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7월 25일 화요일 맑음
※ 오늘은 하루 종일 불당골 산에서 풀 깎은 이야기밖에 쓸 내용이 없어서 귀농일기 대신 어제 (7월 24일) 마감한 국민권익위원회 주최 ‘청렴수기 공모전’에 제출한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그저 그럭저럭 살아온 저를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청렴한 세상이 이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 보았습니다. 개구리 잡아 먹인 이야기나 우리 집 개를 끌어다 먹인 일 등 너무 리얼리틱한 이야기와 상대방이 있어서 사실 그대로를 쓰기 어려운 내용은 생략하였습니다.
그래 이 맛이야!
“42년동안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면서 조금도 서운하질 않습니다. 얼마나 서운하냐? 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천직이라 생각한 교직 생활에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했음이 이런 값진 결과를 주는구나’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앞으로 제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은 남은 인생에 최선을 다하면서 공정하고 청렴하게 살면 그 날에도 서운함이 없이 훨훨 떠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2017년 8월 30일 정년 퇴임식에서 제가 한 말입니다.
저는 초임지부터 교직생활 30년 동안 학급 담임을 맡으면서 별도로 학생들에게 학습이외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길러주기 위해 운동부를 모집하고 선수 육성에 매진했습니다. 초임지 황계초등학교에서 핸드볼로 시작해서 전교생 190여명의 벽지학교 동덕초 에서는 60명의 육상부를 조직해 도내 학교 간 육상대회를 2연패 하기도 했고, 여러 학교에서 전국대회 금메달을 수 차례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2005년 교육청 장학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바로 현충원을 찾아 나라를 지키신 호국영령들께 공정하고 청렴한 장학사가 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장학사가 된 나의 업무는 시 전체 초 · 중학교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갖추도록 지원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00억여원의 많은 훈련비 예산이 배정되어 있었습니다. 훈련비에는 일반 훈련비와 특별 훈련비가 배정되는데 일반 훈련비는 훈련 종목에 관계없이 선수 1인당 일정액이 배분되는 것으로 액수가 적고, 특별훈련비는 우수 선수가 많은 학교나 정책적으로 육성이 필요한 학교에 지급되는 훈련비로 금액이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 인기 종목의 운동부를 육성하는 학교는 저마다 사정이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특별 훈련비를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지원군 이었겠지요. 당연히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훈련비를 받은 학교의 담당 선생님은 촌지로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앞으로도 지원을 계속 받으려했습니다.
어느 날 소년체전 평가전 육상경기장을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ㅇㅇ중학교 박 선생님이 다가왔습니다.“박 선생님 수고 많으시지요?”반갑게 인사하는 내게 바짝 다가온 박 선생은 상의 옆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장학사님 식사나 한 번 하시죠”하더니 얼른 사라집니다. 장학사가 된 후 처음 있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실갱이를 하기엔 눈들이 너무 많았고 자칫 박 선생이 난처해질 수가 있었습니다.‘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그래 그게 좋겠어’
그 날 오후에 박 선생님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박 선생님, 선생님의 마음은 잘 받았습니다. 이 돈은 선수들에게 쓰세요. 열심히 하시면 계속 지원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처음에는 박 선생님 얼굴이 벌개 지더니 이내 밝아졌습니다. 뒤돌아서는 내 뒷머리에 상쾌한 바람이 스쳤습니다. ‘그래 이 맛이야. 이 상쾌함을 잊지 말자’
초년 교사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여름 뙤약볕에서의 체육 시간은 언제나 힘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엄마가 이거 드시래요” 현주가 차가운 사이다 한 캔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학교 앞에서 문구 잡화점을 하시는 현주 어머니께서 더운데 고생한다고 보내신 것입니다. 뜨겁게 달궈진 몸에 시원한 사이다는 꿀맛이었습니다. 이 일은 체육시간마다 계속되었고, 저는 몇 번을 그냥 그러려니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이다가 오지 않는 날이 있었습니다. 현주 어머니께서 친정에 가신 날이었답니다. 저는 몇 번이고 교문을 쳐다 보는 나를 보고 놀랐습니다.‘아, 이게 무서운 일이구나 내 몸이 길들여져 있구나’
다음 체육시간에는 어김없이 사이다가 전달되었고, 저는 그걸 가지고 현주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현주 어머니, 그동안 사이다를 정말 고맙게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이다가 기다려지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앞으로는 보내지 말아 주십시요” 서운해 하시는 현주 어머님을 이해시켜 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받는 것에 익숙치 않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기다려지고, 나중에는 달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그 길로 한 걸음 내디딘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이후 제 갈길이 정해졌습니다.
한번은 500만원의 특별훈련비를 지원한 학교의 지도교사가 그 학교의 운동부 훈련과정 참관을 요청해 왔습니다. 훈련 참관 후, 출발하는 차의 창문 안으로 봉투를 집어넣더군요. 열어보니 100만원짜리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100만원은 그 당시 뿐 만 아니라 지금도 매우 큰 돈 입니다. 순간 속이 끓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바로 되돌아갔습니다. “선생님, 선수들 운동복과 운동기구를 사야 한다고 해서 훈련비 보내 드렸는데 나한테 100만원 주고나면 아이들 운동복은 뭘로 사줄 겁니까? 이 돈 남김없이 선수들 훈련비로 써주세요” 당황해 하는 지도교사를 뒤로 하고 돌아섰습니다.
‘아니다. 그 아까운 훈련비 중 한 푼이라도 선수 육성 이외의 목적으로 쓰여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임무다‘ 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 뒤로도 100만원짜리 수표를 여러 번 되돌려 주는 씁쓸함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내자 건네지는 봉투도 없어지고 찾아가 돌려주는 번거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제가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운동부를 이끌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선수들을 먹이고 입히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학교든 선수들에 대한 예산은 넉넉하지 못했고 특히나 시골 학교는 예산 배정이 전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장남이었던 나는 부모님께 그리고 형제들의 학비로 급여를 송금하곤 했던 터라 나 역시 여유가 없었지요. 간식 한 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뙤약볕 아래서 훈련하는 선수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이기도 하고 숙직을 자청해 3일치 숙직비 900원을 받아 읍내로 달려가 돼지 잡뼈 (당시는 800원이면 한 마리 분을 살 수 있었다)를 사다 가마솥에 푹 고아 국물 한 그릇씩 먹일 때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봄에 새끼돼지 한 마리를 사서 일 년 동안 기른 후 겨울방학 내 국을 끓여 먹이기도 했고, 12월 보너스로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으며, 양지초에서는 충분한 영양섭취를 위해 3년 동안 저녁밥을 지어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과 생활했던 내게 선수들을 위해 쓰여질 훈련비를 개인적으로 받아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촌지로 사례를 하려는 일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알려지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동료직원들과의 관계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남달리 살아가는 제가 눈에 가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승진이나 보다 나은 직장생활을 위해 소위 말하는 상납이나 촌지를 할 줄 몰랐던 저를 독불장군이라 밉게 본 상사들도 여러분 계셨습니다.
좁은 길로 가기는 언제나 어려웠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견디기 어려울 때는 현충원을 찾아 참배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그 분들을 생각하며 새 힘을 얻었습니다. 42년 교직생활 동안 가장 어려웠던 것은‘눈치 보기’였습니다. 저는 어떤 인정이나 댓가의 바람 없이 내 몸을 불살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루의 가르침을 반성하고, 내일은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고민하였으며 뭔가의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되면 나에게 힘이 들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운동부를 지도하면서도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밤 10시까지는 야간 보충수업을 지도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게 하였으며, 장학사 시절에는 시 전체의 운동선수들이 야간에 공부할 수 있도록 ‘운동선수 방과후학교’를 개설했습니다. 물론 극심한 반대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 있던지 내 별명은‘미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떠난 후에는‘기적’이나‘신화’를 이루었다는 뒷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편한 길은 아니었지요. 세상은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동료들의 질시와 냉대는 보통이었고, 전 직원의 왕따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노골적으로“당신 혼자만 살겠다는 얘기야?”“잘 났어 정말”“과비가 없잖아”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밥도 혼자 먹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바로 세워져가는 청렴의 상을 볼 때 내 길이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변함없이 밀고 나갔습니다.
교장이 될 때에는 제일 어려운 학교,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학교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곳에 가면 제가 할 일이 있었으니까요.
한 학교를 이끌어야 하는 교장이란 자리에는 유혹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그래, 이 맛이야’를 잊지 않고 의연하게 나아갔습니다.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선생님께 높은 근무점수를 드렸는데, 고맙다는 인사로 촌지를 건네시는 선생님께 되돌려 드리며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열심히 노력하셔서 그 점수를 받으신 겁니다. 당연한 결과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고 이 일이 씨앗이 되어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청렴의 길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열매는 달았습니다. 2009년 장학사를 떠나 교장으로 전직하면서 촌지를 돌려받았던 선생님 등 내 진심을 이해해준 선생님들과 함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운동선수를 도와 훌륭한 선수로 키우자는 뜻으로 ‘운사모’라는 모임을 조직하였습니다. 9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400여명의 회원이 모여 총 40여명의 장학생들에게 월 20만원씩 지원한 장학금이 1억 5000만원이 넘었고, 국가대표 등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할 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2012년에는 뜻밖에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이란 커다란 상과 녹조근정훈장을 수여받게 되어 지난 42년의 노고에 대한 보답도 받았습니다. 이제 정년을 한 후 농사와 벗을 하며 공정하고 청렴한 세상이 이룩되길 기원하며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선생님´이시기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