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딘 디엠 정권이 붕괴된 후 혼미를 거듭하던 남베트남 정국은 1965년 6월 19일 명목적인 국가원수에 구엔 반 티우(Nguyem Van Thieu), 실권을 행사하는 수상에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체제로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인들에게 키 수상은 인기가 없었다. 그 당시에 불교도들과 대학생들은 자기들이 디엠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자기들은 참여도 못하고 도외시된데 대한 불만으로 어떤 계기를 노리고 있었고 후에(Hue)와 다낭(Da Nang)에서 그들은 산발적인 소요를 일으켰다.

구엔 반 티우(오른쪽)와 구엔 카오 키
1966년 3월에 들어서자 키 수상은 불교도들과 대학생들의 소요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1군단장 구엔 찬 티(Nguyen Chan Thi) 장군을 해임하고 구엔 반 추안(Nguyem Van Chuan) 장군을 임명했다. 티 장군은 친 불교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구엔 찬 티

구엔 반 추안
불교도들과 학생들의 좋은 구실이 생겼다. 다낭(Da Nang)에서 학생들이 먼저 데모를 시작하였다. 티의 해임을 취소하고 현 정권은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군, 민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다낭과 후에에서 불교도들과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였고 격렬한 반미구호가 나왔다. 다낭에서는 노동자들이 총 파업을 일으켜서 시는 마비되었다. 미군 당국은 다낭과 후에에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남베트남의 존립을 위해서 매월 수백 명의 미군이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인들은 반미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누구의 조종으로 누구를 위해서 외치는 것인가? 미군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대도 동요하였다. 티는 사이공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후에에서 반정부 시위를 부추기고 있었다. 키와 티의 대결이었다. 후에 지역에 있는 남베트남군 제1사단 불교도 장병들의 동요가 우려되었다. 키 수상은 지금부터라도 대표자를 구성하여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를 거쳐 연말까지 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정도로 만족할 데모대는 아니었다. 현 정권을 송두리째 뒤엎어야 했다. 데모는 사이공, 플레이쿠(Pleiku), 나트랑(Nha Trang)으로 번졌다. 나트랑에서는 미 공보원 도서관이 불에 탔다. 일부 군 지휘관 중에는 데모대에 무기와 탄약도 지원해 주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후에에서 일어났다. 1966년 4월 3일 약 3,000명의 제1사단 병력들이 사단 군악대까지 동원하여 현 정부는 퇴진하라고 시위하였다.
키 수상은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해병 3개 대대를 우선 파견하려고 미군에 항공수송을 요청하였다. 미군이 이러한 국내 정치적 문제에 미군기를 지원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남베트남이 보유한 항공기로 다낭으로 보냈다.
다낭 비행장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다낭 비행장으로 남베트남 해병들이 도착하자 시위에 가담한 옌(Yen) 대령 이하 남베트남군 2,000여 명이 이를 공격하기 위해 다낭 비행장으로 진격하였다. 미 해병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어준비를 하였다. 미군은 도착한 남베트남 해병대가 다낭 시내로 이동하지 않으면 비행장을 공격하지 않기로 남베트남군과 협상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155㎜포 2문과 105㎜포 2문을 방열하였다. 미군의 협상대표는 남베트남군의 포가 방열된 곳에 착륙하였다. 미 해병의 포병들도 사격준비를 하였고 미 해병 대대들은 방어준비를 하였다. 하늘에는 미군 전투기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미군이 제공한 포로 미군을 공격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사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남베트남군은 발사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위기는 지나갔고 남베트남군은 되돌아갔다.
남베트남 정부는 군인을 포함하여 이번 사태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문책도 하지 않으며 3~5개월 내에 자유선거를 약속하였다. 불교도들은 일단 수그러들었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봉기하겠다고 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군단의 지휘계통은 엉망이 되었다. 새로 임명되었던 제1군단장 추안 장군은 불교도의 압력으로 톤 탓 딘(Ton That Dinh)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교체된 딘 장군이 불교도와 야합한다고 판단한 키 수상이 딘 장군을 사이공으로 호출하였으나 딘이 거절하자 그를 해임하고 후인 반 카오(Huynh Van Cao) 장군을 임명하였다. 딘은 거부하고 아직도 군단장은 자신이라고 우기고 티는 실질적으로 남베트남군 제1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톤 탓 딘 중장

후인 반 카오 소장
군대의 동요는 계속되었다. 키 수상이 임명한 다낭 시장 곡 로안(Ngoc Loan) 공군대령과 군단장 카오는 불교사찰 습격문제로 대립하였다. 로안은 습격을 명령하도록 군단장을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하였다. 남베트남군들이 다낭에 있는 투란(Tourane) 강에 있는 교량을 폭파하려고 하여 미군들이 폭약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탄약고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미군들이 겨우 설득하여 미군이 경계하는 조건으로 시위 군인들을 돌려보냈다.

곡 로안은 이 사진으로 유명하다. 훗날 구정공세 때 사이공 경찰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포로가 된 베트콩 장교를 권총으로 즉결처분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키 수상은 공군 항공기를 출격시켜 그들의 거점을 공격하였다. 미군 해병대 3명이 부상당하였다. 미 해병사단은 즉각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로켓탄 1발이라도 발사하면 그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남베트남군이 이에 맞서 4대를 더 출격시키자 미군도 추가로 출격시켰다. 2시간 동안을 미군기와 남베트남 공군기가 공중에서 대치하였다. 결국 남베트남군 측이 먼저 착륙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남베트남 경찰은 군단장 카오의 명령을 받아내고 불교사찰을 습격하였다. 전세계 언론들이 불교도들은 비무장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그들은 무장하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총격전 끝에 불교도들은 무장해제되었고, 이렇게 해서 다낭도 잠잠해졌고 후에에도 1966년 6월 15일 공수부대가 진입하여 통제를 회복하였다.
이 사건은 불만을 가진 군인들까지 선동되어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미국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미군이 철수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67년 9월 3일에 남베트남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티우와 키가 경합하였으나 키는 국민들에게 너무나 인기가 없었고 미국 측도 티우를 지지하여 티우가 대통령, 키가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다. 대통령후보는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베트콩들의 방해공작으로 49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04명이 부상하기는 하였지만 투표율은 83%였고 티우가 35%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북폭은 물론 베트콩 지역에도 폭격을 중지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조건 없이 협상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던 트롱 딘 쥬(Truong Dinh Dzu)가 의외로 17%를 득표하여 2위를 하였다. 부정선거라고 논란이 많았으나 해외 언론들은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하였다.

트룽 딘 쥬
쥬는 공산주의자란 혐의로 결국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미국에서 야단이었다. 미 의회의원들이 방문하여 면담하고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덕분에 그는 자유스러운 형무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쥬는 미국에서 북베트남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수사기관에 체포되었다.

남베트남 경찰에 체포되는 트룽 딘 쥬
이제 남베트남 정국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군사상황도 호전되었고 평정계획도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한고비를 넘어 승리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