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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4, 고전 10:1-2 세례와 말씀
2 주 전 성례식을 통해 3명이 세례를 받고 4명의 유아들이 부모 품에 안겨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때 보다 뜻이 있었던 것은 세례를 받기까지 아내들의 기도와 인내가 있었고 성도들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가정에 입양되어 세례를 받게 된 아이가 두 명씩이나 있었기에 더 뜻이 있었습니다.
세례자들에게는 세례 문답서를 주고 공부케 한 후 문답을 통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문답서로는 세례의 참된 의미가 전달되기에 역부족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에 대해 설교하며 신앙의 유익과 성장에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세례는 교인이 되는 외적 형식만을 위한 통과 절차가 아닙니다.
바울은 롬6장에서 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영적 예식임을 밝힙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생명을 얻은 삶이 세례의 본질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전 10장 1-2절을 통하여, 홍해 바다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입니다.
마음이 돌변한 이집트의 바로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전차부대가 쫒아 옵니다.
독 안에 든 쥐, 이스라엘 백성은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든지, 이집트 전차 부대의 창칼과 말발굽에 무참히 죽든지 선택의 여지없이 죽음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를 갈라 주심으로 이스라엘 앞에 피할 길을 내셨습니다.
바다 속으로 난 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홍해바다를 건너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뒤 홍해가 원래대로 다시 합쳐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는 이집트로 되돌아갈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 이미 죽었고, 기적적으로 건넌 후 그들의 삶은 예전의 그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 삶은 광야를 통해 가나안 땅까지 말씀을 좇아 가야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제는 무조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세례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던 인생들이었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 죽음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지옥 가는 영원한 죽음이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영원한 죽음에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뒤에서는 병과 사고로 무장한 죽음의 전차 부대가 쫒고 앞에는 세월이란 죽음의 바다가 우리를 집어 삼키려 했습니다.
피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암담하고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바다를 갈라버리시고 그곳에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은 주님의 살쩍이 찢기고 보혈 흘려주신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로 여신 생명의 길을 통해 죽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 되었음에 있습니다.
이제는 옛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진리의 길을 가는 것 뿐입니다.
비록 광야길이지만 순종하면 거기에 오하시스가 있고, 만나가 내립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보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홍해바다가 다시 합쳐져 이집트로 되돌아갈 지리적 길은 없어졌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이집트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도외시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진리의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자기 욕망에 집착했던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 홍해세례’라는 엄청난 은총을 얻고서도 단지 그것을 외적 자랑으로 삼았을 뿐,
말씀의 적용과 바른 선택을 위한 영적 세례가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두어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긴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접했을 지라도 삶을 통해 그 말씀이 표출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새겨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삶에 대하여 말씀의 적용이요, 말씀에 의한 바른 선택을 의미합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끊임없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인간인가, 진정한 신앙인가 아닌가가 분별됩니다.
바른 선택은 언제나 말씀의 적용으로만 가능합니다. 말씀의 적용이 배제될 때 인간의 선택이란 언제나, 자신의 추한 감정과 이기심 그리고 욕망의 굴레를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중대형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주일 날 예배가 다 끝난 후 귀가 중에 한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때 교차로 가장 자리에 차 두 대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서 멋진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말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리칼을 움켜잡고 완력으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목사님은 두 대의 차 모두 뒤 창문에 성경책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서서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를 예배를 드린 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두 여인이, 사소한 운전 시비 끝에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참을 싸우다가 앞차의 여인이 갑자기 손을 내리고 자기 자동차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뒤 창문에 놓여 있던 성경책을 집어 들더니 재차 뒤차의 여인에게 다가섭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 그렇면 그렇지 엉겁결에 싸우기는 했지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화해하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때 뒤차의 여인은 앞차의 여인이 갑자기 돌아섰기 때문에 싸움을 끝난 것으로 간주하고 막 자동차를 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되돌아온 앞차의 여인이 손에 든 성경책으로 뒤차 여인의 뒤통수를 후려 쳤습니다.
기습을 당한 뒤차 여인은 휘청했고, 그 바람에 성경책은 땅 바닦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을 성경으로 후려친 앞차의 여인은 그 즉시, 땅에 떨어진 성경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차로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봉변을 당한 뒤차 여인이 성경책을 주워들고 달려가, 자동차를 타려는 앞차 여인의 뒤통수를 내려쳤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지켜 볼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끝내 경찰이 출동했을 상황을 짐작하면 목사님이 그들 싸움의 증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여인은 그날 낮 교회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받았든 그 말씀의 적용은 없었습니다.
그들 마음 안에 말씀은 가두어 두었을지 몰라도 새겨진 말씀은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다가 얼마든지 사소한 시비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그 때 서로 치고 받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말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싸우다가 종내 화해할 수도 있고, 더 큰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말씀에서 요구하는 양보하고 용서하는 것을 선택해야 함이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날 두 여인은 그 도로에서 가장 부끄러운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의 표정이 어떠 했을까요? 그들이 교회에서 썼던 용어는 어땠을까요 ?
틀림없이 온화한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절제되고 공손한 말을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밖에서 사소한 운전 시비가 일어나자 그들은 교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교회에서 배운 말씀의 적용이 삶 속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른 선택을 수반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 안팎의 삶의 괴리만 멀어질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적용을 통해 나타나야 할 새 생명의 축복이 없음도 분명합니다.
80년 대 이후 제자 훈련이 기폭제가 되어 교회들마다 성경 공부 붐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만 배운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고 말씀에 따라 바른 선택을 행하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성경 공부의 동기가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지식을 얻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지식은 믿음의 전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 지식과 믿음을 혼동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지식이 믿음으로 착각 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교회에 그럭저럭 오래 다닌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 성령의 감동을 받은 부인이 남편에게 말합니다. “ 여보 이제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기도를 해야겠어요 .
새벽기도도 안하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그러니 우리 함께 새벽기도 합시다. “ 그러자 남편이 기겁하며 말합니다.
“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가 얼마나 피곤하고 바쁜데!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고! 그런데 새벽예배를 가?
그런 거는 광신자들이나 별난 사람들만 하는 거야. 우리처럼 바쁜 사람은 그렇게 안해도 다 천당간다고 성경에 쓰여있어.“
얼마 뒤 더 큰 은혜를 받은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 여보 이제부터는 십일조를 해야 겠어요!”
그러자 남편이 벌컥 화를 냅니다. “ 아니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거기서 10분의 1을 바쳐, 그렇게 안해도 천당간단말이야!
십일조는 믿음 좋은 사람만 하는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안해도 된다 말이야 .“
이것이 바로 성경 지식을 자신의 믿음으로 착각하는데서 오는 오류입니다. 성경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편한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닌 자기 믿음일 뿐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장보다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가운데서 일하시는 성령의 진한 감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할 수 있고 십일조도 낼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의 운동력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는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세례가 참된 세례 됨은 말씀에 대한 적용에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옛 사람의 죄는 죽고 새 생명 얻었다고 한다면 그 증거는 새로운 삶으로만 나타납니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임을 삶에 적용하는 삶 거기에 참된 세례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8개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8개의 팀으로 운영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넥센 히어로즈가 있습니다. 저는 넥센의 팬은 아니지만 넥센의 선수 한명만큼은 응원하고 있습니다.
넥센이 이기거나 지거나 관심 없지만 그 선수는 꼭 안타나 홈런을 날리기 원합니다.
지금부터 10년 전 쯤에 프로 야구 경기를 시청하다가 해설위원이 그 선수를 소개하는 멘트를 듣고 놀랐습니다.
송지만 선수가 타석에 등장하자 해설위원이 “ 예 4번 타자 송지만 집사가 나왔습니다. ”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공영 방송에서 야구 경기 해설자가 종교 편향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해설자는 ‘송지만 집사’라 말한 이유를 프로야구계에서 집사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하루에 어김없이 1시간 30분은 경건의 훈련에 시간을 쏟고 비시즌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한답니다.
하지만 경기 시즌에는 주일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답니다.
일요일 경기는 오후 2시부터 시작하지만 선수들은 아침 11시까지 운동장에 나가 몸을 풀고 준비를 한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새벽 예배만 나갔는데 송 선수는 현재 구단측의 배려로 예배를 드리고 있답니다.
그는 2009년 자유계약 선수가 되어 돈을 많이 주는 팀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계약 요건은 더 많은 돈을 주는 팀이 아니고 주일 예배 드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일반 선수들 생각으로는 정신 나간 일입니다. 자유 계약 선수가 되면 몇 십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그는 예배와 바꾸었습니다.
그는 스포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는 선수이기 전에 기독교인입니다. ”
그는 현재 15년 째 선수 생활을 하며 300홈런에 3000루타를 기록한 3명의 선수중 하나입니다.
15년 동안 꾸준히 20개 이상 홈런을 친 대 기록입니다. 이것은 프로야구 30년 동안 단 3명만이 이룬 기록입니다.
그리고 현재도 37살의 노장의 나이에도 팀에서 3,4번을 치는 중심에 있을 정도로 실력이 우수한 타자입니다.
그는 15년 동안 운동장에서 크리스천으로, 집사로 살았습니다.
돈으로 몸값이 결정되는 프로야구 판에서 그는 기꺼이 돈을 포기하고 크리스천으로 사는 광야 길을 선택했습니다.
현실적인 이득을 버렸기에 그가 망했나요 ? 그가 뒤쳐졌나요 ? 아닙니다.
그는 실력과 믿음이 검증되며 운동장에서도 존경을 받으며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5년 동안 말씀을 좇아 사는 송 선수에게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약속하신 데로 만나와 오하시스로 먹이셨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의 건강과 체력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 나를 존중하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2:30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말씀을 도외시하는 삶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요 결과는 그도 하나님께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자에게 그 말씀은 반드시 만나와 오하시스가 됩니다.
틀림없이 매 순간 마다 말씀을 바르게 선택하는 자를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키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결국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집니다.
일터와 삶에서 누구 아빠로, 누구 엄마로, 누구 누구 씨로, 김 과장, 혹은 이 대리로 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권사와 집사로 권찰로 사는 일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 특별히 교회의 직분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말씀을 좇아가겠다는 결단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좇아 살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만나와 오하시스로 먹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험한 세상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을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새 생명 얻은 성도 여러분, 말씀의 적용과 바른 선택만이 영적 세례의 축복임을 잊지 맙시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는 곳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틀림없이 새 생명의 축복 또한 넓어질 것입니다.
진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그곳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가시화되고 현상화 될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통해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삶에 깊이 새기며 사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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