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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초로 말할 것 같으면 가시가 덕지덕지 달려 있어 나무할 때나 평소에는 손이 가지 않다가도 추석 즈음 성묘를 가다보면 길가에 뽈그족족 아가리를 주악 벌리고서는 까만 씨를 내뱉는데 모양새가 하도 신기하여 눈길 한번 줄 뿐 즐겨 먹지 못했으니 우린 쳐다보지도 않았던 나무다. 왜인고허니 풋내가 더럽게 나서 추어탕이든, 염소탕, 보신탕에 넣어도 외려 입맛을 버린다는 악감정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방한잎, 생강나무(쪽동백과로 나무에서 생강냄새가 나는데 김유정의 <동백꽃>의 소재이다) 잎이나 따다 넣거나 뽕잎을 곁들이는 게 누린내를 없애는 지름길이지만 '초피'라는 형제격인 산초 비슷한 가시나무가 있으니 지역마다 젬피, 좀피, 제피로 따로 부른다. 탕(湯) 맛을 아는 사람은 이것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 미식가 축에 낄까.
이 좁쌀만한 씨앗 껍질을 벗겨 표피만 쓸 뿐 씨는 그냥 장독대에 버려두면 한 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이태를 지나 야들야들하다가 불그스름한 가시를 달고 세상 구경을 하니 멀리 따러 갈 일 없고 영호남 가릴 것 없이 동서통합 이뤄내는 필수 향신료다. 남부지방에선 이것 모르면 음식의 기초를 모르는 사람 취급당한다. 아직 씨가 익기 전까지는 잎을 한 줌 따서 말린 붉은 고추를 먼저 갈고 나중에 함께 갈면 깔끔하고 톡 쏘는 맛이 푹 삭힌 홍어 못지않은 진짜배기다. 초피를 넣느냐 마느냐에 따라 추어탕과 김치 맛이 천양지차니 천국과 지옥을 오가도록 신기한 마술을 부린다.
이렇게 말한들 사람들은 모른다. 향으로 구분하라고 하여도 알 리 없고 열매를 따 놓으면 더 구분이 가지 않으니 한의사가 들에 가 한약재를 보고도 까막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장에 가면 초피가 산초로 둔갑하기 일쑤고 추어탕 집 주인마저도 산초를 초피로 알고 내놓고 진짜 좀 달라고 하면 응짜부리기에 아예 넣지 않고 비린내 풀풀 풍기며 먹는 게 속 끓이지 않고 먹으니 소화에는 훨씬 낫다. 사람에게서도 각기 풍기는 냄새가 다르듯 나무끼리 이웃사촌이라도 향취가 또렷이 구분이 된다. 허나 원래 것을 모르는 사람이 뭐가 원조고 어떤 것이 진짜인 줄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고 진위를 따지지 않는 건 맛에 살고 맛에 죽는 맛생맛사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루두루 쓰이는 건 초피지만 산초라고 모든 걸 버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가을 낙엽이 질 무렵 까만 산초 씨를 가시에 찔려가며 쭉쭉 훑어서는 잠깐 말렸다가 기름집으로 가져간다. 이 때 초피 씨를 섞어도 무방한데 하던 일 팽개치고 열흘 남짓 산자락을 쏘다녀 두 말가웃 따면 약간 푸르스름하고 맑은 한 되 반 기름이 탄생한다.
중부내륙이든 중앙고속도로든 한적한 곳을 찾아 문경새재를 넘고, 희방사 지나 동쪽으로만 달리면 봉화다. 산이라고 같은 산이 아니고 소나무라고 한 가지가 아니다. 드러난 바위 하나하나마다 더 희다. 소나무도 위쪽은 붉고 차차 밑동으로 내려오면 거북등처럼 갈라진 춘양목이로다. 경복궁 보수 공사 이쪽 나무로만 썼는데도 아직 그 재목 골짜기 그득하니 산천경계 그만이로다. 미송(美松) 미인송(美人松)은 이쪽 육송(陸松)을 이름이다. 태백산에서 호미곶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과 서쪽으로 내달리는 백두대간 본 줄기 사이에 폭 안긴 이곳은 산과 밭뿐이다. 강원도인지 경상도인지 사람들 말씨마저 분간하기 어렵다. 송이버섯을 못 찾으면 사람들은 산초라도 꺾어 내려오곤 하는 곳이다.
둘이 만나 찰떡궁합을 이루는데 산초 씨에 밭의 쇠고기 콩 중 단백질만 모아 놓은 두부가 빠질쏘냐. 어울림의 미학은 후추, 겨자, 월계수 잎, 계피, 와사비 따위를 만나면 음식이 생판 다른 맛이 나고 역적질을 하듯 맛을 버리는 데 반해 어우러져 향미(香味)만 첨가하니 음식궁합 중 최고봉이다. 산초 씨 그 작은 알맹이로 기름을 짜 와서는 우리 진짜 콩으로 바람구멍 송송 뚫린 듯한 두부를 만들어 부스럭거리지 않게 물에 담갔다가 또깍또깍 잘라보자. 식당에 간들 쉬 접할 수 없으니 아무 민가에 두부 몇 모 사들고 들어가 "두부 좀 묵으러 왔능교"하며 생떼를 부려야 제 맛이라. 원주민 쉽게 만나기 어렵거든 아무 두부집으로 들어가 "색다른 두부 좀 먹고 싶소"하면 지레짐작으로 알아차리고 오늘의 주인공을 조금 가져온다.
참기름 콩기름 따위의 식용유 물릴 대로 물린지라 들기름에 구워도 일품이거늘 천연 야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친구가 거들어 노릇노릇 구워지면 멀리서 찾아가느라 곯던 몸이 허겁지겁 젓가락이 상 위를 바삐 노닌다. 납작하게 깔아놓고 구워지길 기다리는 것도 감내하기 힘겨운 고역이다. 구워지거나 말거나 올려진 족족 주워 먹기 급급하니 눈 깜짝할 새 한 모 두 모 사라지기 일쑤다. 마늘 양파 생강 하나 곁들이지 않아도 두부에 산초기름 한두 방울로 풋풋한 향기를 오롯이 머금으니 잠자던 세포가 화들짝 놀라는 품새가 천둥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따로 없다. 한겨울이거나 겨울 끝자락이거든 고사리, 취나물, 무청, 피마자 등 묵나물에 눈밭 냉이로 생채와 봄동으로 숙채(熟菜) 만들어 둘둘 비비다가 딱 한 방울 맛배기로 아껴 떨어뜨려 새봄을 맞이하면 잃었던 입맛 찾는 데 이만큼 꼬스름한 별미가 어디 있을까. 워메, 봄맞이 하다가 고운 향 다 날아가겠네. 아이야 병뚜껑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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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초기름은 무우국에 한숱갈 넣어 먹으면 참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