급제도는 종교기득권층을 형성하게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성직자나 사역자들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어 그들이 없으면 모임이 형성되지 못한다. 사역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사역이 비대해지거나 사역과 교회가 혼합되어 있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타락되어 있다. 앞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사역과 교회와의 관계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역자들 전성시대에서 참된 교회로 회귀하는 주님의 정하신 길은 [가정에 있는 그 교회]라는 것도 밝힐 수 있도록 주님의 긍휼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