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란?
성씨(姓氏)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로,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다. 성씨는 복잡하고도 지속적인 분화과정을 거친다. 이 때문에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며, 같은 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한다. 또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하고,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모성(冒姓)을 하거나, 변성(變姓) 사성(賜姓) 자칭성 (自稱姓)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姓)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고,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의 표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여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 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관습이다. 현행 민법에서도, 자식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제781조), 성이 오칭(誤稱)되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성의 변경은 허용되지 않는다. 씨(氏)는 때로는 성과 함께 붙어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사용되었고, 본관(本貫)과 함께 사용되어 혈연관계가 없는 동일한 성과 구별된다. 씨는 경주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에서와 같이 존칭적 의미도 잠재하여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씨는 또한 조선시대 양반의 처(妻)에 대한 이름 대용의 경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중국의 고전에서 말하는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시하는 것으로 우리의 성이라는 것에 해당되며, 씨란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써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
개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族)의 칭호.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며, 곧 씨족적 관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데서 결국 족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 것이며,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 후대의 성씨는 한자식 표기로서 이름 앞에 붙여 족계를 나타내는 동계혈족집단의 명칭을 가리킨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붙여서, 때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관계가 없는 동성과 구별한다. 성씨는 발생한 이래 계속 분화하여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고, 동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혹은 부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모의 성을 따르기도 하며, 혹은 혈연적인 관계가 없는 모성(冒姓)을 하거나 변성(變姓) · 사성(賜姓) · 자칭성(自稱姓)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상고시대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했다가 후대에 성과 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하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한국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 사이에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성(姓)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여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이 한국 고래의 관습법이다. 성(姓)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시대에는 여계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였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가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곧 씨(氏)였다. 씨(氏)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말하고 있다. 씨는 분화된 혈통(성)을 각기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므로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한다. 그러니 그 씨는 바로 한국의 본관에 해당된다. 씨는 또한 김씨 · 이씨처럼 존칭적 의미가 있어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처에 대한 이름 대용의 경칭적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성씨의 유래와 보급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씨족사회에는 아직 성이란 것이 없었다. 가령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의 토착사회에서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족내혼(族內婚)을 하지 않는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모(母)만 확실히 알고 부(父)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건 부계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처럼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 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성자(姓字) 자체가 여성에서 나온 것처럼 중국 초기의 성자에는 여자(女字) 변을 딴 글자가 많았다. 한국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우리의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夢)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신라는 박(朴) · 석(昔) · 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B.C. 19∼AD 18)때 6부 촌장에게 이(李) · 최(崔) · 정(鄭) · 손(孫) · 배(裵) · 설(薛)씨의 6성을 주었다고 한다. 가락국의 수로왕(42∼199)도 황금알에서 탄생했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540∼576)에 건립한 4개 순수비, 진평왕 때(578∼632)에 건립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중국식 한자성(漢字姓)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국 역사상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성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와 《당서》 이전의 중국 정사에 기재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구려는 해(解) · 을(乙) · 예(禮) · 송(松) · 을지(乙支) 등 10여종, 백제는 사(沙) · 연(燕) · 해(解) · 진(眞) · 국(國) 등 8대성과 왕(王) · 장(張) · 사마(司馬) · 고이(古爾) · 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는 3성과 6성 및 장(張) · 요(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의 경우,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봉지(封地, 采邑)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했다. 또 관직자나 치읍자(治邑者)는 세공(世功)이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공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사여는 우선 황제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族系)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사여는 국왕을 전제로 제도화한 감이 있다는 점이나, 그 수성자들에게 정치적 배려가 주어지며, 또 그들 각자가 연고지가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당시 상황이 아직은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정치적인 지배조직과 좀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 · 백제 · 신라 할 것 없이 고대국가 체제정비기의 사성은 부제(部制) 개편, 관등(官等) 설정 등과 함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정치적 편성의 한 방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 과정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김 · 석 · 박 · 신김(新金, 가락국)씨와 같이 중고(中古) 왕실 지배층의 성씨 취득, 삼국통일 전후의 6부 사성 및 나당(羅唐) 관계에서 견당(遣唐) 사신 · 유학생 · 숙위(宿衛) 학생 · 입당수도승(入唐修道僧), 기타 중국에 왕래한 인사(張保皐, 鄭年 등)들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당시에 성씨를 획득함으로써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주위 여러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집단으로서 정치적 · 사회적인 특권이 주어진다는 점, 둘째, 성원권의 획득에 있어서 신라 고유의 전통적인 출자 관념이 부계나 모계 혹은 양계출자(兩系出自)라는 한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부계 · 모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고 변경할 수도 있는 융통성이 있었음에 대하여,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출자율이 부계로 전환한다는 점, 셋째, 성씨를 취득하는 집단이 족적 관념의 변질 및 혈족 자체 내의 극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사실상 족단 혹은 친족공동체라는 용어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만큼 해체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성을 최초로 가진 집단은 왕실 · 귀족과 같이 성이 곧 골(骨) · 족(族)과 관련되면서 최상층 지배집단에서 비롯되었다. 6부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성씨 취득이 통일 과정과 그 후 국가체제의 재정비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각 족단의 세력변동을 단계적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성씨 취득과 등장은 비단 6부성에 그치지 않고 신라 하대로 갈수록 현저히 많은 성이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음은 6성이 일시에 사성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계기적임을 시사한다.
한자성(漢字姓)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해서 귀족 · 관료 · 양민 및 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7세기 초부터 신라의 왕실성인 김씨 · 박씨가 《신 · 구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왕은 김진평(金眞平)이며, 백성 사이에는 김 · 박 양성이 많고, 이성(異姓)끼리는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 ”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라든지 하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6성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742∼765), 정 · 손 · 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런데 신라의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漢姓化)한 시기는 비록 7세기 이후라 하더라도 그 씨족의 유래는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서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 시대부터 한식(漢式)성씨가 보급되어 갔다. 7세기 후반부터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六頭品) 계층은 점차 한성(漢姓)을 수용해 갔던 것이며, 또한 신라는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경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이미 한성화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의 귀족 · 관인 가운데는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한성화 이후에 이주한 자로 나눌 수 있다. 후삼국시대 지방 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내의 성장과 신라 중앙문화의 지방에로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 하대 중앙 통제력의 점진적인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일찍부터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 귀족의 후예들과 신라 하대 재래의 토착 촌주층(村主層)이 중심이 되어 이 시대의 정치 · 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지방 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 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 말단에 참여해 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 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 관제에 방불한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王建)은,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 작업과 함께 각 구획의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했던 것이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 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姓族分定)과 씨족지(氏族志) 편찬, 반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성씨체계는 그 토대가 왕건의 토성 분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중국의 경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성족분정(姓族分定, 495)과 당태종의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 638) 편찬사업에 비교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그 23년(940)경에 전국의 군현 토성을 분정한 배경은 바로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에 의해 분정된 전국의 군현별 토성과 고려시대에 생성 · 변화된 성시체계는, 후일 《세종실록지리지》 각 읍 성씨조에 담겨지게 되었다. 성씨의 역사는 신분사의 발전과정과 궤도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 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열하여 분관 · 분파 작용을 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소멸되는 성씨도 있었다. 고려 초기에 전국의 주 · 부 · 군 · 현과 특수 구획인 향(鄕) · 소(所) · 부곡(部曲) 등 주읍(主邑)과 임내(任內: 外官이 없는 구획)별로 분정된 성의 구성 요소는 읍치(邑治: 읍내)의 지배성단인 인리성(人吏姓)과 촌락지배성단인 백성성(百姓姓)이었다. 이들 성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 지방세력을 대표했던 호족으로서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 거주지별로 토성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관인들을 출신 성별(姓別)로 분석해 보면 소수의 중국계 귀화인과 발해계 유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성자(姓字)를 당나라의 군망표(郡望表)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거기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承씨)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 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정초는 그의 서문에서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 · 읍(邑) · 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자(名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한국의 성자(姓字)는 바로 이렇게 생성된 중국의 것을 모방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성자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박 · 석 · 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宗姓)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을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환(李重煥)도 그의 《택리지 擇里志》에서 한국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의 씨성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 ”고 하였다. 그는 성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첫째, 고려초 사성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둘째,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셋째, 고려초 사성 등 크게 셋으로 나누면서 첫째와 둘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셋째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한 확실한 근거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토성이 분정되었던 것이며, 또 다음의 사실이 그것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 · 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賜姓)을 광범위하게 실시한 바 있다. 둘째, 신라의 3성과 6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 한성(漢姓)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까지 끊임없이 사성(賜姓) · 모성(冒姓) · 자칭성(自稱姓) 및 분관(分貫) · 분파(分派) 등 성의 생성과 분화 ·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한국 성씨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 15세기에 존재했던 전국 성씨의 종류와 본관 수의 도별 통계자료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道別 姓氏 統計
본관수/ 본명 | 土姓 | 亡姓 亡土姓 | 來姓 亡來姓 | 續姓 | 村姓 亡村姓 | 入鎭姓 | 入姓 亡入姓 | 賜姓 | 합계 | 경기도 | 242 | 162 | 37 | 35 | 10 | - | - | - | 486 | 충청도 | 305 | 98 | 33 | 81 | 49 | - | - | 1 | 567 | 경상도 | 561 | 15 | 131 | 172 | 28 | - | - | 4 | 911 | 전라도 | 656 | 69 | 37 | 99 | 2 | - | - | - | 863 | 황해도 | 100 | 82 | 51 | 53 | 16 | - | - | - | 302 | 강원도 | 107 | 82 | 25 | 87 | - | - | - | 3 | 304 | 평안도 | 10 | - | 21 | 14 | - | 389 | - | - | 434 | 함경도 | 98 | 57 | 46 | 24 | 17 | 15 | 332 | - | 589 | 합계 | 2,079 | 565 | 381 | 565 | 122 | 404 | 332 | 8 | 4,456 |
위 표에 의거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성종(姓種)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관에 의한 구분:
주성(州姓) · 부성(府姓) · 군성(郡姓) · 현성(縣姓) · 촌성(村姓) · 외촌성(外村姓) · 부곡성(部曲姓) · 향성(鄕姓) · 소성(所姓) · 처성(處姓) · 장성(莊姓) · 역성(驛姓) · 수성(戍姓) ·
② 성씨의 출자에 의한 구분: 천강성(天降姓) · 토성(土姓) · 차성(次姓) · 인리성(人吏姓) · 차리성(次吏姓) · 백성성(百姓姓) · 입주후성(立州後姓) · 입현후성(立縣後姓) · 가속성(加屬姓) · ?
③ 성의 소멸과 이동에 의한 구분: 망성(亡姓) · 망촌성(亡村姓) · 경래성(京來姓) · 내성(來姓) · 입성(入姓) · 입진성(入鎭姓) · 속성(續姓) · 망래성(亡來姓) · 망입성(亡入姓).
④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 사성 · 당래성(唐來姓) · 향국입성(向國入姓) · 투화성(投化姓).
한편, 성자에 의한 성의 수효를 살펴보면, 역대의 성씨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관계 자료인 위의 지리지의 각읍 성씨조에는 전체 250 여성 가운데 이미 소멸된 망성(亡姓)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종 17년(1486)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외래성과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전체성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英祖)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 陶谷叢說》에는 298성인데 비하여 한말에 발간한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것을 현존 유무에 관계없이 총망라했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漢姓化)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10세기 이래 한말까지 존속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 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신생성을 제외한 재래성이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성세(姓勢)와 본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지만, 대체로 김 · 이 · 박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수가 많았다. 상기 이의현은 그의 《도곡총설》에서 한국의 성 298성을 그 유명도와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저성(著姓): 李 · 金 · 朴 · 鄭 · 尹 · 崔 · 柳 · 洪 · 申 · 權 · 趙 · 韓(12개성). ② 그 다음 저성:
吳 · 姜 · 沈 · 安 · 許 · 閔 · 任 · 南 · 徐 · 具 · 成 · 宋 · 兪 · 元 · 黃 · 張(16개성). ③ 그 다음 다음 저성:
曺 · 林 · 呂 · 粱 · 禹 · 羅 · 孫 · 盧 · 魚 · 睦 · 蔡 · 辛 · 丁 · 裵 · 孟 · 郭 · 卞 · 邊 · 愼 · 慶 · 白 · 全 · 康 · 嚴 · 高(25개성) ④ 희성(稀姓):
田 · 玄 · 文 · 尙 · 河 · 蘇 · 池 · 奇 · 陳 · 수 · 琴 · 吉 · 延 · 朱 · 周 · 廉 · 潘 · 房 · 方 · 孔 · 설 · 王 · 劉 · 秦 · 卓 · 咸 · 楊 · 薛 · 奉 · 太 · 馬 · 表 · 殷 · 余 · 卜 · 芮 · 牟 · 魯 · 玉 · 丘 · 宣(41개성) ⑤ 그 다음 희성:
都 · 蔣 · 陸 · 魏 · 車 · 邢 · 韋 · 唐 · 仇 · 邕 · 明 · 莊 · 葉 · 皮 · 甘 · 鞠 · 承 · 公 · 石(19개성) ⑥ 벽성(僻姓):
印 · 昔 · 공 · 杜 · 智 · 甄 · 於 · 晋 · 伍 · 拓 · 夜 · 賓 · 門 · 于 · 秋 · 桓 · 胡 · 척 · 伊 · 榮 · 恩 · 邵 · 貢 · 史 · 異 · 陶 · 롱 · 溫 · 陰 · 龍 · 諸 · 夫 · 景 · 强 · 扈 · 錢 · 桂 · 簡(38개성) ⑦ 귀성(貴姓):
殷 · 彭 · 千 · 片 · 葛 · 頓 · 乃 · 間 · 路 · 平 · 憑 · 翁 · 童 · 鍾 · 풍 · 宗 · 江 · 家 · 董 · 陽 · 章 · 桑 · 장 · 程 · 荊 · 耿 · 敬 · 密 · 京 · 筍 · 井 · 原 · 遠 · 萬 · 班 · 員 · 堅 · 騫 · 燕 · 時 · 傅 · 瞿 · 혜 · 米 · 艾 · 梅 · 雷 · 紫 · 섭 · 包 · 何 · 和 · 賀 · 花 · 華 · 賈 · 夏 · 麻 · 牛 · 僧 · 候 · 曲 · 柏 · 구 · 畢 · 谷 · 弓 · 種 · 邦 · 凉 · 良 · 芳 · 卿 · 刑 · 永 · 秉 · 登 · 昇 · 勝 · 信 · 順 · 俊 · 심 · 端 · 鮮 · 苧 · 牙 · 水 · 彌 · 吾 · 珠 · 斧 · 甫 · 部 · 素 · 附 · 凡 · 固 · 台 · 才 · 對 · 標 · 肖 · 那 · 瓜 · 化 · 壽 · 祐 · 價 · 尋 · 森 · 占 · 汎 · 克 · 郁 · 翌 · 宅 · 直 · 側 · 澤 · 綠 · 赫 · 冊 · 濯 · 骨 · 燭 · 律 · 物 · 別 · 實 · 弼 · 合 · 절 · 요 · 思 · 范(136개성) ⑧ 복자성(復字姓):
南宮 · 皇甫 · 鮮于 · 石抹 · 扶餘 · 司空 · 東方 · 西門 · 獨孤 · 令狐 · 司馬(11개성)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성쇠ㆍ소장하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15세기이래 현재까지 한국의 성 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 · 일 양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성 수는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성 가운데 김 · 이 · 박 · 최 · 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희성(稀姓)과 벽성(僻姓)은 숫자상으로는 98개 성이지만 인구상으로는 극소수이며, 더구나 성의 수효로는 전체 성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귀성(貴姓)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전체 인구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너무나 낮다는 데서 성의 편재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과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해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2성에다 본관은 3,435개로 나타났다.
성씨 체계의 특징
한국의 성씨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의 수용 · 보급 및 분화과정과 본관의 세분과 통폐합, 족보체제 등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성명의 구성이 복잡하며 고유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낸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경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가(家)에서 ‘을’의 가에 입적(入籍)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아내는 김성이고, 며느리는 박성이라는 식이다. 더구나 한국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가족 · 친족제도와 함께 사회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윤리 · 도덕 · 관습의 기본이 되어 왔다. 또한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귀속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기재하여 부계혈통을 밝힌다든지,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혹은 각 씨족,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지,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든지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또한 ‘성불변(姓不變)의 원칙’은 한국 <민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이다. 한 집안에 여러 성이 섞여 있는 한국인 생각으로는 여자가 결혼하더라도 성불변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남편과 아내가 같은 성을 갖는 부부동성주의(夫婦同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서구인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비춰지고 있다.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신지인 본관을 의미한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한국의 성씨체계 가운데 한 특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하여 보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①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②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③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④ 이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여덟 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와 같은)을 했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말 고려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해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혹은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했으나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徵稅) · 조역(調役)의 필요상 일반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재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올수록 분관 · 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 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본관체제가 최초로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이다. 거기에는 주 · 부 · 군 · 현 · 진 · 촌 및 향 · 소 · 부곡 · 처 · 장 · 역 · 수(戍)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 · 촌 · 향 · 소 · 부곡 등 특수 구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 · 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顯祖)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 · 모관(冒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현대사회의 성씨
성과 씨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어, 가령 이씨 · 김씨라 할 때는 양반신분을 뜻하나 이성 · 김성 또는 이가 · 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또는 유성자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민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고, 불교의 승려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다는 데서 역시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계층과 직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씨 관념과 관련있는 관습과 민속이 많다. 가령, 자녀혼인에 있어 어떤 성을 선호하는 대신 특정한 성은 금기하는 관행이 있으며, 일년신수를 점칠 때나 토정비결 같은 것을 볼 때 거기에도 접촉하는 사람의 성씨에 따라 이해득실이 있다는 것이다. 성씨는 일찍부터 우리민족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분화, 발전해왔는가 하면 신분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무성에서 유성으로, 또한 유성에서 무성층이 되기도 하였다. 성과 본관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한국의 성씨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자료는 세종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로서 성씨의 내부구조와 시대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18세기 이후에 쏟아져 나온 각 성씨 족보들은 당대인의 수록에도 개관(改貫), 투탁한 예가 많았던 것은 물론, 특히 시조의 유래와 조상의 계보에는 조작과 분식이 가해져 오히려 성씨의 발생과 분화 및 발전과정을 구명하는 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성의 연혁과 당시의 성에 관한 연구 · 조사서로서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발행의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와 국세조사과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이 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검토는 식민지 통치하에 한국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의 성격을 보다 조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사회구조와 사회변동과 같은 사회사를 살피는 한 과정으로서 족적 문제와 관련하여 성씨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 성씨의 발자취
우리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로 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화되어 분관·분파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삼국시대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씨족사회에는 성이라는 것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1.고구려 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다. 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손(孫)· 창(倉)· 동(董)· 예(芮)· 연(淵)· 명림(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백제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다.그밖에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 (木)· 백()의 8대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 10여종의 성이 사용되었다.
3.신라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는 7세기 초부터 《구당서》· 《신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이·최·정·손·배·설)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밖에 장(張)·요(姚) 등의 성도 보인다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삼국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삼국통일 후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글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이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와는 차이가 생겨났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濯· 承氏)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漢姓化)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가지게끔 법제화되었다. 무성인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례 1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었다.
사례 2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랐다.
사례 3 김·이·박씨가 많은 데서 그러한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 때문에 종전의 대성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을 삼은 경우가 많았다.
사례 4.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할 때나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일제시대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의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일제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일환에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했던 창씨개명은, 성이란 일생토록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한 우리 민족에게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지 못할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우리 민족은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사례 1 이가(李家), 김본(金本), 배정(裵井), 오산(吳山), 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였다.
사례 2 남양(南陽)·수원(水原)·경산(京山)·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사례 3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예컨대, 파평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 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庶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말부터 실시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이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자 창씨개명한 호적부 기재와 이에 배치되는 모든 법령·훈령 및 통첩은 그 창초일부터 무효가 되었다. 가씨에서 흥씨까지
우리 성씨의 수는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세종실록》 지리지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이 문헌에는 전체 250여성 가운데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이 문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모두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포함되어 있다.
《도곡총설 陶谷叢說》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했는데, 298성이 수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 고종 때 발간한 이 책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것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다. 여기에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전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의 숫자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 姓解》에 의하면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성 가운데 김·이·박·최·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성씨에 대한 전체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시기는 1930년도인데 이때 전국에 250성이 있음이 국세조사에서 밝혀졌다. 8·15광복 후 최초의 성씨조사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의 부대조사로 실시되었는데, 30년 전의 조사보다 8종이 많은 258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의 조사는 북한지역이 제외된 남한만의 조사라는 데서 1930년도의 조사 결과와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 남북분단에 따른 대규모의 인구이동으로 인하여 남북한의 성씨 구성에도 변동이 컸다. 남한지역에만 사는 성씨가 있는가 하면 북한에만 있는 성씨도 많다.1985년 11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씨와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하여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2성에다 본관은 3,435개로 나타났다. 이 때 나타난 인구 100명 미만의 희귀성씨 40여 개는 호적 기재 착오로 인한 경우와 고아출신이 입적하거나 외국인의 귀화 때 생겨나는 등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10대 성씨의 본관수를 보면 김씨가 285, 이씨 241, 박씨 128, 최씨 127, 정씨 122, 강씨 33, 조(趙)씨 56, 윤씨 44, 장(張)씨 63, 임(林)씨 60개로 각각 집계된다. 성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성씨제도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낼 수 있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성명 체계이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성은 가족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집안에서 ‘을’의 집안으로 입적(入籍)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父)족과 부(夫)족 모두에 속할 수 없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불변의 원칙’은 우리 〈민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며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드문 것으로,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연관념상 자기의 원래 씨족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또한 성씨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성씨와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집단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적어넣어 부계혈통을 밝힌다든지,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또는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지, 또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성씨에 딸린 본관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한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고,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8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세금 징수나 조역의 필요상 일반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성씨체계가 확립된 고려 초기부터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모든 성은 본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주·부·군·현·진·촌 및 향· 소· 부곡· 처· 장· 역· 수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촌·향·소·부곡 등 임내와 특수지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벽성과 함께 천시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그 본관을 바꾸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 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조씨, 한(韓)은 청주한씨, 심(沈)은 청송심씨, 문(文)은 남평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격(家格)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생활 속의 성씨
성과 씨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이씨·김씨라 할 때는 양반신분을 뜻하나 이성·김성 또는 이가·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또는 유성자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고, 불교의 승려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다는 데서 역시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계층과 직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고 있다. 민속이나 관습에도 성씨 관념과 관련있는 것이 많다. 가령, 자녀혼인에 있어 어떤 성을 선호하는 대신 특정한 성은 금기하는 관행이 있으며, 일년신수를 점칠 때나 토정비결 같은 것을 볼 때 거기에도 접촉하는 사람의 성씨에 따라 이해득실이 있다는 것이다.
속담에도 성씨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성을 갈겠다" 조선조 이래 ‘성불변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 온 우리나라에서 맹세 또는 굳은 약속 등을 할 때 이런 속담을 사용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근대 이후 성이 일반화되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촌놈 성 김가 아니면 이가다" 우리의 성 가운데 김씨와 이씨가 절대 다수라는 데서 온 말이다.
"김씨가 한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 이 또한 김씨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머슴살이 삼년에 주인 성 묻는다 " 한 집안의 김별감성을 모른다 "10년을 같이 산 시어미 성도 모른다 "
별명도 성씨 때문에 붙여진 경우가 있다. 즉 성의 출자와 유래 또는 시조나 조상에 관한 일, 또는 성씨의 발음이나 어휘에 따라 별명이 생겨난다.
박(朴)씨 ‘말’ 정(鄭)씨 ‘당나귀’ 정(丁)씨 ‘곰배’ 홍(洪)씨 ‘물렁감’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민법 781조)”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진다. 그러나 〈민법〉은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함으로써 이 경우에 한하여 명문으로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하여(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서양자(庶養子)는 입부혼인의 경우와 같이 부(夫)가 처가에 입양하여 그 출생자는 모가, 즉 양가에 입적할 뿐만 아니라 호주상속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성(異姓) 양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성불변의 원칙상 변경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구관습법에는 서양자(데릴사위)는 허용하지 않았으나, 신민법은 이를 창설하여 남자 없는 가족을 위하여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남독녀가 호주 또는 호주상속인인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입부혼인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부혼인을 한 경우에는 부부는 처의 주소나 거소에서 동거해야 하며, 그 부부 사이의 출생자녀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의 가에 입적한다(826조). 아동복지 시책으로서의 고아 입양 문제와 함께 최근 새로운 형식의 입양은, 양친됨에는 기혼·미혼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며(866조), 양자됨에 있어서도 남녀·소목(昭穆)을 가리지 않음(877조)은 물론, 성이 다른 양자까지도 인정하여 전통적인 입양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나, 양부모의 입양 목적에는 별로 큰 변동이 없다. 자녀 없는 양부모가 가계를 잇기 위한 것이 주된 입양 목적이기 때문에 현대적 입양 역시 남아가 월등 더 많이 입양되고 있으며, 양자의 성이 무엇이었던 간에 양친의 호적에 기재되는 양자의 성과 본은 양부와 동일해야 한다는 뜻에서 친생자로서 신고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동성불혼’·‘이성불양’의 관습 하에 윤리적 또는 우생학적 견지에서 동성동본간 금혼제가 철저히 지켜졌으나, 현재와 같이 인구의 격증과 이동, 산업화와 도시화로 종래 한 부락에 살던 동족이 사방으로 이산되고 김해김씨·전주이씨·밀양박씨 등 수백만이 넘는 동성자가 시조를 같이한다고 하여 촌수를 가릴 것 없이 그 사이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남녀평등을 기조로 한 현대사회에서 모계혈족에 대해서는 최근친을 제외하고는 혼인을 방임하면서 부계혈족에 대해서는 촌수의 제한 없이 금혼하는 것은 일종의 남녀차별이다. 최근 이름의 한글화와 함께 성씨의 한글화도 미구에 거론되겠지만, 성자의 한글표기에 있어 ‘리(李)’·‘류 (柳)’로 하는 씨족이 있어 두음법칙에 어긋나는 예가 있듯이, 성은 이름과 달라서 성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