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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주문모 신부, 조선 입국
1794. 12. 23
1794년 12월 23일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천주교는 원래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전래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부 남인 학자들에 의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784년 이벽·권일신·이승훈 등이 서울 명례방의 통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자치교회'를 창설했다. 1794년 주 신부의 입국 후에는 그의 체포를 둘러싸고 을묘사옥이 일어났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주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당시 약 4,000명에 불과하던 입교자 수가 1800년에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기존의 신분제에 도전을 가하는 천주교의 비약적 발전은 집권양반층을 자극하여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고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순교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인터넷 가톨릭 굿뉴스가 <가톨릭 대사전>의 주문모·조상 제사 문제 항목 해설을 제공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한국 교회의 역사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교회의 창설 과정>, <초기 교회사의 전개>,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대> 등을 읽을 수 있다.
전범 도조 히데키 처형
1948. 12. 23
1948년 12월 23일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도조 히데키가 처형되었다. 그는 진주만 공격(1941)을 감행할 때부터 마리아나 제도를 빼앗길 때(1944)까지 일본 수상을 지내며 전쟁을 이끌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연합국총사령부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1946년 1월 1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D. 맥아더는 전쟁범죄(평화·인도에 대한 죄, 전쟁법규 위반죄)를 심리·처벌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명령'을 발포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같은 해 4월 28일 A급 전범 용의자 28명에 대한 기소장이 발표되어 5월 3일 재판이 개시되었다. 2년 반의 심리를 거친 끝에 1948년 11월 12일에 판결이 내려졌는데, 도중에 사망 등으로 인하여 제외된 3명을 빼고 모든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피고들은 같은 해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월간 <신동아>가 1997년 1월호에서 뉘른베르크 재판과 극동국제군사재판을 비교한 로버트 스미스의 글 '일본 전범재판 : 태양 아래서의 정의(正義)' 번역문을 소개한다.
천황탄생일(일본어: 天皇誕生日)은 일본의 공휴일이다. 현재의 천황 탄생일은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며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바뀐다.
과거 쇼와 시대(히로히토 천황이 재위한 시대로, 1926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간을 말함)에는 4월 29일이 천황 탄생일이었지만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이후에 녹색의 날로 바뀌었고 2007년 쇼와의 날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천장절(天長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1948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해에 제정된 공휴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 날 고쿄(일본 황궁)에서는 천황 탄생일 기념 행사가 열리며 고쿄 발코니 앞에 모인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를 비롯한 일본 황족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 군중들은 일본의 국기를 흔들면서 천황의 생일을 축하한다. 참고로 고쿄는 매년 천황 탄생일과 1월 2일 일 년에 단 두 차례만 일반인에게 개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