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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최고의 가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믿음
설교본문 : 다이넬 3:1~30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9년 7월 21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1)
가애교회 2019년 표어 말씀
믿음이란 나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스위치와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스위치를 켜고,
그곳을 향하여 최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을 때
포로 백성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서 바로 이런 믿음의 특징을 살펴보려 합니다.
서론 : 느부갓네살이 꾼 이상한 꿈 이야기(다니엘 2장)
1) 느부갓네살 왕이 꾼 이상한 꿈 이야기
본문 다니엘 3장이 있기 전에 다니엘서 2장에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아주 이상한 꿈을 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분명히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만 잠에서 깨자마자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그 꿈이 뭐였지?’하고 한두 마디 하다가 그냥 지나치는 것이 대부분인데,
느부갓네살 왕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다니엘이 자기가 꾼 꿈을 맞추었을 때 절까지 하며 감동했던 느부갓네살 왕(2:46~47)
느부갓네살 왕은 전국의 모든 박사들과 점쟁이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알아맞히고
해몽까지 하라고 명을 내리고, 만일 이것을 하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경고합니다.
이에 박사인 군인들이 다니엘에게까지 오자 다니엘은 왕께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 꿈을 꾸게 하셔서 다니엘이 꿈도 맞히고 해몽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이 세상에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며
다니엘 앞에 절을 하기까지 합니다. 크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제 1 부 : 강렬한 영적 즐거움을 조심하십시오.
1. 너무나도 쉽게 은혜의 감동을 잊어버리는 느부갓네살 왕
1) 감동을 금방 잊어버리고 곧 우상을 만들어 온 백성에게 절하도록 명을 내리는 느부갓네살 왕(1~2절)
다니엘 2:47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다니엘 3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놓고는 이에 절하지 않으면 강렬한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포고령을 온 나라에 반포하게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분명 이 세상에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고백을 그것도 왕의 신분에서 포로백성에게 절까지 하면서 고백했었는데, 지금 그 감격과 감동은 어디에 가고 이런 기가 막힌 광기만 남은 것일까요?
2) 쉽게 감동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느부갓네살 왕
느부갓네살 왕은 너무나도 쉽게 은혜의 감동을 잊어버리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영적인 즐거움을 아무리 강렬하게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다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오면 곧바로 세상의 욕심과 탐욕의 질서 속으로 빠져드는 자들입니다.
출애굽 때의 애굽의 바로왕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다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애굽 왕으로서의 욕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끝내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참담한 비극을 경험하고 맙니다.
3) 강렬한 영적 체험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더 원하십시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가 경험한 영적 즐거움 그 자체를 곧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주 강렬한 영적인 체험을 했을지라도 그 자체가 곧 나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강렬한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귀는 삶을 살아야만 그 영적 경험이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 묵상 :
강렬한 영적 체험만을 찾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주님과 사귐을 가지십시오.
2. 강렬한 영적 즐거움 속에 감추어진 치명적인 위험
1) 전율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종교집회(3~7절)
황제가 명령하자 집행자가 신호하고 악기가 연주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지방 하급관리까지 일사분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진행됩니다.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체제는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강렬한 리듬의 음악과 더불어 펼쳐지는 엄청난 군중들의 이 군무(群舞)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건한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 국가에서 시장바닥이든, 대로변이든 간에 가릴 것 없이 각자 지닌 담요를 펼치고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 절하는 모습에 강렬한 전율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두고 싸움도 분열도 없는 하나 됨을 이룬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강렬한 영적 즐거움에 속지 마십시오.
역사를 보면 독재자들이 그들의 권세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이런 강렬하고도 경건한 전율을 이용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과 북한 공산주의의 김일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인 군중들로 하여금 강렬한 엑스타시에 빠지게 했고, 그 강렬한 환호 속에서 백성들은 그들을 자기들을 구할 민족의 위대한 메시야로 눈물까지 흘리며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3) 감동적인 집회에서 느끼는 종교적 황홀경(7절)
그 속에 참여한 무리들은 이 강렬한 분위기 속에서 강력한 제국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마치 구원받은 것과 같은 황홀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누가 이 경건하고도 황홀한 즐거움의 잔치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즐거움 속에 우리의 영을 파괴하는 악마의 치명적인 독이 담겨 있습니다.
3. 위장된 종교의식의 실체를 보십시오.
1) 경건으로 위장된 우상숭배
우리는 여기에서 양심도 자유도 모든 것이 박탈된 위장된 종교의식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다인종 다언어 국가인 바벨론 제국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처음부터 가졌습니다. 그 위기감 속에서 매일 악몽도 꾼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철저히 자신의 지배 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려고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경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경건한 종교의식으로 위장된 황제숭배, 국가숭배인 것입니다.
2) 경건으로 위장된 악마의 의식
다니엘서는 마치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로마의 황제숭배가 사탄의 지휘 속에 진행되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666’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듯, 이 거대한 신상의 높이가 60규빗이고, 그 너비가 6규빗이라고 하여 소위 악마의 숫자인 ‘6’이 주는 상징성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위장된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3) 오늘날에는 위장된 종교의식이 내 손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위장된 종교의식이 강렬한 리듬의 음악이나, 너무나도 빨리 변하는 각종 전자제품들을 통해 사람들을 잠식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발전한 휴대폰, 입체영상까지 나오는 텔레비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이 세상의 화려한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 앞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군무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전율을 느끼고 있습니다.
● 묵상 :
어쩌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경고하는 마지막 대혼란기에 이미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위장된 종교의식에 함몰되어 악마의 치명적인 독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제 2 부 :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세 친구의 믿음
4.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므로
1)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다니엘의 세 친구(12~15절)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명령을 거절한 자를 다시 불러서 “한 번 기회를 더 줄 테니 이번엔 꼭 절하라”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꿈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라고 명할 만큼 포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는 “제발 부탁이니 내가 너희들을 죽이게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저 뜨거운 불 앞에서는 그들을 구해주지 못할 텐데 까짓 절하는 것 때문에 꼭 죽어야겠느냐며, 느부갓네살 왕의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꼭 절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므로(16~18절)
그들의 상관이 이 정도 겸손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리면서 애원하고 있다면, 마음까지 그 금신상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닌데, “까짓것 그냥 적당히 절하는 폼만 보이다 말면 되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생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억지춘양으로 행하는 거짓 제스츄어로도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우상숭배 때문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여 지금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직접 몸소 체험한 이들이 다시 그 포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것을 다시 할 수는 없었습니다.
● 묵상 :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면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판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신 명령에 순종만을 바랄 뿐입니다.
5.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세 친구의 믿음
1) 종교적 즐거움 속에 숨겨진 악마의 흉계를 꿰뚫어 본 다니엘의 세 친구
그러나 그 엄청난 군무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머리를 곳곳이 세우고 금신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장된 종교의식을 거절합니다. 강렬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위장된 종교의식에 함몰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풀무불의 권세로 압박하는 왕의 권세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의 음모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 세상에 우리가 섬겨야 할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은 참으로 목숨을 걸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그들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묵상 :
이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지혜대로 참되게 살아가십시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18절)
하나님의 능력은 그 풀무불이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 일곱 배로 뜨거워졌을지라도 능히 그들을 구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셔서 그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절하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그 결정에 따르겠노라는 충성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장차 어떤 고난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일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직 주의 주신 명령에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3) 현대인의 뷔페식 신앙에 대한 고발
현대인들의 신앙을 뷔페식 신앙이라고들 말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일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행한다는 것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런 신앙 고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신앙이 다른 사람들 열심히 섬기는 모습 관람하며 감동받는 것을 은혜라 여기는 고상하고 세련된(?)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축복받은 전형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 묵상 :
사랑과 섬김을 잃어버린 이런 우리네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6.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1)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난 세 친구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며 감히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가 일곱 배나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던져짐으로써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갑자기 황망한 표정을 짓습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친구들이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분명 풀무 안에 세 명이 들어갔는데, 네 명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사람의 모양을 한 신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2) 최후의 승리자가 된 세 친구(24~27절)
그들은 불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서 나왔습니다. 혹시 어디라도 불에 탄 흔적을 찾으려 애썼으나 그슬린 곳은 고사하고 불에 탄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이 불사른 것은 그들을 결박했던 줄과 그들을 포박했던 병사들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승리의 월계관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로 돌아갔습니다.
3) 예수님도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숨을 거두셨을 때 아마도 악마의 진영에서는 승리의 잔치를 벌이지 않았을까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으니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승리의 잔치는 3일을 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상황은 역전되어 악마는 그들이 가진 모든 무기들을 빼앗긴 패잔병들이 되었습니다.
● 묵상 :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권세를 가진 동안 아주 잠시 동안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니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결론 : 최고의 가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할 믿음을 가지십시오.
7.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만 이길 수 있습니다.
1) 돈이라는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오늘날 가장 이기기 힘든 우상은 “자본주의”라는 우상입니다. 오늘날의 금신상은 ‘풍요롭고 안락한 삶에 대한 추구와 탐닉’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정의와 공평을 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섬김의 삶을 살기보다,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복이라 여기며 그것에만 안주하려 합니다. 오늘날 어디에서도 무엇을 섬겨야 할지를 배우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 경쟁이라는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여기에 또 하나의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쟁’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아주 어린아이부터 남과 싸워 이기기 위한 경쟁 속으로 들어갑니다. 무엇 때문에 이겨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목숨을 건 무한경쟁에 뛰어듭니다. 그러다 뒤쳐졌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미 행복하기에 충분한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경쟁에서 뒤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가장 불행한 자로 여기는 시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3) 즐거움이라는 우상도 조심하십시오.
오늘날 방송에서 먹는 프로그램들을 많이 방영합니다. 자극적인 춤을 추며 노래하는 방송들도 많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빼앗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먹는 즐거움, 보고 느끼는 즐거움을 위해 돈 쓰기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은 시간이 걸리니,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자꾸만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런 우상들을 조심하십시오. 이런 우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우상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를 파괴합니다.
4) 이 세 친구로부터 우상숭배와 싸우는 법을 배웁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로부터 우상숭배와 싸워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모든 힘으로 제압하는 이 국가주의라는 우상숭배에 대항했던 사람들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뿐이었습니다. 모든 악기와 함께 그 자리에 모인 바벨론의 모든 백성들, 그 군중들에게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에 함몰되지 않은 자들도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은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강직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강건한 영을 가진 자들이 되도록 경건의 훈련에 힘쓰십시오.
그래야만 마지막 때의 엄청난 혼란의 때를 이길 수 있습니다.
8. 최고의 가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갖추십시오.
1) 이 세상 사람들도 최고의 가치를 위해서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신앙의 일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른 일들에 대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합니다.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간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훈련을 이겨냅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하루에 3~4시간 밖에 자지 않는 고통을 감내합니다.
2) 주께서 주시는 복이 최고의 가지를 지녔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길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 여긴다면 이들처럼 우리도 마땅히 그 길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란, 지금 당장은 그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주께서 우리를 이런 사람이 되도록 도우십니다.
1919년 4월 18일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의 제암리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일제에 의해 제암리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당 안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때로 내 생애에 그 열매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성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때로 이렇게 살아서는 그 열매를 맺는 기쁨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얻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은 하나님 그분을 얻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믿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 바로 그분을 바로 알고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십시오.
주님
주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위해
연단받기를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노라고 고백한
이들의 믿음을 본받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세 친구의 믿음을 본받게 하옵소서.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승리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은혜의 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를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갖추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