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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동면의 무기고를 부수다
증 언 자 : 김용균 (남)
생년월일 : 1959. 12. 21(당시 나이 21세)
직 업 : 용접공(현재 농업)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울산 현대중공업 용접공으로 근무하던 김용균 씨는 1980년 4월경 군대문제로 광주에 왔다. 5월 21일부터 시위에 참여, 지원동에서 차량통제를 한 후 화순 동면지서의 무기를 탈취하고 도청에서 시체운반, 무기회수 등의 일을 하다가 26일 오후 귀가했다. 5월 28일 청옥동 파출소에 자진출두하여 상무대로 넘겨져 1980년 12월 29일 석방됐다.
현대중공업 용접공으로 일하다
나는 광주시 근교에 위치한 망월동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40마지기의 논과 5백여 평의 밭농사를 지었으므로 마을에서는 부농에 속했다. 나는 생활의 궁핍함을 모르고 자랐지만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공부가 하기 싫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 후 한미공과기술학원에서 3개월간 용접기술을 배우고 1년 정도 공업사에서 일했다. 1978년 어느 정도 기술이 숙달되자 사촌형이 있는 울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형과 자취를 하면서 현대중공업 용접공으로 일했다. 그때 기술자로 대우를 받아 25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내 월급은 공무원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1년 남짓 회사에 다닐 무렵 고향에서 통보가 왔다. 군대 영장이 곧 나올 것 같으니 빨리 일을 정리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직장을 정리하고 1980년 4월초 광주로 왔다. 광주로 와서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뾰족이 하는 일 없이 지내다가 1980년 5월을 맞았다.
호신용 무기를 만들어
5월 19일 오후 한일은행 건너편 다방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지난 11일 경에 여자친구들과 송광사에 놀러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전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동네 친구와 함께 25번 버스를 타고 갔으나 그 버스가 한일은행 부근으로 가지 않아 대인시장 앞에서 내렸다.
친구와 함께 구 대한극장 앞을 지날 즈음 길을 가던 시민들이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그 뒤로는 3, 4명의 공수대원이 곤봉과 대검을 휘두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느닷없는 공수대원들의 행패를 보다 나는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부근의 함석문 뒤에 몸을 숨겼다. 친구는 금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뛰고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엊그제 보았던 전경이 어느새 잔인한 공수부대원들로 교체되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기존의 전경 병력을 늘리기 위해 투입된 데모 진압군으로만 생각했었다. 밖이 조용해지자 더 이상 그곳에서 지체할 수 없어 혼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도망쳐 왔지만 대한극장 앞에서 날뛰던 공수들의 모습이 자꾸만 되살아 났다. 또한 우리 마을에까지 광주시내에서 벌어지는 공수들의 만행이 들려왔다.
동신전문대 앞에서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오신 어머니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님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시내 상황이 궁금해 무작정 집을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볼펜 아랫부분을 잘라 볼펜심을 빼고 대신에 나무젓가락을 끼운 다음 바늘을 찔러 호신용 무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에게 적절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지원동에서 차량통제
5월 21일 오전 8시경에 집 뒤의 조그만 개구멍으로 집을 빠져나왔다. 마을을 벗어나 순천간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화물차를 탔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교도소 앞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트럭에 탄 사람들은 군인들을 보고 더 이상 광주시내로 진입하지 않았다. 트럭에서 나 혼자 내려 문화동 검문소 앞까지 걸어 갔다. 교도소 앞에서 군인들의 제지는 없었다. 문화동 검문소를 지나니 시위차가 많이 돌아다녔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에 탄 40-50명의 사람들이 '계엄해제'를 외치자 나도 그들처럼 구호를 외쳤다. 버스는 전남대 쪽으로 향했다. 전남대 앞 철도 부근에서 차가 멈추자 나는 버스 안의 사람들과 함께 내렸다.
곧바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다. 전남대학교 안에는 열댓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교문 밖에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무언가 항의하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 뭐라고 주고 받던 공수들이 갑자기 교문을 열고 곤봉을 치켜들고 달려 나왔다. '저놈 잡아라. 저 자식 죽여버려라' 하면서 달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의 기세에 놀란 사람들은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도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 철길 옆으로 달려갔다. 조용해지자 전남대 앞 사거리에서 각목을 두들기며 돌아다니는 시위차를 탔다.
노동청 앞을 지날 즈음 아주머니들이 물수건을 던져주었다. 땀을 닦은 후 나는 그 수건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복면을 했다. 시위차는 중간 중간 시민들의 환호에 답해 주기도 하고 목도 축일 겸 잠시 멈췄다. 나는 차에서 내려 어떻게해서든 시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학동다리로 갔다. 학동다리에서 철제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청년 한 명과 함께 차량통제를 했다. 웬지 시외곽지역의 상황이 위험할 것 같아 시외로 빠지려는 차량을 시내 쪽으로 되돌려보냈다. 의외로 사람들은 우리의 지시를 잘 따라주었다. 인근 학동 아주머니들은 우리에게 수고한다며 빵과 음료수 등을 주기도 했다.
화순 동면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다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차량통제를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다.
"젊은이들, 금남로에서는 계엄군들이 총을 쏴서 시민들을 많이 죽였어. 아, 그 죽일 놈들이 총으로 민간인을 죽이니까 우리들도 총을 들어야 해, 총을."
울분에 찬 할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나는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지는 자세한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시외보다는 시내가 더 안전할 것 같아 시내 쪽으로 차를 돌렸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꼴이 되어버렸다. 또 하나는 계엄군이 소지한 M16 자동소총은 위협용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M16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는 일이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무사태평하게 차량통제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곧바로 바리케이드를 걷어치웠다. 시내가 위험하니 차량을 시외로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때 학동 주유소 부근에서 화물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그 차에는 태극기를 덮은 8, 9구의 시신이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시신들이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형상이었다.
인도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아니 저럴 수가 있는가, 쳐죽일 놈들"하며 계엄군의 학살에 치를 떨었다. 그것을 본 우리는 계엄군과 대결하려면 무장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무장을 위해 화순 방면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에 탄 10명 이상의 시위대와 함께 화순군 동면지서 무기고로 향했다. 오후 2, 3시경으로 기억된다. 우리 뒤에 는 트럭 2대와 지프차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동면지서 무기고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차에 탄 트럭 운전수가 차를 돌려 무기고 문을 들이받았다. 문은 박살이 났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과 우리들은 일제히 '와'하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무기고에는 카빈소총과 실탄 등이 있었다. 그곳에 있던 30-40명의 시위대는 모두 무기고로 들어가 각자 총과 실탄으로 무장했다. 비로소 시민군으로서의 완전무장을 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마치 승리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무장한 시위대는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광주로 향했다. 광주시내로 접어들자 인도변에서 웅성거리던 시민들은 무장한 우리들을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더욱더 당당하게 카빈소총을 높이 치켜들고 시내로 향했다.
우리 차는 시민군들이 공원에서 모인다는 소리를 듣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은 여기저기서 모여든 시민군과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 군용트럭 등으로 매우 혼잡했다. 그렇게 혼잡한 틈에서 나는 동네 친구인 박병수를 만났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기뻐했다. 이젠 총과 친구가 있으니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마침 공원에 데모 진압용으로 보이는 페퍼포그 차가 있어 나는 친구와 함께 올라탔다. 차 안에는 5, 6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 차가 방탄차임을 믿고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으로 가던 중 길가에 뿌려진 최루가스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오후 7시경 도청 분수대를 한바퀴 돌고 비장한 각오로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상하게 도청이 텅 비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청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계엄군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가 도청을 장악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둠에 잠기어 휑뎅그렁하게 서 있는 도청은 오히려 싸늘한 기분을 자아냈다. 더 이상 머무른다는 것이 무서워 무엇에 쫓기듯 도청을 빠져나와 버렸다.
도청 사수와 새로운 충돌
22일. 온종일 돌아다닌 탓에 피곤이 몰려와 도청 부근의 여관 옥상에서 친구와 함께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총을 들고 도청 부근을 살펴보러 갔다. 그런데 언제 모였는지 도청 안은 많은 사람들로 굉장히 붐볐다. 친구와 나도 도청으로 들어가 도청 뒤의 숙직실 부근에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방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 몇 명과 나는 어제 화순에서 탈취한 카빈소총을 들고 지프차에 올라타고 서방으로 향했다.
서방 철길 부근에 이르러 우리는 주위의 시민들과 함께 철길 바로 옆 2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동신고 건물 위에는 군복 바지를 입고 웃옷을 벗은 사람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을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로 생각하고 동신고 안에도 많은 군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한 명씩 되돌아 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나도 건물 옥상에서 내려와 그 건물 계단에 앉아 숨을 돌렸다. 바로 옆에는 교련복 바지를 입고 흰색과 파란 색의 체크무늬 상의를 입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앉아 있었다. 시민군들이 모두 빠져나간 건물 안에는 나와 그 학생 둘만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일어섰다. 그때 학생이 나를 붙잡았다. 긴장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금 건물 밖으로 나가면 몹시 위험하니까 기다렸다가 나가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학생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 혼자 남는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갔다.
바로 앞에 있는 전봇대에 바짝 기대어 섰다. 그런 후 1분도 채 안 되었다. '탕'하는 한 방의 총소리가 귀를 찢을 듯했다. 나를 향한 총성이라 생각하고 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건물 안에 남아 있던 학생이 마음에 걸려 그와 함께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했다. '아!'하는 짧은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뻣뻣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나를 붙잡던 학생이 입구에 나뒹굴어 쓰러져 있었다. 계단에는 피가 낭자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총소리가 입구에 있는 학생을 명중한 것이었다. 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나는 피범벅이 된 시체를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시민군 차를 타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에 서방에서의 끔찍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시 외곽지역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시의 중심부인 도청은 시민군들이 장악해 안전했지만 계엄군들이 외곽으로 빠져 시외곽지역은 위험도가 높았다. 그래서 나는 동운동 고속도로 진입로로 갔다. 특히 외부차량을 검문하기에는 그곳이 가장 적합할 성싶었다. 나는 총을 들고 시외로 빠지는 차는 무조건 막았다. 시외로 나가면 계엄군들한테 무조건 총살당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서울로 가려는 외국 기자도 막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기자는 괜찮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고속도로로 광주를 빠져나갔다. 이렇게 두세 시간 동안 차량을 통제했다. 이날 밤은 계림동 파출소 부근의 여관에서 잠을 잤다.
시체를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운반하고
다음날(5월 23일) 아침 도청으로 들어가 동네친구인 노봉이와 함께 시체를 운반하는 일을 했다. 길거리에 그대로 내버려진 시체, 각 병원에서 이송되어 온 시체를 도청이나 상무관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또한 가족들이 나타난 시체를 입관하는 일까지 했다. 어떤 시체는 너무 퉁퉁 부어 관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억지로 밀어넣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체, 두상이 짓뭉개져 부패된 시체, 내장이 밖으로 드러난 시체 등 한마디로 처참했다. 메스꺼움이 치밀어올라 몇 번이나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시체는 도청 민원실 옆과 상무관 안에 가득 찼다.
오후 늦게까지 시체운반 작업을 계속하는데, 화순 너릿재고개에서 시민군이 몰살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쪽의 시체를 운반하기 위해 차를 타고 도청을 나섰다. 학동주유소 부근을 지나칠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차를 가로막았다.
"당신들 죽고 싶어서 그래? 화순으로 나가면 공수들이 무조건 사람을 죽여. 총에 맞고 싶지 않으면 행여 그쪽으로 갈 생각은 하지도 말어!"
할아버지의 호통과 같은 당부에 우리들은 도저히 그곳으로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체 운반작업을 포기하고 도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원동에서 외곽경비
저녁 무렵 친구와 함께 지원동으로 갔다. 숭의실고 맞은편 건물 2층 옥상에서 다른 시민군 2명과 함께 외곽경비를 섰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쪽으로 빛이 스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건너편 산밑의 딸기밭에서 5, 6명의 계엄군들이 딸기를 훔쳐 먹고 있었다. 우리는 계엄군들을 놀려줄 생각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보았다. 그중 한 명이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그들은 꽁지빠진 닭처럼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급히 달아나버렸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해서 보초를 선 우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우리 건물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장갑차 안의 사람들에게 담배를 얻으러 가려는 참이었다. 건너편 숭의실고 건물 지하실에서 머리가 짧은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느낌이 스쳤다. 나는 옥상에서 그에게 "이리와 보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는 조금 걸어오다가 갑자기 담벼락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급히 옥상에서 내려가 총을 들이대며 "이리 나오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며 소리쳤다. 그제서야 그 사람은 나에게 다가왔다. 분명 그는 시민군인 나를 피하고 머리가 짧은 것으로 보아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임에 틀림없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병원차에 그를 실어 도청으로 인계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담배를 얻으려고 장갑차로 다가서는 순간 헤드라이트를 켠 택시가 쏜살같이 오고 있었다. 뒤에는 방금 전 수상한 사람을 태워보낸 병원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앞선 택시는 내가 멈추라고 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갑차도 병원차의 뒤를 이어 택시를 추격했다. 병원차와 장갑차는 택시가 지원동 쪽으로 도망치자 추격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의 추격은 계엄군이 외곽을 지키고 있어 어려웠던 것이다. 알고보니 택시를 운전하던 놈은 내가 방금 전 잡아 보낸 군인이었는데 그렇게 도망을 쳐버렸다.
상황실에 배치되어 무기회수
날이 훤히 새자 나는 도청으로 다시 들어갔다. 지도부인 듯한 사람에게 시체운반 외에 다른 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시체운반 작업을 한 이후 밥 한 숟가락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집을 나온 이후 줄곧 굶다시피 했지만 참담한 시체들을 보니 속이 뒤집히고 사지가 떨려 시체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바로 상황실에 배치되었다. 간첩을 잡았다는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상황실에 있던 5, 6명의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타고 공원 부근으로 갔다. 광주공원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여자 한 명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도청에서 나왔다고 얘기하고 그 여자를 데리고 도청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간첩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냥 돌려 보냈다.
그 후 도청 숙직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군인들로부터 획득한 무전기가 있었다. 무전기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계엄군의 교전이 들렸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세 명을 사살했다."
"거기가 어디냐?"
"고등학교를 짓고 있는 산 중턱이다."
고등학생을 죽였다는 계엄군의 교전을 듣고 나도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사람을 왜 죽였소?"
"그들이 총을 가졌다."
"장소가 어디오?"
"산밑에 신축공사를 하고 있는 학교다."
"시체는 어떻게 했소?"
"부근의 땅을 파고 묻었다."
이 말을 끝으로 계엄군이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것은 무기반납을 하지 않는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겠다는 계엄군의 경고였다.
도청내에서는 지도부의 뜻에 따라 무기가 회수되고 있었다. 나는 직접 화순에서 무기를 가져왔던 터라 '내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오후에는 무기회수를 도왔다.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반납했다. 우리들은 무기가 어느 정도 쌓이자 회수된 4백여 정의 총과 실탄을 트럭에 싣고 광주교도소로 향했다. 나와 서너 명의 사람들은 태극기가 펄렁거리는 지프차에 탔다. 광주교도소가 가까워지자 선두로 간 지프차에 백기를 꽂았다. 우리는 교도소 앞을 지키고 있던 계엄군에게 무기를 건네주었다.
하필이면 독침 장난을 치다니
5월 25일 오전 독침사건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기반납 문제로 술렁거리는 도청 내부는 독침사건이 터지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독침사건'이라는 말에 나는 누구보다도 섬뜩해졌다. 공교롭게도 어제 저녁 상황실 사람들과 장난을 쳤는데 하필이면 독침 장난을 쳤던 것이다. 집에서 나올 때 만든 호신용 무기를 여태까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어제서야 그것을 빼 내었다. 나는 장난감 독침을 책상에 탁탁 두들기면서 상황실 사람들에게 꼭 독침 같지 않냐며 물었다. 그러자 상황실 사람들도 영락없는 독침 같다고 대꾸했던 것이다. 말이 씨가 된 다더니 일이 묘하게 꼬였다.
독침을 맞았다는 사람은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상황실 사람들과 함께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어제 저녁의 괜한 장난으로 범인이 된 듯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상황실 사람들이 전부 도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계속 남아 있었다.
응급실로 들어가 환자에게 어느 부위를 맞았느냐고 묻자 등뒤의 어깨죽지를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독침을 맞은 환자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였다. 어딘가 수상 쩍은 부분이 있음을 판단하고 그의 보호자를 기다렸다.
응급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환자의 보호자가 왔다. 그는 나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안심을 했는지 환자의 아버지라고만 신분을 밝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의 독침 사건은 조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전날밤 공교롭게도 독침 장난을 해 상황실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파출소로 자진출두
5월 26일 오후 4시경이 되자 시체운구반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노봉이의 부모님께서 도청으로 찾아오셨다. 21일 집을 나온 후로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 동네로 소식이 전해졌던 모양이다. 집에 가자고 권유하는 친구 부모님을 따라 노봉이와 나는 6일간의 시민군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두암동 대창정비공장 앞에서부터 군인들의 검문이 시작되었다. 2, 3명의 군인들 중 한 명은 지나가는 사람을 막고, 다른 한 명은 총을 들이대며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검문장소 부근에는 호를 파놓고 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1차 검문장소는 대창버스 정비공장 앞이었고, 2차 검문장소는 소방서를 채 가지 못한 지점이었다. 다행히 주민등록증이 있어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검문소인 광주교도소 앞에서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군인들이 신분증을 요구해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는 순간 신분증이 바람에 날려 밑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계엄군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나를 때릴 자세를 취했다. 다급해진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일부러 떨어뜨린 게 아니라 바람에 날렸어요."
"너, 데모하다 목이 쉬었지?"
내 목소리를 들은 군인이 다그쳤다. 모든 것이 들통나버린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그런데 마침 친구 아버님이 원래 내 목소리가 그렇다고 변명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그곳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집에 온 나는 다음날(27일) 집 부근의 광주 동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놀았다. 반나절을 놀고 있는데 동생이 나를 데리러 왔다. 청옥동 파출소에서 다녀갔다는 것이다. 도청내에서의 6일간의 생활이 불법으로 변해 있었다. 이렇듯 급변한 상황에서 굳이 두 발로 경찰서를 찾아갈 만큼 당당하지는 못했다.
다음날(28일)에도 경찰이 다녀갔다. 이번에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큰집으로 찾아와서 내가 자수하길 바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파출소에서는 동네가 작아 다 알고 있는 처지라 자진출두만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버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날 오후 4시경 청옥동 파출소에 자진출두했다. 광주경찰서로 연락이 되었는지 나를 데리러 왔다. 광주경찰서로 이송된 나는 들어가자마자 군화발에 채였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요?"
"이제껏 네 세상이었지. 여기서 죽어봤자 개값도 안 나와, 알겠어?"
인정사정 없이 구타했다. 놈들은 실탄을 장진한 총을 내 가슴에 겨누고 협박했다. 도청에서의 활동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모할 때 외친 구호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
상무대에서 장계범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29일 상무대로 넘겨졌다. 영창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팬티만 입고 번호판 같은 것을 목에 걸거나 손에 든 채 사진을 찍었다. 나를 당혹스럽게 한 일들은 영창 안에서도 벌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영창 안으로 한발 내딛자마자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미리 영창 안에 들어가 있던 7명의 군인들이 몽둥이로 내 머리를 친 것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나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군인들은 가까이 와서 엎드리라고 하더니 곡괭이 자루로 온몸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리고 여기서 죽어봤자 아무도 모른다는 광주경찰서의 수사관들과 똑같은 얘기를 했다. 영창 안에 빽빽이 들어찬 소위 '폭도'들은 모두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7소대에서의 영창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창 안에는 젊은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늙은 할아버지까지 붙잡혀왔다. 나중에 그분이 홍남순 변호사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 노봉이도 내가 잡힌 3일 후에 상무대로 끌려왔다. 노봉이를 조사하면서 도청내에서의 나의 행적이 샅샅이 드러나버렸다. 그동안 덮어져왔던 독침사건까지 밝혀져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곳에는 독침을 맞았다던 장계범이가 앉아 있었다. 장계범이는 내가 독침을 쏘았다고 수사관들에게 얘기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사실대로 장난감 독침을 만든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그것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만들었던 그 모양 그대로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속 두들겨 맞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수사관이 장계범에게 "네가 이 새끼한테 독침을 맞았으면 진작 죽었을 거야"라며 장난스럽게 장계범의 뺨 한 대를 때렸다. 그때서야 독침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장계범이는 내가 자기 집을 부쉈다고 했다. 실은 그의 집을 알지도 못했는데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많이 두들겨맞았다. 내가 그렇게 맞고 있는 사이 그들은 장계범과 한담을 나누었다. 장계범의 여동생이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했느냐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확실히 장계범은 경찰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고문은 검사들 앞에서도 계속되었다. 마룻바닥으로 된 침상에 무릎을 꿇게 하고 그 사이로 곤봉을 집어넣었다. 두 명이 내 다리 위에 올라서서 밟고 다른 두 명은 다리 사이에 낀 곤봉을 틀었다. 또 책상 위에서 거꾸로 누운 채 코와 입으로 물을 들이마시는 고문을 당했다. 이런 고문을 당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사관 책상 밑에 처박혀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문을 당한 후에는 몸을 가누지 못해 같이 조사받던 사람들이 부축해 주기도 했다. 나는 장계범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쓴 후에 영창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장계범이를 조심하시오"라고 소리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창에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 허리 아래 부위가 심하게 패어 있어 통합병원에서 나온 의사에게 꼭 한 번 주사를 맞았을 뿐이었다.
비좁은 영창 안에서 도청이 진압되던 27일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날 계엄군들은 투항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무차별 난사를 가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영창 안에는 도청에서 손을 들고 나오다 한쪽 손이 총에 맞아 구멍난 사람도 있었다. 또 영암이 집이라던 사람은 27일 이전에 화염방사기에 맞았다고 했는데 그는 얼굴 한쪽이 데어 있었다.
상무대에서 4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사면이 막힌 영창 안에서는 작게 뚫린 구멍 하나가 유일한 시계였다. 구멍을 통해 들어온 햇볕을 보고 시간을 측정했다. 하루 중의 시각은 대략 그렇게 짐작할 수 있지만 날짜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여튼 바깥 날씨가 추워질 무렵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10월경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죄명이 붙었다. '불법무기 소지죄', '소요동조죄' 등으로 기억된다. 4년형이라는 선고가 나를 완전한 죄인으로 확정지었다.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후에야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5월 28일 청옥동 파출소로 자진출두한 이후 집에서는 내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면회를 오신 부모님은 내가 죽은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광주교도소는 상무대보다 약간의 자유가 있었다. 그것은 부당한 것에 대해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교도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각 방에 수감된 모든 재소자들은 함께 외쳤다. 강력하게 항의하는 뜻으로 식기를 문에 부딪혀 소리를 내면서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소자들의 싸움이 크게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주동자들을 벌방에 가둬버렸다.
교도소측에서는 시위의 주동자만 색출하면 일이 쉽게 끝날 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소내의 시위가 그치기는 커녕 더욱 커졌다. 모든 재소자들이 단식투쟁을 하며 소내 처우개선과 벌방에 갇힌 주동자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들의 끊임없는 싸움 끝에 소내의 처우가 약간 개선되기도 했다.
1980년 그해 막바지에 접어들자 상무대 고등법원 검사가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이번에 자술서를 쓰면 석방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술서를 요구한 적이 여러 차례 있어 번번이 속았던 재소자들은 자술서 쓰기를 거부했다.
완강히 거부하는 재소자들한테 검사는 사정조로 나갔다. 죽을 상을 짓고 사정하는 검사의 부탁을 속은 셈치고 들어주기로 했다. 이미 무슨 내용이 씌어져 완성된 자술서에 지장만 찍으면 되었다.
출감 후에도 보이지 않은 사슬이
그날 저녁에 출감되었다. 아마 1980년 12월 29일이었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청옥동 파출소에서 나를 구속하려 들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집 밖에 10-30킬로미터 이상은 나가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었다. 도대체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이었길래 한평생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폭도'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그 대가를 치를 만큼 치렀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도 이런 억압을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무대 영창과 교도소 생활에서 얻은 것은 병뿐이었다. 기관지가 악화되었으며 허리 아래에 마비증세가 나타났다.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하고 한약을 복용해 보았으나 쉽게 아물어지는 상처는 아니었다. 완전히 골병이 든 것이다.
다음해(1981년) 국회의원 선거철에 민정당의 심상우 의원은 내가 자기의 선거를 방해할까봐 미리 선수를 치고 나왔다. 심의원은 나를 직접 찾아와 은근히 자기를 내세웠다. 나를 교도소에서 빼내려고 무척 애를 썼으며 내가 최전방으로 빠지려는 것을 자기가 힘을 써서 방위로 빼돌렸다고 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
그해 4월 11일자로 방위영장이 나왔다. 신상명세서에는 '광주사태'라고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방위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날부터 빨간 줄은 나를 따라 다녔다. 훈련조교에게 시범케이스가 되어 맞는 것이 일이었다. 영창생활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4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상무대 보병학교로 배치되었다. 여기서도 현역군인들의 밥이 되었다. 군인들은 '광주사태 때문에 죽을 뻔했다'며 분풀이를 했다. 불행히도 나는 현역군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우리 집이 망월동이라 상무대까지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이 무리였다. 그래서 상무대 취사장에서 현역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방을 쓰다보니 군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합과 구타를 서슴치 않았다.
그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못한 나는 상무대를 나와버렸다. 집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상무대를 영원히 벗어나고자 마음먹었다. 일단 그 지긋지긋한 군대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탈영병'이라는 것은 크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군대에 들어가지 않고 쭈욱 집에서 지냈다.
상무대에 들어가지 않은 10여 일 후에야 상무대에서 전화가 왔다.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빨리 복귀하라고 했다. 그동안 서무과에서는 '결근'으로 처리하다가 일주일이 넘어서자 탈영보고가 됐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서무과 상병이 직접 찾아왔다. 지금 당장 군에 들어가자고 사정했다. 부당한 폭력행사로 발생한 탈영이란 것이 드러나면 현역군인들도 위험한 상황에 몰리게 되므로 나에게 직접 사정을 한 것이다.
서무과 상병을 따라 상무대를 갔는데, 그날이 토요일이라 중대장이 일찍 퇴근해 버렸다. 그래서 복귀했다는 보고도 못 하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헌병대에서 나를 잡으러 왔다. 헌병 2명에게 붙들려 다시 상무대로 갔다. 조서를 쓰는 것으로 사건은 조용히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월요일부터 다시 방위생활을 시작하여 1982년 7월경에 제대했다.
농사꾼을 천직으로
제대 후에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다가 1983년에 결혼했다. 결혼을 하게되니 농사를 짓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직장을 찾아나섰다. 1980년 5·18 이전에 다녔던 현대공업에 다시 가보았다. 이곳에서 용접공으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빨간줄이 나를 가로막았다.
취직길이 막히자 중동지역 등 외국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이것도 안 되었다. 하는 수없이 농사를 지어야 했다. 아무리 고생해도 그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농촌에서 벗어나볼까 했는데 그놈의 빨간줄 때문에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농사를 짓다보니 이제는 땅에 애착이 간다. 또한 농촌의 잘못된 정책도 하나하나 눈에 띈다. 재작년에 정부에서 농가부채 탕감을 목적으로 저이율로 해서 돈을 융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형식적인 것임을 알았다. 조합에서 빌려줄 때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융자해 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이 빌려주고 적은 사람은 적게 빌려주는 식이었다. 그때 나도 부채가 7백만 원이어서 요청을 했더니 고작 70만 원만 융자해 줬을 뿐이다.
또한 농촌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하지 않는 탓으로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격차를 줄여보고자 나는 '기계화 영농단'을 만들려고 했다. 나의 뜻에 동조한 마을 어른들도 일을 추진해 보라고 했다. 더군다나 나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허리가 아파서 한 시간 이상 서 있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사무소에서는 내가 추진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일을 가로막았다. 갈수록 늘어만 가는 부채에 찌들리는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는 현실이고 보면 분명 농부가 가장 천대받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 또한 병을 치료하느라 그 많던 땅을 거의 팔고 우리 집에 남은 논 14마지기 중 내 몫의 논 7마지기와 밭 3백 평이 재산의 전부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백만 원의 빚이 혹으로 달려 있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땅을 지키며 살 생각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1980년 5월과 교도소 생활을 거쳐 현재 만지는 흙속에서 비 로소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사.정리 김정기,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