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읽어라
이경석 / 경희대 철학과 강사
사물의 구성 - 기계적 자연관
자연은 인과적 순서에 의해 생성 소멸하고 변화한다는 것이 근대 자연과학이 알려주는 바다. 그렇다면 인과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개별 사물은 어떤 것인가? 근대 자연과학은 개별 사물을 기계로 본다. 각 부품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운동을 하지만 전체로 결합되어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기계. 돌멩이, 풀과 나무들, 짐승들, 그리고 나아가 인간들, 아니 더 나아가 지구와 전 우주도 기계이다. 개별 사물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방식은 이런 견해를 대표한다.
스피노자는 개별 사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가 이해하는 개별 사물은 유한하며 제한된 존재를 갖는다. 만일 많은 개체가 모두 동시에 하나의 결과의 원인이 되게끔 한 활동으로 협동한다면, 나는 그러한 한에서 그 모두를 하나의 개체로 여긴다”. 이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개별 사물을 인과 상관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어떤 개물이 개별 사물일 수 있는 것은 그 개별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인과 관계 속에서 하나로 작용한다는 조건하에서이다. 여기서 구성 요소들의 질적 성격은 배제된다.
개별 사물에는 단순체와 복합체가 있다. 단순체란 단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으로만 구별되는 경우를 말한다. 즉 단순체는 일정한 운동 상태의 사물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단순체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분자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가장 단순하게 표현된 운동 상태를 말한다. 단순체는 일정한 운동 상태(또는 정지 상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다른 사물의 작용에 의해서만 변화한다. 그 변화는 또한 외부 사물의 운동의 강도와 방향을 자신의 운동의 강도와 방향에 상쇄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복합체는 이러한 단순체들의 결합이다. 즉 상이한 운동을 가진 여러 단순체들의 결합이 복합체이다. 상이한 운동을 갖는 여러 단순체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개별 사물을 이루는 것은 일정한 운동 전달 방식을 통해서이다. “크기가 같거나 다른 물체 두어 개가 다른 물체의 압력을 받아서 서로 접합하거나, 아니면 두어 개의 물체가 같은 속도로 또는 다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자신의 운동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우리는 그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다고 말하며, 또한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체의 이러한 합일에 의하여 다른 물체와 구분된다.”
이러한 복합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다른 물체와 구별되게 하는 합일’이란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운동 전달 형식이다. 이 운동 전달 형식이 그 개체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것은 개별 사물들의 구별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본질은 사물의 구성 요소들(질료)이 외부 사물의 작용(작용인)을 받아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사물의 형상이나 본질에 대해 작용이나 질료가 선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 **0**> 그렇다면 형상이나 본질은 단지 수동적인 것인가? 외부의 원인에 의해 단지 형성되기만 한 것인가? 개별 사물의 본질도 작용인이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본질에 따라 다른 사물에 작용한다.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을 구성하는데 작용하지는 않지만 사물의 생성 이후에 작용한다. 본질은 사물이 개체성을 유지하는 데 작용을 한다. 사물이 지속하는 것은 본질의 작용이며 본질이 힘이므로 사물은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사물의 지속력을 사물의“현실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개별 사물이 존재를 유지하는 조건은 개별 사물을 구성하는 분분들 간의 운동전달비율의 유지에 있다. 이 비율만 유지된다면 부분들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든 개체의 운동이 커지든 작아지든 운동의 방향이 바뀌든 정지하던 것이 운동하거나 그 반대이든 상관없이 개별 사물은 존재를 보존하게 된다. 부분들간의 운동전달 비율이 개체의 본질이며 존재 보존의 조건이라면, 개체는 일종의 기계이다. 사물을 기계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들의 사물관이다.
이러한 질료 중심적 개물론은 자연 전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들이 이러한 제 2의 종류의 개체로 조직된 제 3의 종류의 개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개체가 자신의 형상에 아무런 변화 없이 다른 많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들이 이렇게 계속하여 무한히 나아간다면, 우리는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부분들 즉 모든 물체가 전체로서의 개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미치지 않고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다. 그 자체로 각각 하나의 기계인 만물을 부품으로 하는 기계다. 이러한 기계적 자연관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신의 존재론 즉 실체-양태론에 대한 직관적 근거를 마련한다. 유일하고 불변적인 실체 안에 어떻게 다양하고 가변적인 양태들이 있을 수 있는가? 신 즉 자연, 자연 즉 기계.
기계로서의 인간
많은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각각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별 사물이다. 나아가 개별 사물이 기계인 만큼 인간도 기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는 기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근대 철학자들이 많다. 스피노자는 물론 데카르트도 신체가 일종의 기계라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복합체이다. 인간의 신체는 각 부분이 매우 복잡한 본성이 다른 매우 많은 개체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개체 중에 어떤 것은 유동적이고 어떤 것은 부드럽고 어떤 것은 딱딱하다. 또한 인간의 신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단히 많은 다른 물체를 필요로 하며, 이들 물체에 의하여 계속해서 재생된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외부 사물들과의 인과적 관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개체 즉 인간의 신체 자체는 외부 물체에서 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받는다. 또한 인간의 신체는 외부의 물체를 많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또한 많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봄으로써 신체는 과학과 기술의 대상이 된다. 생각이 들어 있는 자리인 뇌도 수술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신체를 통제하는 많은 기술들이 생겨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질료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과연 인간의 마음도 질료로 구성된 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서 근대 철학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인간의 마음은 다른 자연물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쪽과 인간의 마음도 다른 자연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쪽이 근대 철학에서는 대립한다. 전자는 데카르트와 그 후예들이고 후자는 스피노자와 그 후예들이다. 이 대립은 엥겔스가‘철학의 근본문제’라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후의 철학 판도를 주도해 왔다.
이 문제에 관련된 최초의 논쟁은 심신문제이다. 데카르트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론을 통해 이를 주장한다. 마음과 연장은 실제적으로 구분되는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심신 동일론을 주장한다. 하나의 실체에 상이한 여러 속성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실체일 수 없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논쟁의 승리 여부는 차치하고 각 주장의 의도는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의도는 심신 이원론을 통해 자연 중에서 인간 정신의 독자적인 영역과 인간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려는데 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인간을‘왕국 안의 왕국’이라고 비난하는 스피노자의 의도는 인간에 대한 갖가지 환상을 혁파하고 인간을 그 자체로 보려는 데 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이원론을 통해‘자아’내지‘의식’을 발견한다. 자아 또는 의식은 자연중의 사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자아 내지 의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그리고 자연을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업적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인간의 가치를 새로운 지반 위에서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이 인간 주체론은 독일 관념론을 거쳐 현대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가장 각광받는 이론이 된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서는 유출론적 위계 질서에서 상위의 위치를 상실한 근대인들의 안타까운 몸무림으로 취급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피노자의 심신 동일론의 결과는 당연하지만 아주 놀라운 것이 된다.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로는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믿지 못할 의식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허상을 통해서 현실을 산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직시하고 진리를 통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근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노력은 만물을 물로 설명하려는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들뤼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러셀이 말했든가? 철학은 단 하나의 철학밖에 없다고. 스피노자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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