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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資 料 室 스크랩 대한민국국군 2개대대 월북사건 강태무(姜泰武),표무원(表武源) &남로당원 박정희에 관한 단상``
박산 추천 0 조회 891 14.06.28 07: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운영자 파천황 공지입니다..

이 곳은 진주강문 현종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장입니다.

 

대한민국국군 2개대대 월북사건 및 남로당원 박정희에 관한 단상''

 

<이 사건은 그 시절 엄청난 충격이었다>

 

*국군 제1여단 제8연대 
제1대 대장 표무원소령(1차)과 제2대 대장 강태무소령(2차)의 월북사건

 

평양 대남반 1기 졸업생들이었던 이들은 대한민국내의 대대적인 남로당원 색출작업을 통해 빨갱이들이 다 잡혀들어가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북한군과 사전에 내통,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1천 1백 여 명의 부하 대원을 강제로 인솔하여 월북한 전무후무한 군부대의 월북사건.

 


*제1대 대장 표무원(表武源)소령

1949년 5월 춘천주둔 제1여단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29세)소령은

북한군과 미리 내통하여
그 지령 하에 1949년 5월 4일 1시에 야간훈련이라는 명목으로

5백 8명의 대대병력을 인솔하고,
 

춘천 서북방 약20km 지점인 말고개 산맥이라는 38도선 접경지점에 이르렀을 때,

대기 중이던 북한군에 의하여 포위된다.

표무원은 부하 장병들에게 “희생되지 말라”고 말하면서, 적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제2중대장 최동섭 중위는 대대장의 말에 반대하여 귀대하자고 버티었지.
그러나, 잠시 후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면서 교전이 벌어진 끝에

약간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으나,

제2중대는 그 틈을 타서 제3, 제4중대와 함께 포위망을 벗어나 귀대하였으며,
특히 중화기중대인 제4중대는 박격포, 기관총 등 모든 중화기를 가지고 복귀했다.


그 중, 제1중대장 김관식 중위만이 표소령과 행동을 같이하여

이북지역인 화천으로 넘어갔다.
대대병력 중 2백 15명은 표 소령의 투항계획에 의한 간계와 북한군의 포위로 말미암아

귀대하지 못하였으며,
나머지 북한으로 가지않은 장교2명과 병사  2백91명은

M1소총 2백28정, 칼빈소총 44정, 자동소총14정, 68mm 및 46mm기관포와 경기관총 등

4정을 가지고 다행이 복귀한다.

 

월북 후 1954년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1955년 군사대학에 복무했다.
1961년 군인민위 부위원장으로 좌천됐다가

1977년 5월 평안북도 행정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1996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를 평양으로 송환하면서 조선인민군 중장의 군사칭호와 고급승용차, 고급살림집을 하사했다.
표무원은 1996년 평양시 서성구역 서천동에 있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일했다.

 

 

*제2대대장 강태무(姜泰武) 28세준장(1924년 ~ 2007년 6월 17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 1949년 5월 4일 육군 제8연대 대장(소령)

 

역시, 강태무소령 또한 북한군과 미리 내통하여 그 지령 하에

5백여 명의 부하대원을 인솔하고 월북.

 

1949년 5월 3일과 4일에 걸쳐 38도선 참호 구축공사를 하던 중,

5일 01:00시에 38도선 이남 12km지점인 현리(오대산 기슭)
주둔 부대원 약 1백 명을 합쳐 총 6백여 명을 인솔하고,

38도선 경비보강을 이유로 이 날 17:00 하답(38도선 접경)에 이르러
북한군의 내습이 빈번한 개봉에 있는 북한군 보안대를 공격한다고 대원들을 속여

38도선을 월경했다.


이들은 북한지역인 남방 6km 지점에서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고,
교전이 시작된 지 약 1시간 후에 강태무소령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자.”고 명령을 내렸으나,
제5, 제7, 제8중대는 이에 불복하고 과감하게 대항했지.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제5중대는 거의 전멸상태에 빠지고,

제7중대의 일부는 중과부적으로 투항함.

 

이 전투에서 장교 1명과 사병 1백56명은 격전 끝에 전사하고,
북한으로 가지 않은  장교 2명과 사병 1백 36명은 M1소총81정, 칼빈소총 6정, 경기관총2정, 기타 기관포,로케트포 등 4문을 가지고 복귀함.

 

 

이후
표무원소령은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 임원진으로 침투하여 국군 후방을 교란시키고 여러 빨갱이 짓을 하다가 2006년 81세로 사망하고,


강태무소령은 월북 후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28세로 소장으로 승진하여 좋은 대우와 여러가지 상을 받았다.  

1977년 양강도 행정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96년부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하였다.

김일성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2007년 4월 15일에 82살로 사망.

 

 

<80세 생일상을 김정일에게...>

 

*김정일의 애도...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조선인민군 중장 강태무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해"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18일 보도함으로써 강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월북 후 그는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28세의 나이에 북한군소장(우리의 준장)으로 전격 승진했으며

군단급에서 부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국군 출신'이라는 성분이 문제가 돼 군복을 벗었던 강씨는

1977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량강도 행정경제위원회(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됐으며,

1990년 4월~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 겸 서기국장을 지내고,
96년부터 군에 복귀해 중장(우리의 소장)계급을 달고

사망 전까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6.25전쟁관) 강사와
1996년~7년 9기~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강씨의 월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그에게 고급주택과 고급승용차를 선물했고,
그의 자녀 전부를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의학대학 등에 입학시켰을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대학기간에 노동당에 입당시키는 등 각별히 배려했다.


강씨의 75세 및 80세 생일에는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강씨는 '김일성 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이런 인물들 땜에 너도나도 월북할려는 거盧? 똑같이 될까봐? !!!>

 


*월북했던 대대장 강태무는 부대에 역사적 인물 있었음(정승화예비역대장)

육군참모총장이 됐다가 1979년 신군부 세력이 주도했던 12·12사태를 당해 옷을 벗었던 정승화 예비역대장도 강태무부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운이 좋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던 병력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그는 대대장을 따라나서면서 “나도 훈련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그를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강태무 소령이 “너는 부대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태무대장은 왜 정승화를 남겨놨을꼬?

여하튼 정승화는 안따라간 게 아니라 못따라 갔었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


강태무와 표무원은 경남고성의 고향 친구사이였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평양시 서성구역 서천동

 

이외 해군 함정의 월북사건과 최덕신월북사건도 있었다.

 

최덕신(崔德新, 1914년 9월 17일 ~ 1989년 11월 16일)

-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

- 중앙군에서 근무

- 1946년 귀국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3기특별반을 졸업

- 1949년 미국 포트 릴리(Fort Riley) 육군종합학교를 졸업(초등군사반)

- 1950년 미국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를 졸업(고등군사반)

- 국군 제1군단장

- 육군중장으로 예편

- 5.16 직후 외무부 장관, 주 서독 대사, 통일원 고문, 주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1972년) 등을 역임

- 미국으로 망명.

-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월북

- 북한에서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

 

 그 외 월북사건들....

 

 

 

 

 

보수언론 디시인사이드는 기회주의자 김구의머슴?

 

기타 보수언론 디시인사이드의 월북강태무,표무원소령관련 김구와 애써 연계시키고 있다.

내용을 보고 보수언론의 거짓됨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기회주의자 김구따위를 찬양하는게 보수정신이냐?!
대한민국의 보수언론이란 디시인사이드는 진실된 역사만으로 상무정신을 꽤하라..
또 다른 실망보수가 나오지 않도록....

보수 진보라 짖어대는 자들은 저희끼리 쓰레기들이라 하는데 필자가 보기엔 다 똑같다!!!

 

여기서 남로당에 대해서 일침하고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남로당출신 기회주의자 박정희

박정희의 형이 박상희다.
박상희는 남로당빨갱이의 거목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원이란 거 알고 있었盧?

 

<대구폭동>

경찰은 피의자를 마구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양곡 수집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부당하고 거칠었으며 정직하지도 않았다.(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대구에서는 10월 1일, 파업 중이던 40여 공장 노동자들이 허가를 받고 집회를 하였다.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여 시위대 숫자는 점점 늘어 3-4천여 명으로 불었다. 그들은 “쌀을 달라”고 외쳤다. 시간이 흘러 시위대가 조금 축소된 즈음에 경찰이 발포를 하였다.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은 그 시체가 행려병자의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다음날 대구의전 학생 수십 명은 연탄공장 노동자 황팔용(20세 전후)의 시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당시 일간신문 보도에 의하면, 10월 1일-3일 사이의 충돌을 통해 경찰 33명 사망, 중경상 135명, 경찰가족 1명 사망, 부상 33명, 시위대 17명 사망, 부상 25명, 검거 636명이 발생하였고, 영천군수가 그 와중에서 피살되기도 했다. 

10월 2일 오후 5시 이후 대구 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0월 3일에 발표된 포고령 제3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은 그들의 집이나 그 주변에 있을 것. (2) 어느 누구든 대구시에 들어오거나 대구를 떠날 수 없으며, 도로 봉쇄 조치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는 무장 군인이 체포할 것.’ 

 

1946년 10월 1일 소요가 시작된 대구에는 2일 바로 계엄령이 선포된다.

그러나 6일 이후 대구는 무법천지가 된다.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왜관 경찰서장과 경관 2명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 살해하였다.

 

물론 당시의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지금도 거의 불가능하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엄청난 보복 살해와 우익의 즉결재판과 암매장은 증거조차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사람 중 전쟁 중에 마구 학살된 숫자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1946년과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마구잡이 학살에 대해서는 신복룡의 <한국분단사연구>에 나오는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 전선이 위험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들은 형무소나 경찰서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끌어내어 죄가 있든 없든, 경범이든 중범이든, 기결수이 미결수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특히 대구와 왜관에서 헌병들은 200-300명씩 줄을 세우고 사살했으며,

그 중에는 12-13세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총이 부실하여 단발에 사살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시 확인사살을 했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 인용과,

경상북도의회가 펴낸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 나오는

‘이 당시에 대구형무소에서 군에 이첩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402명이었다’는 조사보고를 참조할 만하다. 

당시 박헌영은 대구 사태를 통해 자파의 세력을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익만 강화되었고, 남로당은 대구사태를 계기로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현실적으로도 박헌영의 판단은 우매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대구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대구 사태는 대구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70~80개 시(군)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예를 한 곳만 들어보면, 선산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접수하여 간판을 파괴하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 이하 20여 명을 구속하고 인민재판을 실시하던 중 군부대와의 교전 끝에 경찰청사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2천명 군중을 이끌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구미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던 박상희는 결국 경찰의 반격을 받아 논바닥에서 사살되었다. 

 

 


남로당이 주도해서 일어난 대구폭동 때 박상희 죽음

이 걸 계기로 남로당당원들은 형을 죽인 대한민국에 대한 분노를 이용해서

동생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킴

 

대한민국의 남로당원 색출작업시 색출되어 잡혀가다가 남로당 리스트 다 까발리고 풀려남..

이 때 남로당원들 다 죽임...

훗 날 박정희는 자기가 남로당원 출신이라는 족쇄때문에 철저히 반공제스체를
취하며 미국과 일본에게 굽신거렸다.  

 

당시 순군작업의 책임자가 백선엽이었는데..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라며
구명원동을 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살려준다.(백선엽이 아니었으면
박정희 이 때 죽었다.. 박근혜까지 이어지는 은원....)

 

 

*북한의 김일성 3대 독재세습파와 남한의 박정희 맹목파들...


여하튼 박정희는 남로당출신으로 쿠테타로 대통령 됨,

일본가서 머리조아리고 새마을운동 배워 와 자기걸로 만들고, 딸 박근혜까지 대통령 됨.
대단한 대한민국~

 

북한이나 남한이나 머슴주의 사상가진 자들은 왜 이다지도 많을꼬!

                       "한반도란 진정 독재에서는 벗어날 수조차 없는 무지몽매한 노예근성의 땅인가?!
                       노예와 같은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요원할 것임은 자명하다"
                        남과 북 백성들의 공통점 "맹목적노예근성"

잘난 척 하지마라!! 이 노예근성들아!!

 

by unprecedent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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