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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한옥의 얼이 깃든 만산고택........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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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봉화군 여행] 만산고택........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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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한수정을 뒤로하고 만산고택을 찾아간다. 만산 고택은 춘양면 마을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자
리에 있다. 유랑자는 잠시 고즈넉한 고택의 흙담 길을 따라 걸으며 정감어린 풍경과 초여름의 정취를 잠시 느
껴 본다. 왼지 도심의 콘크리트 빌딩숲에서 살다가 이런 고풍스러운 한옥이 자리 잡은 시골스러운 풍경을 접
하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평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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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보이지 않은 높은 흙돌 담장길,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은 위에 기와를 얹어 예스러운 멋이 살아
있는 우리네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윽고 만나는 만산(晩山)고택! 그 규모나 생김이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
게 할 만큼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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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공(晩山公)과 아들 의재(宜齋)는 태백산중 춘양골 80여리에 논밭을 갖는 만석갑부의 부(富)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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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칸짜리 긴 행랑채 한 가운데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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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이 즐비한 경북의 북부지방에서 어느 한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즈넉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은 물론 소담한 풍경은 나른하고 안온한 기운을 품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자연환경이 좋은 봉화 동북부
의 고산협곡답게 주변을 둘러싼 깊은 산세도 한몫한다. 자연속에 묻혀있는 멋스러운 그 풍경에 젖어들만 할
때 쯤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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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앞에 양반의 위엄을 내세우며 자리 잡은 행랑채와 솟을대문!. 무려 11칸짜리 행랑채다. 99칸을 빼 놓고
나면 흔치않은 행랑채다, 이는 만산 고택의 자부심이다. 솟을 대문은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세우긴 했지
만 원래 그 자체 만으로도 가문의 위엄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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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공(晩山公)과 아들 의재(宜齋)는 태백산중 춘양골 80여리에 논밭을 갖는 만석갑부의 부(富)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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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감
실(龕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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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지만 솟을대문이란 한 집안의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 중 하나이다. 현대의 청와대 비서실장 격인 정3품 당
상관 이상 벼슬에 올라야만 가질 수 있었던 당당한 대문이다. 이 솟을 대문을 통해 그 집안의 권세 있는 집안임
을 알리는 동시에 고택에 수레가 드나들 정도로 재산이 많은 집임을 자랑하기도 했던 것이 솟을 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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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만산공(晩山公)과 그 아들 의재(宜齋)는 태백산중 춘양골 80여리에 논밭을 갖는 만석갑부의 부(富)를 이
뤄냈던 집이었다. 춘양면에 소재한 만석군의 집이라 그런지 만산고택의 솟을대문은 부재(部材)가 매우 장대하
며 사용된 목재 역시 양질의 나무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만산고택의 솟을대문과 함께하고 있는 행랑
채에 붙어있는 대청마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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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칸짜리 긴 행랑채 한 가운데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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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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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작은 채에는 서실(書室), :서실(書室)은 권동수 선생의 글씨이고, 한묵청연(翰墨淸緣)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친필이다.
한묵청연의 의미는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이란 뜻으로 한(翰)은 붓, 묵(墨)은 먹이므로 한묵(翰墨)은 붓과 먹으로 이
루어지는 일체의 시문서화 말하는 것이고 청연(淸緣)은 맑고 깨끗한 소중한 인연(因緣)을 말하니 고아(高雅)한 학문에 정진(精
進)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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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하인이 거처하는 행랑채에는 외부로 돌출된 공간이 없는 반면 이곳 만산고택에는 잡다한 일을 맡아 하던
사람들에게도 잠시 쉬거나 접객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 것이다. 이 집을 지은이의 실용적인 사고와 아랫사람
들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시 행랑채에 방을 두는 경우는 많으나 마루를 두
는 경우는 유랑자도 몇군데 보지를 못했고 또한 드물기 때문이다. 암튼 첫걸음부터 이 고택만의 멋스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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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晩山)은 고택을 지은 강용(1846~1934)선생의 호다. 만산(晩山)이란 호는 흥선 대원군이 지어 내려준 것으
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릉참봉,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등을 지낸 고종 때의 문신이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벼
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집은 그보다 앞선 1878년에 지었다. 140년이 넘은 고택으로 당시 사대부 집안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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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감
실(龕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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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돌릴때마다 만산 고택은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가 넘쳐난다. 초록의 공간이 넓고 야생화들이 구석구석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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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군헌(此君軒)조선 후기 서예가인 권동수(權東壽)의 글씨로 ‘차군(此君)’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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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행랑의 마당을 뒤로하고 다음 걸음을 낸다. 정면에 사랑채가 마중한다. 강용 선생이 거주하던 방이다.
2통간의 대청과 2통간의 사랑방으로 이뤄져 있다.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감실이다. 마루 뒤
에는 마루방과 골방이 안채로 오가는 길을 연다. 그 뒤편에 안마당을 낀 안채가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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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춘양목의 고장답게 우선은 춘양목으로 건축한 사랑채의 위풍만으로 늠름하다. 본시 춘양면은 한반도 최
고의 목재를 생산하던 곳이다. 그래서 춘양에서 생산된 금강(金剛) 소나무는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렇다고 해서 아무나 구할 수는 없었고 궁궐이나 관청, 지체 높은 양반의 집을 건축할 때나 사용이 가능했다. 본
시 춘양목은 보통 소나무보다 성장 속도가 3배나 느리다. 당연히 나이테가 조밀해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일이
적고 잘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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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양재(存養齋):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는 의미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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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친필 만산(晩山). 그리고 정와(靖窩)‘는 당대의 서예가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강벽원(姜壁元) 선생의 글로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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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공(晩山公)과 아들 의재(宜齋)는 태백산중 춘양골 80여리에 논밭을 갖는 만석갑부의 부(富)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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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이란 춘양지역에서 자라는 금강송에만 붙이는 이름이다. 만산(晩山)이 건립한 만산고택은, 그런 춘양목
을 아낌없이 사용한 집이다. 사랑채에는 만산(晩山)이라는 현판 또한 또렷하다. 晩山이란 온산가득한 다시 말해
서 대기만성.(大器晩成)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이 글(강용의호)은 흥선대원군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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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 아니라 만산 고택은 곳곳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만으로도 당시 강용선생의 지위를 짐작하게 한다. 만산
현판 왼쪽의 정와(靖窩)라는 현판은 서예가 강벽원의 글씨다. 존양재(存養齋)현판은 3·1운동 33인의 한 명인 독
립운동가 오세창이 썼다. 또한 사랑채 북쪽에는 서실(서당채)이 있다. 사면이 모두 지붕을 이루는 우진각지붕
의 건물이다. 지금은 두 방을 하나로 묶어 한옥 스테이로 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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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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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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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붕 아래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현판도 걸렸다. 고아한 학문을 닦는다는 의미로 이 또한 각별하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여덟 살 때 쓴 글씨다. 다만 아쉽게 모두 탁본이 걸렸다. 이유는 몇 차례의 도난에 있은
후에 실물은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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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과 현판의 글씨들이 고택의 위엄이라면 사랑채 앞에는 정감을 더하는 요소가 시선을 끈다. 기단과 나란
한 화분들의 행렬이다. 올망졸망하고 도란도란 예쁜 화분들의 이야기꽃이 한창이다. 정성이 가득한 안주인의
세심한 손길이다. 어디 사랑채 앞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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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고택은 시간의 무게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산 고택은 그렇지가 않
다. 사계절 화사하고 생기가 돈다. 근엄하기보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 고택의 위엄은 간직하되 사람 사는 집
의 활력과 생명력이 넘쳐났으면 하는 안주인의 바람이다. 묵으러 오가는 방문객들이 많으니 그들에게도 한층
따스한 기운을 전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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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사랑마당의 100년 대추나무 아래로, 자그마한 원형의 화단 곁으로 괜스레 들뜨는 걸음을 재촉해본다.
초록의 길을 따르면 자연스레 칠류헌(七柳軒)에 다다른다. 사랑채의 남쪽에 낮은 담장을 쌓은 별채다.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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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는 두 가지 의미가 조합된 단어인데,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
루를 심은 옛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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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는 말은, 물고기가 불쑥 ‘바다에서 뛰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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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 칠류헌(七柳軒)> 편액(扁額)-영친왕의 스승이었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선생의 글씨이다.
*`칠류’는 두 가지 의미가 조합된 단어인데,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길 바라
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
섯 그루를 심은 옛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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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七柳軒) 현액은 소우 강벽원(小愚 姜壁元)선생의 글씨로 칠류헌은 영친왕 을 비롯한 조선 말기의 여러
문인들과 학문을
교류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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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련에는 백석산방(白石山房)이라 적혔다.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진규의 글씨다. 선비가 여유롭게 거처하는 곳이란 뜻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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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걱정
하며 여러 문인들 과 학문을 교류한 칠류헌(七柳軒)은 굽힐 줄 모르던 선비들의 기개가 어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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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 이름은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에서 빌려왔다. 도연명은 집 앞에 다섯 그루의 수양버들을 심고 자신을 오
류선생이라 칭했다. 강용 선생은 여기에 두 그루를 더해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를 빌려 칠류헌이라 칭했다. 또한
그 안에는 월.화.수.목.금.토.일.의 천지가 순환하듯 국운의 조속한 회복을 바라는 충정이 깃들어져있다. 다시 생
각해 보면 도연명의 철학과 사상을 본받고자 하는 다짐도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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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에는 옛 문인(文人)들의 체취가 깊게 배여 있고 그 흔적이 영가 권상한(永嘉 權相翰)선생의 칠류찬(七柳贊) 헌액이 고
풍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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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에는 옛 문인(文人)들의 체취가 깊게 배여 있고 그 흔적이 영가 권상한(永嘉 權相翰)선생의 칠류찬(七柳贊) 헌액이 고풍
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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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 한옥 스테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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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은 그 자체로 만산 고택 건축의 백미다. 대청마루는 뒤틀림이 없고 대들보의 묵직한 기운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칸과 칸 사이는 한옥에서만 느낄수 있는 팔각형의 완자무늬 창호가 멋스럽다. 칠류헌의 현판 역시 독
립운동가 오세창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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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의 주련에는 백석산방(白石山房)도 걸려있다.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진규의 글씨다. 선비가 여유롭게
거처하는 곳이란 뜻이 담겼다. 마루에 올라앉으면 담장을 따라 화단이 곱다. 담장 너머로 사랑채와 서실이 살며
시 모습을 드러낸다. 위로는 칠류헌의 실내는 천장이 높아 시원스럽다. 대청마루 가장자리에는 자기와 접시, 질
그릇의 무리가 단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또한 안주인의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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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돌릴때마다 만산 고택은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가 넘쳐난다. 초록의 공간이 넓고 야생화들이 구석구석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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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장독대에 무르익은 앵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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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화단은 유월의 온기를 제 몸 가득 품어 담아 뿜어낸다. 뒤로 돌아가니 앵두가 붉게 익었다. 하나 따 먹어보
고 싶을 정도로 유랑자를 유혹한다, 안채로 이어지는 길가로도 연신 꽃들이 방실댄다. 유랑자는 다시 한 번 만
산 고택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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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인 안채 건물도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용마루다. 11단을 올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 번와장 기
능보유자인 이근복씨의 솜씨다. 콘크리트 마당이 갖는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낸다. 유랑자는 다시 사랑 마당으
로 나와 대청마루에 오른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고택이다. 하지만 걱정도 앞선다. 만석꾼일 때에는 집안에 일하
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없다. 관리는 오롯이 주인장(노부부)의 몫이이 때문이다. 괜시리 유랑자의 허리
가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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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2 고종29- ? 한문학자사학자)선생은 정와공의 망미대 시(詩)에 대해 슬프고 처량한게 많아서
차마 끝까지 읽을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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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아양떠는사랑'답게 붉은 접시꽃 색감이 유랑자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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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면을 바라보니 너른 행랑채 너머 산세의 풍경이 눈에 가득 찬다. 유랑자는 들고온 가방에 있는 커피 한
잔을 들고는 숨을 고른다. 따스한 햇볕이 기운다. 초 여름에 너울대는 바람도 인다. 마음 깊은 곳의 적요다. 시
간은 천천히 차올라 옛 가옥의 기품과 생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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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의 만산(晩山)이다. 봄볕이라기 보다는 초 여름의 길목에서 춘양(春陽)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새삼스럽다.
이제 유랑자는 잔을 비우며 만산 강용 선생의 이름을 다시한번 떠 올려 보면서 발길을 돌린다. 오래도록 가슴
에 품었던 晩山의 충정과 또한 그 숨결이 이 고택에 오래도록 남이있길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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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떠나면서....흥성대원군이 직접 만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손수 글씨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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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대(望美臺);1905년 이후 낙향(落鄕)하여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국운회복의 념
=(念)을 시로 읊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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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대 시(望美臺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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葵效無地 時登望美臺 임금 향한 충성 받칠 길 없기에 때로 망미대에 오르노라
山河何寂寞 禱天時回 산하는 어이 그리 적막한고, 천시가 회복되기 두 손 모아 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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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臣大義古今同 於死於生各盡忠 군신간의 의리는 고금이 같거니. 살거나 죽거나 그 충성 다할 뿐
林下高人難奪志 世間烈士幾損 숲속에 숨은 고인 그 뜻 어이 앗으리오. 목숨 버린 열사들은 그 얼마런가?
採薇貞節千秋仰 拾絮道風百代隆 고사리 캐던 곧은 절개 천추 두고 우러르며. 경술 밝은 유풍 백대 두고 높이리라
望美臺前空灑淚 靑邱寒月照哀 망미대 앞에 부질없이 눈물 뿌리니. 청구의 차가운 달만 깊은 슬픔 비추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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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 선생이 낙향 직후인 1910년 저택 서산에 세운 망미대. 강용 선생은 매일 망미대에 올라 국운 회복을 기원
하며 4배를 올렸다. 1985년 강백기 씨가 현 위치로 옮겼다. 위당 정인보는 망미대 시(詩)를 보고 “슬프고 처량
한 게 많아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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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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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길 21-19
(지번)춘양면 의양리 288
연락처 :054-672-3206 대표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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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포천산정호수 를 둘러싸고있는 산 봉우리 정상에
망미봉이라는 곳이 있어요
모든것을 잊어버리라는 뜻이라고하더이다
만산고택의 망미대에
눈길이갑니다
제생각은 나라를 일었으면
찾을생각을해야되는대
고관대작들은 낙향해서 먼산쳐다보고
하층민들은 총칼들고나가싸우고~
ㅎㅎ 그래서 동학혁명이 일어나 죽창가를 부르는 것이지요
대권 후보라는 어느 넘 처럼 죽장가나 불러대며 왜놈들을 멀리 한다고
떠벌리는 넘하고 똑 같은 놈들이지요.
우리 나라가 또 일본놈들의 식민지가 되려고 그러는지 답답 합니다.
똘똘뭉처 왜놈들을 처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놈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놈들이
또 다시 정권을 잡으면 일본과 통일 하려나....ㅋㅋㅋ
잘보고갑니다.
감사 합니다.
누구나다 한옥을 원할거라 생각은 합니다.
건강에도 좋지만 고풍스러운 운치 때문이겠지요.
외부는 한옥으로 짓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편리하게.꾸미면 되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