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유원지 -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개관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2014. 4. 29-2014. 8. 31
장욱진, 동물가족 덕소벽화, 1964, 209x`130, 회벽에 유채
양주시립장욱진 미술관에서는 개관 기념전으로 장욱진의 변천사를 대표하는 작품, 60여 점이 선을 보이고 있다. 1963년에서 1975년의 덕소 시절, 동양화 기법을 만든 명륜동 시절, 수안보(1980~1985)와 용인 시절(1986~1990)에 이어지는 화가의 사후 안식처이다. 돌아가신 후 24년의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미술관 건립에 맞춰 그동안 흩어지지 않고 유족이 가지고 있던 귀한 그림들이 기증되었다. 유화 19점 먹그림 40여 점, 채색화 80여 점과 판화 2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덕소 시절, 화실과 부엌에 그려졌던 커다란 벽화 두 점도 이참에 기증되어 처음으로 미술관에서 관객들을 맞고 있었다.
미술관은 겉은 가볍고 얇으며 내부는 희고 단정하다. 그러나 건조한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회랑이 교차하면서 요모조모 크고 작은 공간을 연출하고 있어 장욱진의 소박한 그림을 걸기에 적당하다. 그래서 개관 전시는 미술관의 면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건물 안으로 소나무를 들이고 실내에는 보리밭을 펼쳤다. 보리밭 샛길 끝에는 장욱진의 대표작 <자화상>이 걸려있다. 손바닥만 해서 바짝 들여다보게 되는 화면에는 연미복을 입고 검정 우산을 든 장욱진이 누렇게 팬 보리밭 사이를 훠이 걸어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1951년 전란의 와중에 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붉은 길과 열을 지어 날아가는 새와 동화적 구름이 참으로 기이하게 보인다. 그 난리 통에 홀로 연미복을 차려 입은 화가의 심상이 궁금해진다.
장욱진, 자화상, 1951, 14.8x10.8, 종이에 유채
담박하고 격조 높은 한국미술의 현대성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양정고보를 나와 일본 제국대학에서 공부하고,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보낸 <소녀>가 입선하여 화가로 등단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과 함께 ‘신사실파’ 에 참가했으며, 1950년대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에서 잠시 일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것을 제외하고는 1990년 운명할 때까지 평생을 자유롭게 화가로 살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박물관에서 일하며 전통미를 재인식했고, 서울대 재직을 통해서는 평생의 교유관계를 형성하였다.
장욱진, 까치, 1958, 48x36, 캔버스에 유화
1958년에 제작한 <까치>는 초기의 유화가 담백하고 간결한 화풍으로 넘어가는 변화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다. 푸른 달과 까치는 상징성이 강한데, 특히 까치는 그의 분신이랄까? 장욱진이 보통학교 3학년 때 히로시마 고등학교 주최 ‘전일본소학교미전’에서 일등상을 받았던 화제였다. 화가는 두툼하게 쌓아 올렸던 유채를 칼로 다 긁어내서 담백하게 하였다. 이후 1960년대 잠시 앵포르멜의 영향으로 두꺼운 질감이 되살아나지만, 물감을 덜어내어 화면을 간소하게 하는 일은 평생 일관되었다. 종국에는 묽게 그린 유화마저도 테라핀을 묻힌 신문지로 꼭꼭 찍어냈다. 기름진 속기를 닦아낸 격조 높은 세계였다.
장욱진, 나무와 산 1983년, 캔버스에 유채, 30x33
장욱진의 그림은 간단하지만 느슨하거나 엉성하지 않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화면은 극도로 모던하다. 선의 강약과 면의 배치, 색의 조화가 칼같이 간결하고 까다롭다 할 만큼 예민한데, 그림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조화의 정점을 찾아가는 화가의 직관과 집중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많은 논자들은 장욱진을 가리켜 엄격한 모더니스트라고 평가한다. 1950년대 장욱진의 작품은 아동화처럼 간결한 파울 클레 Paul Klee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었다. 양옥과 자동차 등 유럽풍의 소재도 많았다. 이와 같은 초기의 서구적인 요소들은 차차 동양화나 토속적인 민화 풍으로 변모하지만,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미학은 화가의 평생의 신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불·선. 무위의 종교적 승화
기실 내용물을 자꾸자꾸 덜어내는 방식은 그의 삶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스스로 고독의 세계로 들어가는 생활로서 체현하고 구현된 세계라는 뜻이다. 그의 덕소, 수안보, 용인시기는 일반인의 눈에는 도인과도 같은 ‘구도’의 생활이었다. 술에 얽힌 여러 일화들은 화가의 기인으로서의 풍모를 언급할 때 나오는 단골메뉴이다. 하지만 무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저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버려둠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엄격함으로 끊임없이 욕구를 버려낼 때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할 때, 장욱진의 회화는 자연스레 종교화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장욱진, 진진묘, 1970년, 캔버스에 유채, 33x24
1970년 작품 <진진묘>, 간략한 선묘로만 이루어진 부인의 초상화이다. 장욱진이 무탈하게 자신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 부인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부인이 어느 날 예불 드리는 모습을 보고 감복하여 그린 그림이다. 장욱진 자신도 ‘非空’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고, 『황금방주 Golden Ark』(1992) 라는 禪화집을 내고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인도 여행 이후에는 오체투지(伍體投地)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나기도 했다. 간결한 사찰 그림에서 보듯이 멋 내지 않은 최소한의 것으로만 그린 화가의 작품은 불교의 무소유과 공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도나 선을 말하는 미술가는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듯이 장욱진처럼 선의 세계에 가까이 간 미술가는 많지 않다.
장욱진, 밤과 노인, 1990년, 캔버스에 유채, 41x32
家,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유원지
장욱진의 그림은 집과 식구로 이루어져 있다. 늘 동행하는 까치와 개, 나무도 가족의 일부이다. 길은 언덕까지만 이어져 있고, 마을 너머는 재현되어 있지 않다. 외부와의 관계, 구조의 시스템에서 완전히 떨어진 자족의 세계. 장욱진의 소우주가 혹독한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는 거의 픽션에 가까운 것이지만, 많은 이들이 꿈꾸는 근원적 공간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지만 충만한 화가의 지극한 낙원. 평생 마이크로 코스모스만을 집착하는 장욱진의 회화를 전쟁과 격심한 근대화를 뚫고 나가야 했던 불안에서 오는 정서적 퇴행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전쟁마저도 잊게 하는 화가의 무관심을 비역사적이라고 제쳐둘 수도 있다. 그러나 집은 우리의 기억과 삶이 각인되는 공간이자, 정체성이 구축되는 가장 강력한 제도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꿈꾸는 환상을 실체화 한 장욱진의 그림에는 ‘家’ 중심의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외연이 자연스레 걸려든다.
역설이기는 하지만 화가의 절대 고독의 세계에는 광폭한 현대사회가 저절로 따라 온다 무구 청정의 선계 같은 무중력의 시공간에는 역사의 회오리와 넘쳐나는 물욕이 차원을 달리하여 밀봉되어 있는 듯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유·무,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를 환기시키는 공속성을 지니며 쌍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장욱진, 가족도, 1972년, 캔버스에 유채, 7.5x14.8
장욱진의 일생을 살펴보건대, 이 비현실적인 소우주는 화가의 삶에서 실현되었고 그의 작은 캔버스에서 구현되었다. 그래서인지 장욱진의 고독에는 기꺼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자의 여유가 깔려 있다. 자유의 경지이다. 장욱진의 집 그림이 이산(離散)의 화가 이중섭의 가족 그림에서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비극적 느낌과 다른 건강함을 품고 있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관람 중 간간이 미술관의 창문으로 장흥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말 유원지를 찾아와 소박한 소풍을 즐기는 이들의 경쾌한 소음이 장욱진의 그림을 감상하기에 꼭 알맞은 배경음으로 느껴지자, 유원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왜 이곳에 장욱진 미술관이? 했던 의구심이 해소되었다. 소우주에서 무구한 자유를 추구하였던 장욱진의 세계가 주말을 즐기는 가족들의 풍경을 통해 현재로 확장되고 있었다.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문화재단과 양주시가 협력하여 건립한 경기북부 최초의 국공립미술관이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아름다운 공간이 마련되고 귀한 장욱진의 작품들이 많이 모아졌다. 건립한 시와 재단의 바람대로 장욱진 애호가뿐 아니라, 나들이를 나온 가족, 친구, 연인들에게도 뜻 깊은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최-페레이라 건축, 최성희, 로랑 페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