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의 성 잘 읽었습니다
선조를 모르시겠다는 글 뜻을 잘 이해하지 못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것은 없으나 여러 좋은 곳에서 읽고 알고 있는 것을 묶어 한번 적어봅니다
그리고 질문 하나 우리민족이 족보를 아끼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아시죠 동포들은 족보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지 또 왕래 한지 꽤 되었는데 각 문중족보에 이름들은 올렸는지 궁금합니다
김씨=우리나라 성씨중 가장 많습니다
여러 김(金)씨는 크게 가락국 수로왕 계통과 신라의 알지 계통으로 나뉩니다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에 뿌리를 두고있습니다
수로왕의 후손 가운데는 김해 김씨,김해 허(許),인천 이(李)씨,함창 김씨등이 있고 진주,수원,영동 김씨등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동성동본으로 뿌리가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8세손 시흥의 후손인 김녕 김씨와 임진왜란때 좌선봉장으로 왜병3000명을 이끌고 귀화하여 김해 김씨로 사성된 김충선의 후손으로 사성 김해김씨가 있다
신라의 알지계통으로는 신라의 왕계를 보면 역대 56왕중 김씨가 38명이며 최초의 김씨왕은 신라13대 미추왕으로 알지의 7세손이다
알지계는 대략 80여본 으로 추정 되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후손이 가장 많다
또한 알지계에서 타성으로 갈려나간 후손으로는 김행=안동 권(權),김순식=강릉 왕(王),궁예의후손 순백=광산 이(李),헌안왕자의후손 세광=감천 문(文),은열의 13손 영규=수성 최(崔)로 성을 바꾸었다
리씨=이(李)씨의 계통은 신라의 육촌중 알평이 다른 다섯촌장이 사성받을때 이씨를 하사받아 경주 이씨로 이어오다 합천,가평,평창,원주,아산,재령,우봉 이씨등으로 나뉜 계통과 전주 이씨의 시조인 한의 계통과 당나라장군 소정방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칠때 함께 따라와 신라로 귀화한 무(연안 이씨의 시조)의 계통과 중국 한문제때 사람인 반의 24세손 황(고성 이씨의 시조)의 계통과 신라의 김수로왕 둘째아들 후예 허겸(인천 이씨의 시조),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청해군으로 봉해진 이지란(청해 이씨의 시조),중국 농서출신으로 낙랑태수를 지낸 진(안악 이씨의 시조)로 나뉜다
그 밖에 우계 이씨와 성주 이씨의 일부도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에 뿌리를 두고있다
박씨=박(朴)씨는 우리 민족 성씨중 귀화족이 없는 성씨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모두 한뿌리이다
최씨=우리나라 성씨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중 하나인 최(崔)는 최씨 특유의 기개,강기,신념,절조등으로 "최고집" "최씨가 앉은 자리엔 풀도 안난다"등의 말이있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육촌중 돌산고허촌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이다
실제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을 주축으로 하여 그 선대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여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같은 후예임은 틀림없다고 본다
윤씨=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로 손꼽히는 윤(尹)씨는 해평,무송,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가 파평 윤씨에서 갈려나간것으로 알려진다
파평 尹씨 시조 윤 신달은 고려조에 벽상삼한 익찬공신 삼중대광 태사를 지냈다
해평 윤씨시조 윤신준은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무송 윤씨시조 윤양비는 고려 예종 때 보승낭장을 지냈다.그는 원래 무송현의 현리로, 현리로서는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 보승낭장을 지냈다고 한다
칠원 윤씨시조 윤시영은 신라조에서 태자태사를 지냈다.
강씨=현존하는 강(姜)씨는 모두가 진주 강씨에서 나뉜 지파임이 확실하므로 진주 강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진주 姜씨 시조는 고구려에서 무장을 지낸 강 이식이다
康씨는 충렬공 지연을 일세조로 하여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진주 등 10여 본으로 나눠져 왔으나, 오늘날 현존하는 거의 모든 康씨는 신천과 곡산 ·재령 등 3본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중시조 지연은 고려 명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고종때 몽고의 난이 일어나 강화로 천도할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녹훈되어 신성(신천의 고호)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신천으로 하였고, 그의 6세손 윤성이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이부 시랑 등을 지낸 후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그후 이태조의 국구(그의 딸이 신덕왕후가 됨)가 되어 상산(곡산의 고호)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곡산으로 하였다.
한편 8세손 득룡은 고려 공민왕때 삼사우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뜻을 품고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송경(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라 불리웠고, 그후에 태조가 그를 안릉(재령의 고호) 부원군에 봉하고 안정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후손이 재령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전라 감사를 지낸 영은 신덕왕후의 사촌 오라버니로 왕자의 난때 제주도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쳐 제주 康씨 의 입도시조가 되었다.
허씨=허(許)씨는 가락국 김수로왕 왕비 허황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왕비는 아유타국(인도 지방에 있던 옛 왕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 했다고 한다.
그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비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은 金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성인 허씨(許)로 사성 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황후의 30세손 선문은 공암(양천), 사문의 후손은 태인, 33세손 강안의 후손은 하양, 35세손 염의 후손은 김해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전씨=전(全)씨의 도시조는 백제의 개국공신 전섭이다 그는 온조가 남천할 때 오 간 ·을 음 · 마 려 · 곽 충 · 한세기 등 아홉 사람과 함께 온조를 배종한 막료로서 부여에 위례성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워 십제공신의 한 사람으로 환성군에 봉해졌다.
전(田)중 가장 연원이 오래된것은 영광 전씨로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전 종회다 다음으로는 고려때 조산대부를 지낸 전 총문을 시조로 하는 태산 田씨이며, 교동 田씨는 고려말 정용산원을 지낸 전 성무를 시조로 한다
담양 田씨는 고려때 참지정사를 역임한 후 담양군으로 봉함을 받은 전 득시를 시조로 하며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남양田씨는 중국의 한림학사로 고려에 귀화한 전풍을 시조로 하여왔으나 그 계대가 분명치 않으며 고려말 전 주가 고려가 망한후 공주로 유배된후 그의 손자 전 흥이 집안을 일으켜 남양 田씨의 중흥조가 되었다
그외 田씨는 모두가 담양 田씨에서 갈려 나갔다는 것이 통설이다
錢씨는 원나라 순제 때 용도각 직학사 전 유겸이 노국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들어와 문장과 덕행으로 명성을 날림으로써 왕이 평장사를 제수하였고, 최 영 장군의 누이와 혼인을 맺고 개성의 천장교 옆에 정착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전씨(錢)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한씨=한(韓)씨는 연원이 멀리 기자시대까지 올라간다
기자(은나라 성인)의 후손 우평,우량,우성 삼형제중 우량이 마한에서 상당 한씨의 근원을 이룬 것으로 전하며 족보에는 준왕(기자의 40대손)의 후대인 원왕의 아들 우평,우량,우성 삼형제중 우평이 북원에 돌아가서 선우씨라 칭했고, 우량은 마한의 구제에 따라 상당 한씨라 칭했으며, 우성은 평강으로 돌아가서 덕양 기씨가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한씨는 우량의 후송 란이 청주 방정리에 세거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상당 또는 서원으로 한것이 시초가 되며 상당과 서원은 청주의 옛이름이다
함씨=강릉 함(咸)씨 시조 함규는 고려때 광평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몽고군 침입시 대사마대장군을 지냈다
로씨=우리나라 盧씨의 시조는 노수로 중국 범양사람으로 안록산의난을 피해 아들 아홉형제를 데리고 귀화하였다한다 이 아홉형제가 각기 본관을 나누었다 한다
조씨=창녕 조(曺)씨는 창성부원군 계룡을 시조로 한다
조씨는 창녕,능성,남평,옥주,장흥 조씨등이 있다하나 모두가 창녕 조씨에서 갈려나갔다 보는 것이 통설이다
조(趙)씨는 조선시대 세도가문으로 꼽히는 명문가다 조씨(趙)의 상계는 일정하지 않아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며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이라고 해서 같은 뿌리임을 주장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조선 현종조에 이르기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던 전통적인 관례가 있었다.
정씨=정(丁)씨는 본래 중국 당나라사림인 정 덕성이 853년 우리나라 압해도에 살게 되면서 우리나라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정(鄭)씨는 신라 육촌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가 서기32년 본피부로 개칭하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아 서산,낭야 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서산 정씨(鄭)는 본래 중국 절강 사람인 정 신보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송나라에서 상서 형부 원외랑으로 있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아들 인경이 고려 충렬왕때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추성정책안사공신에 올라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랑야 鄭씨시조 정 선갑은 본래 명나라 사람으로 진사로서 9의사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청군의 포로로 심야관에 구금되어 있을때 마침 병자호란에 인질로 그곳에 집계되어 있던 봉림대군과 친교를 맺게 되어 소현 세자가 귀국할 때 배종하여 래조했다가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살게 된 후손들은 본향 랑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천씨=영양 千씨시조 천 암은 명나라초에 조신을 지냈고 그 후손이 영양에서 살았다고 하며 원래 중국 성씨이다 중시조 천 만리는 명나라 말기에 문과에 장원하고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영량사겸 총독장으로 아들 천상, 천희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와서 군량수송을 담당 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정유재란때에도 직산,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우리나라에 귀화 하자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에 봉하고 화산군에 봉하였다.
장씨=장(張)씨 시조 태사공 장정필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때 고창군(현재 안동지방)에서 김 선평(신안동 김씨시조),권 행(안동 권씨시조)등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고창군에 봉해졌다한다
장씨는 덕수,절강 장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가 장 정필의 후손으로서 같은 뿌리라는 것이 통념이다
덕수 張씨시조 장백창(일명 장순용)은 아랍(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절강 張씨시조 장 해빈은 중국 항주의 속현인 오강현 사람으로 정유재란 때 유격장군 오유충의 휘하 장군으로 와서 울산의 증성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하였다
거창 章씨는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예문관대 제학 겸 춘추관사를 지낸 장 종행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장두민은 고려 충숙왕 때 광정대부 판삼사사를 지내고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함께 갔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는 상장군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아림(거창)군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공양왕 때 돈령부 부정을 지낸 장 삼장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남 거창군 화면으로 이사 해서 살았으므로 거창을 본관으로 하였다.
금천 莊씨의 시조 장숙은 1423년(조선 세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황해의 토산현감을 지냈다.
아산 蔣씨는 문헌상으로는 여러 본이나 사실상 아산 단본이다.'蔣'은 원래 중국의 옛지명으로 지금의 여남현이다. 이곳을 주공의 아들 백령이 영지로 받고 지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장씨의 시조 장서는 '대동운부군옥'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신경우위 대장군으로 금나라의 횡포가 심하자 평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선대에게 물려받은 영토를 한치라도 남에게 주어서는 안된다.'며 맞서다 뜻대로 안되자 고려 예종 때 배를 타고 충남 아산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좌복야 박인량과 재보 위계정이 함께 장서가 아산에 와있는 사실을 예종에게 알리자 왕이 장서를 아산군에 봉하고 후손들이 본관을 아산으로 하였다
라씨=라(羅)씨는 나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금성 라씨에서 갈려나진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주 라씨 시조 라 부는 고려때 정의대부,감문위 상장군(정3품벼슬)을 지냈다
금성 라씨 시조 라 총례는 고려 정종때 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한다
림씨=풍천 임(任)씨는 은자 광록대부를 지낸 임 온을 시조로 하고있다
나주 임(林)씨는 고려때 대장군을 지낸 임 비를 시조로 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 林씨는 같은 조상의 자손이란 신념으로 대동단합하여 임씨대동보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방씨=온양 방(方)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군을 정벌하는데 무공을 떨친 방 운을 1세조로 하고 있다
남양 방(房)씨의 시조는 방 계홍으로 벼슬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에 이르렀다
변씨=변(卞)씨의 본관은 초계,밀양 두본이다. 모두가 고려때 문하시중인 변 정실에서 갈려졌다
장연 변(邊)씨의 시조는 고려때 중문지후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진 변 유영이며 황주 邊씨는 고려 고종때의 상장군으로 태천백으로 봉해진 변 려를 시조로 하고있다 원주 邊씨는 변 려의17세손으로 전하는 변 안열은 고려때 무훈을 떨친 명신으로 원천부원군으로 봉해짐으로 인해 원주 변씨 시조가 되었다
서씨=부여 徐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자 부여 융으로서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 갔다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성을 하사 받았다고한다
이천 徐씨 시조 서 신일은 신라때 국운이 다함을 깨닫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고한다 그 후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등의 본으로 갈리었다
신씨=愼씨의 본관은 거창 단본이다 시조 신 수는 고려숙종때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등을 지냈다
고령 申씨의 시조 신 성용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평산 申씨 시조 신 숭겸은 전라도 곡성사람으로 태봉의 기장이었는데 배현경,홍유,복지겸과 더불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 개국원훈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辛씨의 본관은 영산,영월 두본이지만 모두 같은 혈족으로서 영산 신씨가 큰집으로 알려져있다
영산 신씨(辛) 신경이 고려 인종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고,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과 산세가 비슷한 창녕의 영취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신씨(辛)의 시초가 되어 그의 후손에서 영월 신씨(辛)로 분적 되었다.
심씨=沈씨중 청송 심씨는 고려때 문림랑 위위시승등을 역임한 심 홍부를 시조로 하여 조선조에서 수많은 상신과 문형을 배출한 세도가문으로써 상당한 지위를 지켜왔다
고려 예종때 상서봉어를 지낸 심 만승을 시조로 하는 풍산 심씨와 고려 중서사인 심 동로의 후손들인 삼척 심씨는 청송 심씨에서 가려진 것으로 기록하는 문헌이 전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안씨=우리나라 안씨(安)의 도시조는 당나라 출신으로 신라 애장왕(신라 40대왕, 재위기간;800∼809) 때 동래하여 개성의 송악산 밑에 뿌리를 내린 안 원이라고 하며, 그의 본성은 이씨(李)였는데 그의 아들 3형제가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4) 왜구를 토평한 공으로 안씨의 성을 하사받고, 맏아들 지춘은 방준으로, 둘째 아들 엽춘은 방걸로, 셋째 아들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였다.
그리하여 방준(죽산군에 봉해짐)의 8세손 영의를 시조로 하는 죽산 안씨와 방걸(광주군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광주 안씨에서 순흥 안씨(시조는 자미)·신죽산 안씨(시조는 원형)·탐진 안씨(시조는 원린) 등으로 분적되었으며, 그중에서 순흥·광주·죽산 3본이 전체 안씨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안씨와는 전혀 계통이 다른 태원 안씨는 원나라 태원 사람으로 노국공주(고려의 공민왕비)와 함께 동래하여 고려 공민왕때 예부 상서를 지낸 안 만세를 시조로 하고 있다.
양씨=양씨(梁)는 모두가 탐라국 삼성혈 설화의 양을나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다.
양을나는 태고에 제주도 한라산 북록 모흥혈에서 고을나·부을나와 함께 탄강하였으며, 그 곳에 탁라국을 개국하여 양씨의 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남원 楊씨의 시조 양 경문은 고려조에 지영월군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청주 楊씨의 시조 양 기는 원나라의 도첨의시중으로 충렬왕비 제국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와서 귀화했다.
현씨=현씨(玄)는 모두가 연주 현씨의 갈려진 것이란 것이 통설이며, 근래에 와서는 연주 현씨 단본으로 하고 있다.
현씨의 시조는 고려 명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이며, 손자 원고는 순천 현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후손 규는 성주 현씨로 분적되었다.
둘째 아들인 덕유는 고려 명종때 금자광록대부로 회원군에 봉해져 창원 현씨의 시조가 되었다.
진씨=남원 晉씨 시조 진 함조는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장년해서도 문장과 천문 등에 뛰어나 고려 현종이 사부로 예우하고 호부상서에 등용하여 뒤에 좌복야 겸 도정상서 좌복야를 역임하였다. 현종은 또한 진씨 성과 함조라는 이름을 하사 하였다.
眞씨는 백제 8대성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 때 대아손을 지낸 진공, 상대등을 지낸 진복이 있고, 백제에는 고이왕 때 좌평을 지낸 진복, 아신왕 때 국구 병관좌평인 진무 등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진씨의 유래와 시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풍기 秦씨는 당나라 병부 시랑이었던 진 필명이 신라 무열왕때 소정방과 함께 나당 연합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시조가 되었으며, 진주 秦씨는 고려조에서 박사를 지낸 진 욱이 진주군에 봉해짐으로 인하여 관적을 갖게 되었다.
여양 陳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복주 출신인 진 수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양현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진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그 후손 진 총후가 고려 예종때 신호위 대장군으로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여양군에 봉해짐으로써 여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여양 진씨의 시조 총후의 증손 진 온은 나주로 분파 되었으며, 현손 신은 강릉으로 관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척은 준의 넷째 아들 광의의 후손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광동 陳씨는 정유재란때 명나라 원군의 수장이었던 진 린이 강진 고금도에서 전공을 세워 태자 소보에 추증되어 광동백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 영소는 명나라가 망하자 남경으로부터 동도하여 해남현 내해리에 뿌리를 내리고 조상의 향관인 광동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양산 陳씨는 명나라 태조때 승상에 추증된 진 보재의 후손 진 리가 고려 공민왕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평한군에 봉군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선조의 본향지인 양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양산.광동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여양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진씨는 역사상 고려 중엽부터 조선조 초기에 비교적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약 13만을 헤아리는 진씨 인구가 경남과 전남.북 지방에 집중세거하며,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 일대에 약 1억이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차씨=연안 車씨의시조 차 효전은 차 무일의 38세손인 유 차달(문화 유씨의 시조)의 첫째 아들이다. 유차달의 5대 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사냥가는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楊씨를 모방하여 柳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 없다 "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 하고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채씨=평강 蔡씨는 고려 고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채 송년을 시조로 하며, 인천 蔡씨는 고려 중기에 동지추밀원사를 역임한 채 선무를 시조로 하여 이어오고있다
민씨=閔씨는 여흥이 단일본으로서 고려때부터 명문의 지위를 굳혀 오면서 조선조에는 세도가문으로 명성을 날렸다.
민씨(閔)는 중국 산동성 지방의 민가둔이라는 동족부락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공자의 10 제자중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손 민칭도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흥(여주의 옛 지명)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의 시초가 된다
오씨=우리나라 吳씨의 근원에 대해서는 문헌마다의 기록이 다르고 현존하는 오씨의 엇갈린 주장으로 상당한 물의가 있으며 확실한 사적 근거가 없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오씨는 동조동근에서 분적된 계통이라는 주장에는 거의 일치된 의견이며, 종족이 단합하여 오씨중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해주 오씨는 고려 때 군기감을 지낸 인유를 시조로 하여 조선조에서 상신 문형 공신 학자를 비롯한 많은 인물을 배출시켜 명문으로 알려졌으며 동복·나주·보성 오씨도 함양·고창 오씨와 함께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가문을 빛냈다.
지씨=봉산(봉화)智씨 시조는 고려때의 명장 지채문이다. 그는 1010년 게단군이 침입했을때 많은 공을 세웠으며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았다. 난이 평정된 후 그 공으로 전토 30결을 하사받았으며 동 7년 무관으로서 우상시를 겸했고 뒤에 사장군복사로 1등공신에 추록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봉주로 하였다.
충주 池씨 시조 지 경(903~1003)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 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경의 6세손인 지 종해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또 본래는 충주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魚 중익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문씨=남평 文씨는 신라 20대 자비왕 때의 사람인 다성이 문씨의 성을 사성 받아 시조가 되었으며, 감천 문씨의 시조 문 원길은 본래 김알지의 후손이었는데, 그의 선대에서 중국에 들어갔다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씨의 성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한편 정선 문씨 시조 문 임간은 본래 全씨였는데, 역시 중국에서 문명을 날림으로써 문씨의 성을 사성받고 돌아와 벼슬은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인천 門씨의 시조는 고려 때 감문위 낭장을 지낸 문 필대이다
유= 兪씨의 본관은 모두가 신라 때 아찬을 지낸 유 삼재를 도시조로 하여 갈려졌으며, 그중에서도 기계 兪씨가 전체 유씨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劉씨는 漢나라 고조 방의 41세손으로 문장과 도학에 뛰어났던 전이 송나라의 병부 상서를 지낼 때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이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82년 8월에 팔학사 중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에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유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유씨는 가세가 크게 번성하여 전의 맏아들로 거타(거창의 옛 지명) 군에 봉해진 견규를 일세조로 하는 거창 劉씨와 전의 10세손 승비를 일세조로 하는 강릉 유씨劉가 있고, 전의 8세손으로 배천군에 봉해진 국추를 일세조로 하는 배천 劉씨등이 전한다
庾씨의 본관은 동일 혈족으로 사실상 무송 단본이다. 시조 유 검(금)필은 평산 사람으로 고려 개국 초기에 태조 왕건을 도와 마군장군·정서대장군·정남대장군·도통대장군 등을 역임하면서 견훤의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하여 평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래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하였는데, 그의 현손인 유 녹숭이 무송으로 이적하여 평산·무송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柳씨의 본관은 모두 문화 柳씨 시조 류 차달의 9대에서 갈려졌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고려 태조 때의 대승 류 차달은 본래 유주 지방의 호부였는데 고려 개국 당시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렵게 되자 수레를 제작하고 사고를 털어 군량을 보급해 줌으로써 태조로부터 익찬벽상고신에 녹훈되고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큰 아들 효전은 車씨의 성을 잇게하여 연안 車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효금은 柳씨의 성을 이어받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