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시대로 회귀하는 역사교과서 개편
스탈린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압권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화 강변
러시아에서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미하일 자도르노프(Mikhail Zadornov)는 러시아를 ‘역사를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국가’라고 부른 적 있다. 물론 대중들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농담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어느새 러시아를 규정하는 문구가 되어 버렸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근대 역사를 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역사의 해석과 흐름 자체가 다르게 분석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917년에는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길을 걷겠다는 정권이 “모든 것을 기반까지 싹 다 없애고 새로운 역사를 쓰자”고 해서 그때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전부 다 부정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기 위한 역사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서 학교에서 의무적인 역사 수업을 강제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부모님 세대가 배운 것은 타락한 서방 자본주의가 곧 사라질 것이고 오로지 공산주의가 인류의 답이라는 주장이었다.
1991년에는 그 소련이 무너졌다. 1990년대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역사 수업에서 배운 것을 부모님에게 알려 줄 때마다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던 게 기억난다. 소련의 위대함과 완벽함만을 배운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갑자기 자기 자녀들에게 스탈린의 대숙청정책이나 독소 불가침조약을 가르치는 게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교과서가 다양했고 어느 교과서를 쓸지를 각각의 학교 교장이 알아서 결정할 권리가 있었던 시절이다. 러시아 교육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국내에는 40개의 출판사에서 나오는 65개의 역사교과서가 있었다고 한다.
소련 시대로 돌아가고픈 푸틴의 역사관
2000년에 치러진 대선에서는 푸틴이 당선되면서부터 상황이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보기관 출신인 푸틴 대통령의 역사관은 소련 세대의 역사관 그 자체였다. 집권 기간이 길어지면서 발언 수위와 말투도 크게 변했다. 푸틴에게 중요한 부분은 항상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이고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다. 그 당시에 사용한 역사교과서에서는 전자가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후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참전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는 식이었다. 이런 해석은 푸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2010년대 중반에 통일된 역사교과서 만들기 시도를 개시했다.
2013년 2월 푸틴 대통령은 국회 연설을 통해 젊은이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줘야 하고, 애국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역사 관점으로 통일해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 역사를 왜곡한다면서 이에 맞서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국은 바로 교과서 개편작업에 착수했으나 시민 사회가 거세게 반발했다. 그 당시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역사 전문가나 야권 대표 인사, 시민사회 활동가의 힘이 상대적으로 컸다. 결국 1년 반 뒤인 2014년 8월 출판에 따르는 재정 부담과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변명과 함께 교과서 발행 계획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계획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내 언론과 여론을 탄압하는 수준이 몇 배로 강화되었다. 반정부 언론사들이 전면 폐지되었고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감옥행이나 강제이민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를 악마화하는 정책은 다소 진보적인 성격을 띤 역사교과서의 20세기 역사 해석과 모순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정부는 2013년에 시작했다가 일시 보류했던 작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현재의 정치세력은 바로 정리할 수 있었으나 미래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내 여론과 다음 세대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책 중 하나가 바로 고등학교의 국정 역사교과서 개편이었다.
독재자 혹은 전쟁 위협 앞에 흔들리는 역사교과서
2023년 8월에 메딘스키 러시아 전 문화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TV에서 폭포처럼 흘러 나오는 선동의 클리셰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서방의 ‘캔슬 컬처’(생각이 다르면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 SNS 문화)에 맞서서 우리 역사를 우리가 올바르게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교과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묘사하는 데 60% 이상의 내용을 ‘고쳤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우기도 했다. 이제는 ‘다양성의 혼란기를 극복하며 정부의 방침에 따라 통일된 비전이 실린 올바른 역사관’을 통해 애국자를 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련 시절을 미화하거나 소련의 만행을 은폐하는 행위도 그렇지만 대중들의 관심은 역시 교과서의 마지막 장에 쏠렸다. 소위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장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도 아니고 별개의 독립민족도 아니라는, 아무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푸틴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나치와의 전쟁, 러시아의 전통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강변했다. 논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침공 정당화 주장이 차고도 넘쳤다. 마지막 장의 앞부분에는 대통령실 대변인인 페스코프의 말을 인용했다. “러시아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전쟁을 시작한 적은 역사에서 한 건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 러시아는 항상 모든 전쟁을 끝내기만 해 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것은 윈스턴 처칠의 명언이다. 현대 러시아를 보면서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머나먼 나라의 일이라고 외면할 수 있을까? 2015년 한국에서도 국정 교과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무산된 바 있다. 러시아의 악례를 보면서, 한국에서도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역사를 똑바로 연구하고 배우는 것은 역사의 위대한 선행과 영웅을 기리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앞으로의 악행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