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에 있어 감추어진 곳 같은 ‘샘내’라는 동네에서 전원목회를 시작했을 때다. 수원시에 속해있었지만 북쪽 끝의 외진 데라서 교통과 문화시설이 열악했다. 지지대고개로 이어진 덕성산을 타고 내려와 야트막한 산 아래 50여 가구가 고구마줄기처럼 펼쳐져 있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재래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인근에 들어선 국립원예시험장과 시설을 확장 중에 있는 선경합섬에 주로 날일을 다녔다. 대게는 집안경계와 보양식용으로 내다 팔 덩치 큰 잡종 개들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여지 것 구멍가게와 공중전화기가 없었고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아 집집마다 샘을 파서 지하수를 길러 먹고 동구 밖에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서호천이 흐르고 있었다. 市에서는 샘이 많고 냇물이 있는 동네라 해서 행정구역상 천천泉川동이라고 명명해 주었지만 동네사람들은 물론 인근에서도 이전대로 샘내라고 했다.
한동안 동네 한가운데에서 수원샘내교회를 운영하다가 뒷동산 끝자락에 있는 외딴 데로 이사를 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된 Y모대통령의 친족이 별장처럼 지은 집인데 미국영화에서 봤었던 것 같은 녹색의 장원이었다. 갑자기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야 할 형편이 되어 내가 매입했다. 집에 딸린 천여 평의 산자락 밭에는 감자, 고구마, 콩과 각종채소를 심고, 높게 그물망을 쳐 닭, 오골계, 오리, 칠면조를 길렀다. 경계병으로 거위 두 쌍을 뒤 쪽에 두었고 진돗개 누렁이와 이사를 가면서 주고 간 외래종 점둥이는 현관 쪽에 있게 했다. 내가 뒷산을 오르거나 냇가에 갈 때는 누렁이를 데리고 다니고 점둥이는 집을 지키게 했다. 누렁이는 천안 누이동행이 몸집이 큰종자의 진돗개라며 암강아지를 보내왔다. 토종개답지 않게 건정한 다리에 귀는 포인터처럼 덮였고 엷은 회색에 누런색을 약간 덧칠해 논 모양세가 맘에 썩 들지 않았다. 그러던 게 점차 자라면서 귀가 쫑긋하게 서고 꼬리 끝을 둥글게 말아 치켜 올리면서 진돗개 특유의 민첩한 기질이 보이고 재롱도 부렸다.
성견이 된 누렁이는 키도 크고 몸집이 당차고 영리해 주변 나들이 때 따라다녔다. 당시 동네에는 다른 곳에서 유치를 꺼려하는 특수시설이 들어와 있었고, 양귀비를 몰래 재배해서 밀매하다가 적발되는 집도 있었다. 어느 때는 낯선 사람들이 산을 타고 내려와 개를 약 먹여 잡아가고 처마 밑에 걸어둔 마늘과 부엌에 있는 살림도구를 가져가는 일이 발생했다. 예배당과 붙어있는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들 때면 누렁이가 재빨리 달려와 동정을 살폈다. 자세가 거만해 보이거나 말투가 거칠다 싶으면 그쪽을 향해 조심하라고 으르렁거렸다. 누렁이와 거위가 집을 잘 지켜주는 가운데 향어가 노니는 연못의 잔디밭 가에서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살구, 앵두, 청사과, 대추, 밤 ,호두 등이 앞을 다투어 익어가고 있었다, 꿈을 이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풍성한 삶을 누렸다.
누렁이의 활동이 날로 두드러졌다. 점둥이보다 반배나 더 컸지만 사냥하는 능력이 기발했다. 콩밭 고랑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낮게 나르는 참새를 번개처럼 튀어 올라 물어 잡고, 땅콩과 고구마 밭을 파 뒤집는 들쥐도 앞발로 흙을 파고서 움켜잡아냈다. 누렁이가 참새와 들쥐를 잡아가지고 내게 가져와 칭찬을 받을 때면 점둥이는 개면적은 듯이 다가와 어설프게 딴전을 피어댔다. 십여 년이 훌쩍 가버린 1990년 대 말 산 밑 우리 집과 전철 성대역까지의 야산과 들판이 토개공에 수용 되 버렸다. 전에 살다가 비워둔 집으로 다시 내려가면서 거위 한 쌍을 대만 성도들이 왔을 때 요리해 주었고, 칠면조 한 쌍과 점둥이는 파장동 유치원에 기증했다. 누렁이만을 데리고 이전처럼 동네 가운데로 예배당을 옮겨 살게 되었다.
누렁이는 여전히 집을 잘 지키고 충실하게 나를 경호하면서 이듬해 새끼 한 마리를 낳았다. 한동안 젖을 먹이느라 밖에 나아 다니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 같아 잠간 나갔다가오라고 목줄을 풀어 주었다. 큰 키에 야윈 몸을 추스르더니 동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들어와 곧장 새끼를 품고 집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도 풀어주었더니 어디서 못쓸 약이 든 것을 먹었는지 비틀거리며 돌아와 고통스럽게 킁킁대다가 새끼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가족처럼 이어서 가슴이 저리고 집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사찰집사와 함께 우리 집이 내려다보이는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고 어미를 잃고 떨고 있는 새끼를 안방으로 드려왔다.
강아지는 40일 이상 어미젖을 먹어야 튼튼하게 자라는데 겨우 30일 밖에 되지 않았다. 우유를 먹이다가 향남에 있는 지인 목사님 댁 개가 새끼를 낳았다기에 그곳에 가서 젖을 충분이 얻어먹고 튼실해져 왔다. 대를 이어 집을 지키고 충성스럽게 나를 따르는데 이곳마저 개발에 밀려 아파트 단지가 되 버려 큰개를 기를 수가 없게 되었었다. 누렁이와 뛰어다녔던 시절을 그리며 33년 쨰 샘내를 떠나지 않고 덕성산을 오르며 옛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동네 공원과 냇가를 거닌다.
2018戊戌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