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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China Town)
시야에 들어옵니다. 우뚝 솟은 패루를 지나 계속 경사진 길을 3백여 미터를 걸으면
T자형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뉘고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듯이 느껴집니다.
붉은 색 간판과 홍등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진열된 상품들도 거의가 중국 일색입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이것들의
과거를 뒤집어 보면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이곳에서 화교
사회의 명맥을 이어 오신 분들이 바로 그 지역에 사는 화교들입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는 근본적으로 형성 구조가 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포함하여 중국인 거리가 형성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한분들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인천 화교는 약 130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습니다.
그
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
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지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세워졌습니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기에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
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습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증가하면서 당시의 청나라 관청(청국 영사관)이 이곳에 설립되고, 이를 청관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국을 비하하는 명칭인 지나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화교의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
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청나라 사람들은 청나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가 생겨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한국으로 오게 됩니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번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 왔습니다.
한편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 종자를 들여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니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이 모두 이들에 의해 전파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상해, 청도, 연태, 석도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하는
인천은 일본인 및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의 숫자도
많아 그들이 조차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좁아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에
모여 살며 상업 활동 외에 채소 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게 됩니다.
외국에 나가 살더라도 조국이 잘 살아야 대우를 받습니다. 1894 년 일본과의 전쟁(청일
전쟁)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손들고,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서방세력에게 안방을
내주고, 타이완,
만주지역도 문서로만 중국령 일뿐 일본이 주인 노릇을 하니,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생활도 그리 안정적 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대국인으로 행세하며 거들대던 세월도 한국 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맙니다. 영흥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인천을 향한 함포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당시 청관 거리는 2층으로 된 중국식 건물이
즐비하게 보이건만 지금 남아있는 곳은 아주 드믐니다.
전쟁 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가꾸어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황금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나갔습니다. 더군다나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도
경영허가를 내주니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천 차이나타운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급부상과 하나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이후 급속도로 위축된 차이나타운은
인천이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또한
21세기 지구촌의 세계화 바람에 힘입어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면서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관광 명소로 부상함에
따라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정부의 지역특화발전특구정책에 따라
인천시와 중구청은 이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정부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집중 투자하여 본격적인 개발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시설 확충, 상권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중국 상가 조성, 자장면 박물관 조성,
야외문화공간 조성, 테마거리 조성(중국풍
조형물 설치 등), 차이나타운 내 주요 거리
통행 제한, 거리 예술제 실시와 중국어 마을 조성, 기반시설 공사 등 끊임없는
유무형의
관광 인프라 개발과 투자로 경제파급 효과 3000억원과 고용유발 효과 2000명, 한·중간
국제교류 증진 등 대내외적으로
큰 성과를 달성하면서 이곳 인천 차이나타운은 과거의
화려했든 영광을 점차 다시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2008년 한해 동안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이 215만명에 달했을 정도로 인기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100년 된 공화춘, 1883년 인천개항과 더불어 조성된 청나라 조계지에는 청나라관원, 상인,
노동자가 넘쳐났고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요식업이 급속도로 발전해나갔습니다.
1905년 22세 청나라 청년 우희광이 청나라조계지의 음식점과 호텔을 겸업하는 "산동회관"을
문을 엽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 2월 청나라 황제 선통제가 폐위되고 '중화민국'이
건립되는데 우희광은 이를 기념하여 산동회관을 공화춘으로 개명하는데, 공화춘은 공화국
원년(1912년)의 봄이라는 뜻입니다.
화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부 정책으로 화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따라 1984년 문을 닫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화춘의 짜장면 맛을
끊임없이 찾게되어 2004년 다시 재오픈을 하게되는데 아쉽게도 원래자리가 아닙니다.
그자리는 "짜장면박물관"이 생겼고 주방장도 수소문하여 어렵게 찾아 모셔왔다고 합니다.
차이나타운에는 삼국지 벽화거리가있습니다. 이그림은 제갈공명이 펼친 "팔진도"를 그린것입니다.
삼국지의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있는 그림들입니다.
그 유명한 七 (일곱 칠) 步 (걸음 보) 詩 (시 시)
일곱 걸음에 지은 시(詩).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식(曹植)이 형인 문제(文帝)의
미움을 받아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詩)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위협(威脅)을
받은 즉시(卽時) 일곱 걸음만에 지어서 죽음을 모면하였다는 시(詩)입니다.
조조(曹操)가 죽고 왕위를 계승한 조비曹丕는
어느 날 구실을 붙여 동생 조식曹植을 치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 조건부로 면죄부를 주겠다고 제시합니다.
그것은 일곱 걸음(七步)을 다 걷기 전에
시 한수를 짓되 제목은 “형제兄弟”로
시 안에 ‘형兄’자와 ‘제弟’를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완성 시에는 살려주고 실패 하면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七步詩 칠보시 (일곱 걸음에 지은 시)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 콩을 삶는데 콩대를 베어 때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 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 대는 가
한 뿌리에서 나와 한 줄기에서 자란 콩이건만
콩대는 불이 되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두 형제의 비참한 현실을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형제兄弟의 갈등을 노래한 조식曹植의 칠보시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형제지간에 경종警鐘을 주는 명시입니다
이렇게하여 동생 조식은 형 문제왕이 일곱 걸음을 걷는동안 유명한 칠보시를 지어
쓸쓸히 �으니 이를 들은 조비가 눈물을 흘리며 동생 조식을 방면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원결의(桃園結義) 그림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결의를 한다는 뜻입니다.
삼국지의 유비,관우, 장비가 복숭아 나무아래에서 형제의 의를 �은데서 유래 되었습니다.
유주(幽州) 탁현(?縣)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劉備)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 숨을
쉬었습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장비(張飛)였고, 그 다음에 관우(關 羽)를 만났습니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 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합니다.
장비의 요청(要請)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義兄弟) 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습니다. 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조조[魏], 손권[吳]과 함께 촉(蜀)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문무와 지략이 뛰어난 관우와 제갈량을 양 옆에 두고 있습니다. ㅎㅎㅎ(까불지 마 !)
여포가 나를 소개합니다. ㅎㅎㅎ
적벽 대전(赤壁大戰 / 赤壁大戦)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입니다. 조조가 이끄는
위나라의 30만 대군과 주유가 이끄는 4만 명의 오나라 수군 사이에 벌어졌던 적벽대전 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힙니다. 당시는 11월로서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었다. 조조 군의 진영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오나라 군은
남쪽이어서 바람은 북서풍을 타고 조조 군의 진영에서 주유 군의 진영으로 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오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명은 전혀 뜻밖에도 주유에게 화공으로
조조군 을 공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조조의 대군을 격파할 방법은 바람과 불을 이용하여
자연의 힘으로 이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전략에 대해 공명은 주유에게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합니다.
“이 제갈량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일찍이 기인을 만나서 비법을 전수 받아 능히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도독께서 동남풍을 쓰시겠거든 남병산 아래에
칠성단을 세우십시오, 제가 그 단 위에 올라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세찬 동남풍이 불게
하여 도독을 도우려고 하는데 의향이 어떠십니까?”
보통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주유는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공명에게 의지합니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남병산에 단을 쌓도록 한다.
공명이 동남풍을 불러오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의 저물어갈 때까지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고 미풍조차 일지 않았습니다.
주유는 초조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밤 12시쯤이 되어갈 무렵 갑자기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유가 급히
밖을 나가보니 정말 바람이 불고 있는데, 깃대가 서북쪽 조조 진영으로 휘어져 깃발이
세차게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과연 동남풍이다.!”
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전략은 결과적으로 보기 좋게 성공하여 무려 30만 명의
조조 군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엄청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이것이 적벽대전입니다.
벽대전에서 제갈 공명이 갑자기 동남풍을 불러일으킨 사건도 그렇다.
공명은 어릴 적부터
"오운육기학"을 공부하여 그것을 기상 변화에 접목시켜 1년 365일의 일기변화를 관찰한
데이터를 수십 년 동안 축적해 두었고, 이 데이터에 의해 매년 11월이 되면 북서풍이
불다가 2~3일 동안만 기류가 변하여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무역풍에 해당하는 이 동남풍을 이용하여 공명은 조조의 대군을 불바다 속에적벽대전에서 제갈 공명이 갑자기 동남풍을 불러일으킨 사건든 공명은 어릴 적부터 "오운육기학"
을 배워 기상 관측에 관해 공부를 했었습니다. 저도 오윤육기학을 배운적이 있는데 그것으로
한의학치료에 응용하였지만 공명은 기후변화로 병법에 응용하였습니다.
기후의 파악하는것이 매년 11월이 되면 북서풍이 불다가 2~3일 동안만 기류가 변하여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제갈공명은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무역풍에 해당하는 이 동남풍을 이용하여 공명은 조조의 대군을 불바다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순풍이 불다가 봄이 돼면 "역풍"이 붑니다.
그 역풍을 "꽃샘바람"이라고 불릅니다. 그때는 피부가 상하게 되어 화장품회사들은 "꽃샘바람"
불때면 꽃샘바람에 대배하는 화장품 출시에 대해 선전과 광고를 합니다.
화타(華佗, 145 ~ 208년)는 중국 후한 말의 의사로, 이름을 부(旉)라고도 하며, 자는
원화(元化)이며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동 시대의 동봉(董奉)과
"상한론"의 저자인 장기(장중경)과 더불어 "건안삼신의"라고 불립니다...그가 관우가
독화살을 맞아 팔에 독이 퍼져있는데 그는 외과수술로 독을 제거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 의원입니다.
차이나타운에서 가까운 곳에 "자유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맥아더 장군의 상이 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미육군 원수. 태평양 전쟁 중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 사령관을
지냈으며,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일본을 통치하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나, 대통령 트루먼과의 불화로 1951년
해임되었습니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연합군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문입니다. 인천상류작전으로 한반도가 탈환이 되었습니다.
종북세력들이 맥아더 장군 동상을 허물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자유에
큰 기여를 하였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 많은 사람이 이름에 장군을 꼭 같이 부릅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 합니다. 그 당시에는 무기 체계가 너무나 빈약하여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맙니다.결국은 낙동강까지 밀려서 한치의 양보도 할수 없는 싸움을
벌입니다. 낙동강 전투가 시작 된지 얼마 안되서 낙동강은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얼룩졌고 맥아더원수는 뭔가 새로운 작전을
짜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입니다. 북한군에게는 거짓으로 함흥과 군산에 상륙한다고
거짓 정보를 유포했고 9월
인천에 상륙합니다. 결국 이런 기습적인 상륙작전에 북한군은
자연히 밀렸고 1951년 1·4후퇴가 있기까지 연전연패 합니다. 이것이 인천 상륙작전의 힘이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승장구하던 맥아더원수는 결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전격 해임됩니다. 중공군이 개입함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자 맥아더원수는 만주진격, 압록강철교및 댐폭파, 원자폭탄사용을 주장했고
제3차세계대전을 우려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맥아더원수를 해임하고 맙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다만,사라질 뿐이다."-더글러스 맥아더원수- -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의 은퇴 연설문중 일부이며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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