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차 영암산(鈴岩山)-782m
◈산행일:2005년12월18일 ◈날씨:오전-맑음/오후-흐림
◈위치: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월명리 월명성모의집
◈참가인원:34명 ◈산행소요시간:4시간30분(09:45~14:15)
◈교통(태양고속관광조선용기사):마산(07:15)-칠원요금소(07:30)-현풍휴게소(08:03-32)-서대구요금소(08:54)-왜관요금소(09:05)-월명성모의집 하차(09:40)
◈산행구간:월명성모의집→영암산상봉→주봉→잘록이→선석산→선석사→태실-주차장
◈산행안내 : 전체(김기수) 선두(전임수), 중간(신종섭), 후미(박윤식)
◈특기사항 :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1리 소재 성재사우나(☎054-973-5800)에서 목욕
◈산행메모 : 왜관요금소를 통과하여 4분쯤 진행하니 신호대사거리를 만나고 4번도로로 좌회전하니 김천,구미, 성주방향이다. 3분 후 33번도로에 진입하여 고령,성주방향으로 진행한다. 905번도로를 만나 초전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왼쪽 멀리 허옇게 눈을 이고 있는 가야산이 불룩하고 오른쪽으로 낮아진 능선이 파도를 만들며 길게 이어진다. 길 양쪽에 비닐하우스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성주군 초전면의 이 비닐하우스단지는 기네스북에도 올려졌다는 최점열회원의 이야기에 모두들 귀가 모아진다. 이 단지에서 생산되는 작물은 참외가 95%, 나머지는 수박인데 이곳 참외가 전국에서 생산되는 참외의 60%를 차지한단다. 길가에서 또는 과일상점에서 흔히 보는 성주참외의 본고장이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바로 여기다. 초전면소재지의 백천 사거리신호대에서 905도로를 만나 우회전한다. 상판이 없는 교각 아래를 통과한다. 상판이 올려지면 중부내륙고속국도가 되어 앞으로는 여기를 찾을 때 왜관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고개에 올라서니 성주군이 끝나며 김천시에 들어선다는 이정표다. 몇 십 미터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월명성모의집이다. 부산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7도가 되겠다는 기상예보에 방한준비를 단단히 했다. 차에서 내리니 역시 칼바람이다.
오른쪽 건물의 앞마당으로 진행하니 현판에는 월명성모의집(노인전문병원,노인전문요양원)이다. 오른쪽 산으로 들어가니 치솟는 길이 열린다. 숨차게 치고 오르니 성모의집이 뒤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산행시작 15분 후 능선에 올라 왼쪽으로 올라간다. 여기서도 가파른 오름은 이어진다. 왼쪽 건너에 금오산이 우뚝하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이 쌓인 길을 올라간다. 생각보다 포근한 날씨다. 잠시 밋밋한 길을 맛보고 다시 치고 올라가니 금오산에서 뻗어내려 온 능선에 올라선다(10:30). 차가운 바람인데 매서운 맛은 없다. 오른쪽으로 밋밋하게 진행한다. 내려가서 다시 솟구친다. 계단봉에 올라서니 정면 오른쪽 위에서 영암산 정상인 암봉 3개가 다가온다.
돌부리가 뾰족뾰족 드러난 오름길을 숨차게 8분간 오르니 봉이다(11:00). 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암봉들은 앞에서 눈높이로 낮아졌다. 바위사이로 내려가서 암봉을 올라간다. 다시 네발을 이용하여 내려가서 오른다. 또 내려가서 올라가니 영암산782m표지석이다(11:13-18).
정면으로 선석산이 독립하여 눈높이로 솟았다. 정면에서 오른쪽으로는 넓게 자리한 비닐하우스가 햇빛에 반짝인다. 그 끝에 가야산이 불룩 솟았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덕유산, 민주지산, 황악산, 금오산으로 솟구치며 막힘없이 펼쳐진다. 구미시가지와 고속철도, 고속도로, 낙동강도 시원하게 조망된다.
정상에서도 카메라가 작동될 정도니 강한 추위가 아니다. 진행방향으로 내려가니 밧줄이 걸려있는 암벽이 막는다. 뒤로 돌아 줄을 다리 사이에 넣고 줄을 당기며 아래에서 일러주는 대로 발을 디디면서 조심조심 내려간다. 중간에서 왼쪽으로 꺾이기까지 하는 바위틈 길이라 바짝 긴장한다. 한사람씩 통과하자니 정체가 된다. 몇 걸음 내려가니 또 밧줄이다. 뒤로 돌아 다리사이에 줄을 넣고 당기며 뒷걸음으로 내려가니 암반사면이라 조금 전보다 쉽게 내려간다. 잘록이에 내려서니 이정표다(11:40).
진행방향으로 서진산(선석산)정상2.2, 뒤로 영암산정상0.6, 왼쪽으로 보손지2.2㎞다. 다가오는 능선을 왼쪽에 끼고 밋밋하게 돌아간다. 길은 다시 능선과 만나고 10분 사이에 이정표를 또 만난다(서진산1.7㎞). 눈이 제법 두껍게 쌓였다.
멀리서 보기에는 나무에 가려 적은 눈으로 보였는데 나무 밑에서는 수북하다. 계단봉을 몇 번 만나며 봉에 올라서니 헷갈리는 표지석이다(12:27-50).
<樓鎭山, 해발742.4m, 약목청솔산악회, 1997. 3.30 立石> 누진산 글자 옆에 낙서처럼 선석산 글자도 씌어있다. 몇 회원은 여기서 식사중이다. 뒤로 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영암산이 저만치서 우뚝하다. 여기서 보는 영암산은 상층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따뜻한 곳을 찾아 1분쯤 내려가니 앞서간 일행들이 식사중이다. 앉을 자리를 고르니 낙엽과 눈이 비빔밥처럼 반반으로 섞여있다. 겨울에 보온도시락이 좋기는 한데 식사 후에도 배낭의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 게 단점이다.
식사 후 10분쯤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위에 내려서니 정면 아래로 선석사가 자리잡았다. 그 앞으로 태실이 있다는 울창한 숲으로 덮인 태봉이 고분처럼 볼록하다.
솔숲을 몇 걸음 진행하니 갈림길을 만난다. 지도상의 군계삼거리다. 나중에 들었는데 여기서 비룡산으로 잘못 진행하여 택시를 타고 날머리를 찾아온 회원도 있었다. 오른쪽으로 진행하니 소나무 숲은 이어지고 바윗돌이 하나둘 나타난다. 15분 가까이 가파르게 내려간다. 오른쪽 능선너머 우뚝하던 영암산이 능선 뒤로 몸을 숨긴다. 따라가던 능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쏟아진다(13:25). 5분 후 밋밋해지고 묵은 밭으로 보이는 덤불 평지다. 5분간 진행하니 왼쪽에 기와건물 선석사다.
선석사대웅전 안내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원년(692) 의상대사가 지금의 절 서편에 신광사를 창건하였으나 고려 공민왕10년(1361)에 나옹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위하여 절터를 닦다가 바위가 나왔다고 하여 禪자를 넣어 禪石寺 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절이 전소되고 조선숙종10년(1681)에 은현, 혜묵, 나헌 등 대사들이 중창하였으며 영조원년(1725) 서편의 옛터로 옮겼다가 순조4년(1801) 동파 서윤대사가 현재의 대웅전, 명부전, 정법료, 칠성각, 산왕각 등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맛배지붕 겹처마다포집이다. 또한 이 절은 앞쪽200m지점에 위치한 세종대왕왕자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정문 넓은 길로 가다가 오른쪽 좁은길로 진입하여 왼쪽으로 돌아가니 마을입구 주차장이다.
태봉 입구 왼편에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 안내판이다.
<이 태실은 조선 세종대왕 아들의 태실18기와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석물 1기가 안장된 곳이다. 태실은 높이 140㎝의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 항아리와 태 주인공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식을 세웠다. 처음에는 20여기의 태실을 두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과 무고로 연좌된 화의군,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세조3년(1457)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7년 흩어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태항아리, 지석 등의 유물의 일부는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및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태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계단길을 따라서 태봉으로 올라간다. 태실 입구에 이르니 오른쪽에 또 성주세종대왕자태실 안내판이다. 아랫부분에는 태실 배치 그림도 있다.
<선석산 아래 태봉에 자리한 이 태실은 조선조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원래 이 산봉우리에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李長庚의 묘와 묘각이 있었으나 조선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곳에 안장하기 위해 지관을 통해 吉地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20-24년(1438-1442) 왕자들의 태를 안장한 곳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실지이며 1977년 보수 시 출토된 분청인화문대접 등 7점이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이장경의 묘를 옮긴 것은 그의 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산(태봉) 위의 나무를 베고 12개의 관으로 깊이 묻어 묘를 쓰면 더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후일 소유가 바뀌지 않을까 두렵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 산 위의 나무를 베니 나무에서 큰 벌이 나와 노승은 쏘여죽고 후손들이 11개의 관으로 묘를 쓰고 그 후 묘각을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태실은 두 줄로 배치되었는데 세손인 단종은 왼쪽에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8기, 그 앞줄에 10기가 배치되었다.
되돌아 내려와 주차장에서 산행이 끝난다(14:10).
☆승차이동(14:18)-산행들머리(14:35)-④번도로에서 우회전(14:37)-목욕(14:58-16:47)-왜관요금소(16:57)-서대구요금소(17:10)-현풍휴게소(17:30-49)-영산요금소(18:13-19)-칠원요금소(18:32)-마산도착(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